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43] 사생활에 대한 결론

강명준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6/03 [10:01]

[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43] 사생활에 대한 결론

강명준 변호사 | 입력 : 2018/06/03 [10:01]

 

[번역 강명준 변호사     편집 추광규 기자]

 

 

 

 

 

1944. 6. 10.

 

마리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이 공책들을 넘기기 전에 내 축복을 덧붙인다. 이제는 너희가 약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원하기만 하면 너희는 내 예수의 사생활 전체를 알 수 있다. 영보에서부터 예수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자렛을 떠나는 순간까지 너희는 구술들뿐 아니라 예수가 가정 생활할 때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삽화들(episodes)도 얻게 된다.”

 

내 아들의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는 복음서들이 서술하는 그의 삶의 큰 그림 안에서 간단하게 언급된다. 복음서에서는 내 아들이 스승이지만 여기서는 사람이고,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자기를 낮추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는 평범한 생활의 겸손함 안에서 기적을 행한다. 그는 기적을 내 안에서 행한다. 내 태중에서 형성되고 있는 아들과의 접촉으로 영혼이 완덕에 이르는 것을 느끼는 내 안에서 말이다.

 

내 아들은 즈카르야의 집에서 세례자를 거룩하게 하고, 엘리사벳의 해산을 쉽게 해주고, 즈카르야에게 말과 믿음을 돌려줌으로써 기적을 행한다. 그는 요셉에게 기적을 행한다. 그가 비록 의인이기는 하였지만 그의 능력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숭고한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도록 그의 영혼을 열어 줌으로써 말이다. 나 다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소나기로 축복받은 사람은 요셉이었다.

 

요셉이 내 집에 왔을 때부터 이집트로 피난할 때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면에서 그가 얼마나 진보했는지 주목해라. 처음에는 요셉은 다만 자기 시대의 의인일 뿐이었다. 그 다음 일련의 단계를 거쳐 그리스도 시대의 의인이 되었다. 요셉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얻었고, 아주 안전하게 그 믿음에 의지한다.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할 때에 그는 ‘우리 어떡하지?’ 하고 말한다. 이 말에서 인간적인 걱정과 인간적인 근심을 가진 사람 전체가 드러난다. 그러다가 그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동굴에서 예수가 태어나기 전 그는 말한다. ‘내일은 좀 더 나을 거야.’ 오고 있는 중인 예수는 이 희망으로 그를 강하게 한다. 희망은 하느님의 선물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 중의 하나이다.

 

예수와의 접촉으로 거룩하게 되자 그는 희망에서 과감성으로 옮아간다. 요셉은 나에 대하여 품고 있던 존경심 때문에 항상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왔지만 이제는 그가 물질적인 일과 좀 더 높은 차원의 일도 지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는 가장으로서 결정했다. 그뿐이 아니다. 하느님인 아들과 여러 달 동안을 함께 삶으로써 성덕으로 가득 찬 후, 피난의 어려운 시간에 걱정하는 나를 격려하며 그는 말한다.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아기를 가지고 있을 터이니 여전히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오.’

 

내 예수는 목자들에게 은총의 기적을 행한다. 천사는 나와 잠깐 만난 것으로 인하여 은총에 대한 경향을 미리 갖게 된 목자에게 가서, 은총이 그를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도록 은총으로 인도한다.

 

내 아들은 지나는 곳마다 피난생활을 하면서나 보잘것없는 나자렛 고향에 돌아와서나 늘 기적을 행한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성덕이 마치 기름이 린넨 천에 번지듯이 번졌고, 꽃향기가 공기 중에 퍼지듯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마귀가 아닌 이상 거룩하게 되려고 열망하게 되었다. 이 열망이 있는 곳에 영원한 생명의 뿌리가 있다. 착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착하게 되고, 착함은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들의 거룩한 인성의 여러 순간을 나타내는 상세한 설명들을 통하여, 그의 일생의 시초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의 거룩한 인성을 갖게 되었다. M 신부(마리아 발또르따의 영적 지도 신부―역주)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여기면 그는 그 삽화들을 모아 질서정연하게 배열하여 빈틈없이 하나의 전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에게 한꺼번에 모든 것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 것과 같이 진행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섭리가 판단하셨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네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너에게 해 준 구술 하나하나가 네가 입었던 상처에 대한 약을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네가 준비하게 하려고 그 약을 미리 주었다. 우박이 쏟아질 때에는 그것을 피하게 해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폭풍우는 영적인 물속에 잠겨 있는 인류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너희 마음에 떨어진 초자연적인 가르침의 씨앗도 떠오르게 한다. 그 씨앗은 바로 그 폭풍우의 때를 기다렸다가 표면으로 다시 떠올라서 ‘우리도 여기 있다. 우리를 잊지 마라’ 하고 말할 것이다.

