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후손 없는 광복군’ 묘소 찾아 설 명절 합동차례

김은해 기자 | 기사입력 2019/02/06 [16:17]

시민단체 ‘후손 없는 광복군’ 묘소 찾아 설 명절 합동차례

김은해 기자 | 입력 : 2019/02/06 [16:17]

 

 

[취재 김은해 JMB방송     편집 추광규 기자]

 

▲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꽃다운 나이로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광복군의 넋을 위로하고 그 유지를 계승하는 무후광복군 17위가 모셔져 있는 수유리 합동묘소가 오랜만에 따뜻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시민단체 소속 회원과 시민 등 약 50여명이 설 명절 연휴 마지막날인 6일 오전 11시부터 서울 강북구 수유리 무후광복군 17위 합동묘소에서 합동차례를 지냈기 때문이다.

 

이날 합동차례는 대한민국순국선열 숭모회가 주최하고, 한국정치평론가협회(전대열 회장), 글로벌에코넷(김선홍 상임회장), 독도칙령기념사업국민운동연합(조대용 회장)가 주관해 열렸다. 또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구성된 천지인 산악회(신은선 회장)는 제물을 정성껏 마련했다.

 

시민사회단체와 강북구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순국선열숭모회가 2011년부터 설날과 추석 다음날 각각 연 2회 봉행한 추모제는 올해 설날에는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사)공정산업경제포럼, 환경안전포커스, 대한항일순국열사회 등이 후원하여 더욱 풍성한 차례 상이 차려지고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석했다.

 

올해 설날 추모제는 수유리 산골짜기에 울려 퍼진 애국가와 광복군 독립군가 각각 4절 및 만세삼창으로 시작되었다. 환경안전포커스 김은해 대표는 광복군 묘소 비석 뒷면에 새겨진 추모시를 애절하게 낭송했다.
 
비바람도 찼어라. 나라 잃은 나그네야.
바친 길 비록 광복군이었으나 가시밭길 더욱 한이었다.
순국하고도 못 잊었을 조국이여!
여기 꽃동산에 뼈나마 묻히었으니 동지들아 편히 잠드시라.

 

 

▲추모시를 낭독중인 김은해 환경안전포커스 대표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전대열 순국선열숭모회 상임대표는 국가보훈처장 명의의 묘역정리 사업 연혁비문을 소개하면서, 그 나름대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후손 없는 독립군’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빠져 못내 아쉽다는 소감을 밝혔다.

 

조대용 순국선열숭모회 상임공동대표는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면서 “이 헌법 전문에 따르면, 광복군은 마땅히 우리나라 최초의 국군”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는 광복군 합동묘소를 국립묘역으로 지정하고 그분들의 헌신에 걸맞게 정당하게 예우해야 한다”면서 “이제야 보훈처에서 수유리 애국선열 묘역 등 독립유공자 합동묘역을 국가관리 묘역으로 지정하여 국가가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국립묘지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늦었지만 환영한다.”고 말했다.

 

김선홍 글로벌에코넷 상임회장은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친일파 후손은 호의호식하고, 독립운동가 후손은 폐지 줍는 악습은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 정부는 독립운동 후손들을 3대까지 책임져야 우리는 후손들에게 떳떳한 대한민국을 넘겨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상임대표는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소선거구제 때문에 민주주의를 다수결주의 또는 특정이념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는 착각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면서 “하지만, 민주주의는 다수결주의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흑백논리와 진영논리 등을 뛰어넘어 대화와 소통을 특징으로 하는 다원적·포용적 민주주의로 나가야 사법적폐 등 온갖 적폐로 가득 찬 적폐공화국을 끝장내고 온전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다”면서 “이것이 광복군이 남겨준 유지로서 오늘날 요구되는 계승·발전시키고 꽃피워야 마땅한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김학민 뮤직스케치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후손 없는 광복군에 바치는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나누고 베풀고 봉사하는 그룹 한옥순 회장은 “이곳은 유난히 추운 수유리 골짜기에 광복군 영령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라면서 “이들의 존재와 희생을 알릴 체계적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쳤던 광복군의 순국선열의 정신을 생각하니 한없이 숙연해진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한편 국사학자 등 전문가들은 1940년대 항일독립투쟁을 끝까지 전개했던 3대 무장집단으로 1940년 9월 17일 창설된 한국광복군과 조선독립동맹의 군사조직으로 출범한 조선의용군, 소련 경내 소수민족연합군으로 운영된 88여단 하의 조선인 무장조직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들 3대 무장집단은 타국 영토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해야만 했기 때문에 독자적인 군사 작전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가장 소규모로 운영되었던 한국광복군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미국 및 영국 등과 군사작전을 공동으로 수행하면서 상대적으로 가장 뛰어난 국제정치 감각을 체득하고 연대협력 경험을 축적했다.

 

특히, 1942년 7월경 김원봉이 주도하던 조선의용대 일부가 합류함으로써 한국광복군이 좌우이념대립을 뛰어넘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합의하고 몸소 실천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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