"군산 원도심, 테마형 미술관 조성하자"

채정룡 군산시립미술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만나다

조종안 | 기사입력 2017/06/28 [04:07]

"군산 원도심, 테마형 미술관 조성하자"

채정룡 군산시립미술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만나다

조종안 | 입력 : 2017/06/28 [04:07]

지역의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창출하고, 고유한 문화·정서를 반영할 전북 군산시립미술관 건립위원회(위원장: 채정룡 전 군산대학교 총장)가 닻을 올린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지난 주말 군산시 명산동 예깊미술관에서 채정룡 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미술관건립위원회는 그동안 포럼, 강좌, 좌담회, 미술관 부지 방문 등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추진 방향을 제시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다"고 자평했다.
 

▲ 인터뷰하는 군산시립미술관 건립위원회 채정룡 위원장     © 조종안


"한두 달에 한 번씩 위원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고 시립미술관 건립 예정지인 근대역사박물관 부근(내항), 군산 앞마다 금란도, 구 우풍화학 자리, 은파호수공원 주변, 새만금 물류센터, 옛 일양약품 군산공장 부지, 발산초등학교 등을 돌아봤어요. 그리고 다양한 야외 시설물과 원도심권 도로, 빈 건물(극장, 상가, 창고) 등을 활용하면서 유적지 보존 방법을 모색했지요.


몇 차례 논의 끝에 일양약품 군산공장 부지(6500여 평)와 은파호수공원 주변 두 곳을 최적의 조건을 갖춘 후보지로 정했습니다. 그중 일양약품 부지는 일본인 대농장주가 금고로 사용했던 시마타니 농장 창고(국가등록문화재 제182호)와 보물급 석조유물이 수십여 점 전시된 발산초등학교 뒤뜰,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순국한 최호(崔湖) 장군 유적지(충의사) 등을 연계하면 또 하나의 관광벨트가 되겠더라고요.


은파호수공원 주변은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도심지와 연계성이 뛰어나 최적지로 꼽았습니다. 위락시설, 편의시설, 숙박시설 등 여건을 고루 갖췄을 뿐만 아니라 예술의 전당과도 인접하여 시너지효과도 기대되죠. 은파호수는 역사적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축조된 저수지로 재미난 전설도 많고, 우리나라 최초 수리조합 설립(1908)의 근거가 된 곳이죠."   
 

▲ 군산시 개정동 발산에 있는 시마타니 농장 금고     © 조종안


 

▲ 시립미술관 후보지로 선정된 군산은파호수공원     © 조종안


채 위원장에 따르면 시립미술관 건립 움직임이 본격화한 것은 2015년 4월. 당시 군산시와 한국 수묵화의 거장' 고 남천 송수남(1938-2013) 화백 유족의 작품기증 양해각서 체결이 계기가 됐다. 2016년 4월에는 군산의 미술계를 이끌어온 원로작가와 학계, 미술관 운영자, 문화예술 관계자, 외부 자문위원, 시민 등 14명으로 미술관 건립위원회가 구성됐다. 포럼도 개최했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군산은 부산, 인천과 함께 3대 항으로 꼽히면서 도시는 해가 다르게 성장하였다. 광복 후 역대 정부가 펼친 개발정책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던 1970년대에도 전국 10대 도시 중 하나로 꼽혔으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7만을 힘겹게 턱걸이하는 지방의 소도시로 전락하였다. 문화 시설도 제대로 된 갤러리 하나 없는 캄캄한 도시였으나 10여 년 전부터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상훈 여인숙(與隣熟) 대표는 작년 포럼에서 "군산은 몇 년 사이 원도심권을 중심으로 미술관을 비롯해 개인 공방과 작가 작업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월명동에만 공방 25개, 미술관 2개, 대안 공간 1개, 개인 작업실 10개, 문화예술단체 10개가 모여 있다."며 "어느 도시와도 차별화된 군산의 콘텐츠를 랜드마크 할 수 있는 시립미술관을 어디에,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미술관 건립해야
 

▲ 채정룡 위원장     © 조종안


채 위원장은 "1950~1960년대 군산은 나병재, 홍건직 작가 등이 개복동 비둘기다방에서 전시회를 갖는 등 활동이 활발했다. 전국에서 상업 그림을 그리는 전업 작가 100여 명이 영화동 지역에 거주하면서 호황을 누렸다. 그 후 전북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문복철, 이건용, 원창희 작가 등이 군산의 화단을 이끌었다"며 "이같은 미술 역사를 바탕으로 시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미술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그는 "어른과 어린이가 모두 호응하고 청년작가 육성에도 기여하는 미술관 건립을 위해서는 창작센터의 전시프로그램이 상시로 운영돼야 한다"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전반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 있는 군산 원도심권 일부 지역을 엮어 테마형 미술관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긍정적으로 검토돼야 한다"고 부연했다.
 

▲ 군산시 개복동 골목에 있는 시네마 우일(옛 군산극장)     © 조종안


"군산 지역 미술과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정리하는 국내외 상시 기획전을 위해 원도심권 일부를 시립미술관 분관으로 이용하는 방법도 고려해봄 직합니다. 해마다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개복동, 영동 주변 공간에 분수가 설치된 아담한 잔디공원을 조성하고 비어있는 건물들(극장, 상가, 창고, 학교, 구 시청 등)을 창작센터, 전시실, 수장고, 세미나실, 교육실 등으로 사용하자는 것이죠. 저비용 고효율 효과가 크리라 예상됩니다."