 

내 사랑하는 딸아, 더 나아가 이 순서는 섭리의 고안일 뿐 아니라 친절함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너의 현재의 심적 고통 가운데서 네가 어떻게 어떤 환상을 볼 수 있고 어떤 구술을 들을 수 있었겠느냐? 너는 그로 인해 ‘대변자’라는 네 사명을 다할 수 없게 될 정도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우리는 네 고통에 적합한 환상과 말씀을 먼저 너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우리의 친절이었다.

 

우리는 네 고통과 잘 조화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그 고통을 한층 더하게 하였을 법한 환상을 보여 주고 대화를 들려주는 것을 피하였다. 마리아야, 우리는 잔인하지 않다. 우리는 항상 너희를 격려하도록 행동하지 너희를 공포에 빠뜨리고 고통을 더하게 하도록 행동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너희가 우리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의 선물을 가지고 너희의 영혼을 안심시키러 오게 하려면, 너희가 요셉과 같이 ‘예수님이 나에게 남아 계시면, 모든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인간적인 선물과 위로를 너에게 약속하지는 않는다. 내가 너에게 약속하는 것은 요셉이 받았던 것과 같은 위로, 즉 초자연적인 위로다. 동방박사들의 선물은 불쌍한 망명자들의 무서운 가난 중에 번갯불처럼 빨리 없어졌다. 집을 구입하고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와 필요불가결한 식량을 장만하는 데 있어 일거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에게는 그 방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히브리인 공동체는 항상 동족들을 도와주지만, 우리가 이집트에서 만난 공동체는 박해당한 망명자들로만, 즉 그들과 합류하게 된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졌었다. 어른이 되었을 때의 예수를 위해 남겨두기를 원하여 아껴 둔 약간의 돈과, 이집트에 정착하는 데 든 비용에서 회수한 돈은 갈릴래아로 돌아오는 데에 매우 유용했는데, 우리가 돌아와서 나자렛의 집과 작업장을 수리하는 데 충분할까 말까 하였다. 시대는 변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은 항상 마찬가지여서, 남의 곤경을 이용하여 그를 부당하게 착취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예수를 데리고 있는 것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물질적인 재산이 생기지는 않았다. 너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와 조금이라도 결합하여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물질적인 재산을 열망한다. 그들은 예수가 ‘영적인 재물에 너희 마음을 두어라’ 하고 말한 것을 잊고 있다. 다른 것은 모두 불필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양식을 마련해 주신다. 새들을 위한 것처럼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것은 육체가 너희의 영혼의 장막인 동안은 너희가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분이 아시기 때문이다.

 

먼저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여라. 우선 너희 영에 필요한 것을 청하여라. 나머지는 그분께서 덤으로 주실 것이다.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요셉은 예수와의 결합에서 근심과 피로와 박해와 굶주림을 받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만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영적인 평화와 초자연적인 기쁨으로 변하였다. 나는 내 남편이 ‘비록 우리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를 가지고 있으니 여전히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 될 거요’ 하고 말하게 된 경지로 너희를 데려가고 싶다.

 

“네 마음이 상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네 마음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나도 안다. 네 생명이 소진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마리아야! 네가 예수에게 속해 있느냐? 예수에게 속해 있기를 원하느냐? 예수가 죽은 곳에서 예수처럼 죽기를 원하느냐? 사랑하는 내 딸아, 울어라. 그러나 언제까지나 용감하고 꾸준하여라. 순교는 고통의 형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가 고통을 견디는 항구함(constancy)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기에 의한 죽음이 순교인 것처럼, 정신적 고통(moral grief)도 순교가 될 수 있다. 같은 목적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말이다.

 

너는 내 아들을 위해 고통당한다. 네가 형제들을 위하여 하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에 대한 사랑이다. 예수가 그들의 구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의 고통은 순교다. 그것에 꾸준하여라. 너 혼자서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지 마라. 고통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울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고 인간의 본성을 억제할 힘이 없을 때 네가 할 일은 반항하지 않고, 그저 고통을 당하는 것이 전부다. 예수에게 ‘도와주세요!’ 하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가 네 안에서 해줄 것이다. 항상 예수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에게서 나오려고 애쓰지 마라. 네가 나오기를 원치 않으면 너는 예수 안에 남아 있을 것이고, 고통이 너무 커서 네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더라도, 너는 여전히 예수 안에 있을 것이다.

 

너를 축복한다. 나와 함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하고 말하여라. 이것이 항상 네 외침이 되어야 한다. 하늘나라에서 네가 이 말을 반복할 때까지. 주님의 은총이 항상 너희 함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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