채 위원장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문화도시로 알려진 스페인의 빌바오시를 예로 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빌바오시는 원래 문화와는 거리가 먼 공업도시였는데, 1980년대 들어 철광석 광산과 조선소 등이 쇠퇴의 길을 걷는다. 그러자 정부는 몰락의 늪에서 구해낼 방법을 제시한다. 미술관 유치였다. 그리고 빌바오시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립한다.
 

▲ 군산 영동 거리(50~70년대에는 ‘서울의 명동’으로 불릴 정도로 화려하였다)     © 조종안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립한 이후 빌바오시는 오대양 육대주에서 관광객이 모여드는 기적을 연출하면서 대변신에 성공합니다. 빌바오시는 건축학도는 물론 문화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가보고 싶은 도시로 떠올랐죠. 미술관 하나가 도시의 이미지를 확 바꿔놓은 것입니다. 50만 국제관광 기업도시를 꿈꾸는 군산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났으면 하고 기대를 해봅니다.


우리가 고정관념을 깰 필요가 있어요. 대형 건물을 신축하는 것도 좋지만, 문화적인 차별성과 역사성에 무게를 두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객의 발길이 끊긴 상가(商街)를 갤러리가 들어선 예술의 거리로 거듭나게 하거나, 스토리가 있는 옛 건물과 유적지를 연계하는 테마형 미술관 즉 특화된 미술관 거리를 조성하자는 겁니다. 미술관의 도시 브랜드화는 대형 건축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채 위원장은 "다음 세대가 문화 예술이 잘 보존된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고 덧붙였다.


옛 문헌과 언론에 비친 군산 지역 미술인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군산 지역 최초 화가는 조선 후기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기록된 낭곡 최석환(1808~?)이다. 군산시 임피면에서 태어난 낭곡은 포도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산수화, 사군자, 영모도 등에도 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가석 심상윤(1877-1948)과 형제 화가로 널리 알려진 우석 황종하, 우청 황성하, 청몽 황경하, 미산 황용하 등이 군산에서 활동하였다.


우석, 우청, 청몽, 미산 모두 황해도 개성 출신으로 알려진다. 그들은 모두 그림에 뛰어나 '황씨 사형제'로 불렸다. 그중 우석 황종하(1887-1952)는 벽사의 상징인 호랑이 그림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았다. 우석은 개성에서 송도서화연구소를 운영하다가 1924년 동생들과 군산 개복정(개복동)으로 이주하여 서화연구소를 개설하였다.


군산에 정착한 황씨 사형제는 1926년 1월과 1927년 5월 군산 공회당에서 전람회를 열었다. 1930년 12월에는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후원으로 시내 횡전정(신창동) 서본원사(일본식 절)에서 '황씨 사형제 서화 전람회'를 개최했다. 당시 신문은 입장료 2원을 받았음에도 성황을 이뤘다고 전한다. 서병갑, 이상길, 정복연 등의 후배를 배출하면서 군산의 화단을 이끌었던 황씨 사형제는 1936년 서울로 이주한다.

 

▲ 하반영 화백(2012년 군산 ‘동국사’에서)     © 조종안

 

고 하반영 화백(1917∼2015)을 빼놓을 수 없다. 경북 금릉군(김천시)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전북 옥구군 산북리(군산시 산북동)로 이사한다. 하 화백의 학력은 코흘리개 시절 다녔던 서당과 군산신풍초등학교(4년제) 졸업이 전부. 그러나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수상 경력과 프랑스 유학(1979~1985) 등 그의 발자취는 A4용지 한 면을 가득 메우고도 부족하다.


하 화백의 본명은 김구풍이다. 그는 열세 살 때 조선총독부미술전람회(선전)에 정물화 <나팔꽃>으로 최고상을 받는다. 그리고 집에서 '환쟁이'라며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자 가출, 이름을 '하반영'으로 바꾸고 부두 노동자, 문구점 점원, 양치기(극장 프로그램 선전 알바) 등을 전전하며 한과 서러움이 담긴 그림을 그렸다. 신상옥 감독(1926~2006)과 이강천 감독(1920∼1993)이 군산에 거주할 때 그들과 함께 희소관(국도극장 전신)과 군산극장 포스터를 그렸다.


한국전쟁 때는 군산으로 피난 온 운보 김기창(1913~2001) 화백과 군산비행장 PX 근처에서 미군들 초상화를 그려주고 생계를 꾸려나갔다. 운보의 처(妻) 박래현 한국화가 친정이 군산에 있었던 것. 하 화백은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인 작품으로 동서양의 융합을 시도했으며, 개인전 50회, 해외 초대전 10회, 국제전 150여 회를 치르는 등 '동양의 피카소'로 불렸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은 2013년 6월부터 일제강점기 복원 건물인 장미갤러리 1층을 하반영 화백의 자료실로 화구 전시와 영상을 상영하고, 2층을 하 화백의 상설전시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전시는 작년에 봄·가을 2회 개최하였고, 올 봄에도 추상화 작품전이 3개월 동안 열렸다.

 

▲ 지난 봄 장미갤러리에서 열린 하반영 전시장 모습     © 조종안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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