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과 진영논리...권력비판일수록 진실에 의존해야..

전철현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0/03/20 [01:07]

감염병과 진영논리...권력비판일수록 진실에 의존해야..

전철현 칼럼니스트 | 입력 : 2020/03/20 [01:07]

[신문고뉴스] 전철현 칼럼니스트 = 19세기 3차 패스트가 대유행을 할 당시 뱅센 육군 고문서관 소장 원고에 나와 있는 감염병 방역에 따른 매뉴얼을 보면 '시민들의 외부출입은 금지되며, 그 규칙을 어기면 사형에 처하고, 유기견들은 모두 살해하며, 개개인의 집 열쇠는 국가 감독관이 관리하고, 모든 길에는 보초가 통제를 하며, 국가 감독관은 매일 순찰하며 모든 감염병 관련 사건을 기록한다'고 나와 있다.

 

▲ 뱅센성 자료사진...사진출처 위키백과    

 

단순한 질병에 왜 국가는 천재지변이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계엄에 준하는 비상사태로 국가방역에 힘을 썼을까? 이는 역병으로 인한 사망에 따른 노동력의 감소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까지 인류가 알지 못했던 패스트라는 치명적인 균으로부터 오는 공포심이 국가 권력의 권위와 공포보다 컸기 때문으로 본다. 즉 패스트의 감염공포로 인해 국가의 국민 통제가 무너지고 농민반란 등 사회나 국가 붕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 코로나가 창궐하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행정명령권을 발동, 과천 신천지 본부에 진입, 교인명부를 확보했으며, 종교시설에 대한 행정명령에 이어 PC방과 노래방, 클럽 등 3대 업종에 대해서도 '밀접이용제한 행정명령'을 발동하며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한 초강력 대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 같은 과감성을 국민들이 인정, 이 지사는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에서 일약 2위로 뛰어오르기도 했다. 모름지기 국가 권력이든 지자체 권력이든 시민을 위한 권력행사는 이처럼 신속정확하게 작동해야 국민들이나 시민들이 인정한다는 증거다.

 

▲ 행정명령권 발동을 알리는 이재명 지사의 페이스북 게시글...이재명 페이스북 갈무리     ©

 

인류 생성 후 국가 조직이 완성된 다음 국가를 운용하는 권력은 국민을 다스리고 통제하기 위한 공권력을 가졌다. 이 공권력을 바탕으로 지배계급의 영속성과 안정성을 위해 각종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국가권력은 국가 구성원에 대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 힘의 균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통제와 폭력을 사용해야 민중들에게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19세기까지 우리나라의 반상의 차이, 주인과 하인, 지주와 소작농, 서구쪽으로 눈을 돌리면 사람이면서 상품이어야 했던 노예들...식민지배 국민들...이런 지배와 피지배가 용인된 폭력적 국가권력도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인권중시 사회가 되면서 이러한 무차별적 폭력적 국가권력이 겉으론 사라졌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국가권력의 국민에 대한 생사여탈권만 '법'이란 태두리를 두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을뿐, 국가권력의 기능과 역할은 과거에 비해 절대로 줄어들지 않았다. 즉 국가의 시민사회 통치시스템은 국가라는 조직의 존재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말이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21C, 어느 국가권력이든 형식과 수단만 달리했지, 가능하다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고도의 과학기술을 장착한 국가 통제시스템을 원하고 있음도 보인다.

 

파놉티콘(panopticon) 건축도면에 따르면, 원형 건물 안에 갇힌 수감자들은 중앙 감시탑 안을 볼 수 없는 반면, 중앙 감시탑에서는 원형 감옥 안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수감자들이 누가 감시하는지는 몰라도 늘 자신이 감시받을 수 있다고 느끼며 스스로 조심하고 자신을 통제한다.

 

▲ 파놉티콘 감옥 관련 이미지    

 

이것이 제라미 벤덤이 이야기한 '파놉티콘'이다. 이 '파놉티콘'구조야 말로 가장 효율적으로 국민이나 시민을 감시, 통제할 수 있다. 중앙에서 원형감옥 안을 감시 및 통제하듯 감시 및 통제대상자인 국민이나 시민 스스로 서로를 감시 통제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국가 통제 시스템이란 말이다. 실제로 1928~1967년 동안 쿠바의 유명한 감옥은 '파놉티콘'을 바탕으로 설계되고 운영되었다.

 

때문에 이러한 '파놉티콘'의 원형에 현대 과학기술을 장착(CCTV, 안면인식기술, 빅데이터 활용 등)한다면 얼마든지 국민이나 시민을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다.

 

나아가 학교나 기업, 병영 뿐 아니라 소수권력이 다수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통제를 할 수도 있다. 또 전체 사회나 국가의 안전을 명목으로 피지배계급간의 감시와 통제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럼 21세기 현대사회에서 개방형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의 국민과 시민은?

 

불행하게도 아직 국가 관력의 지배와 통제,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반 시민과 국민이 얻고 쟁취한 것, 딱 한 가지가 있다면 '소극적인 개인의 자유를 획득했을뿐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헌법에 명시된 인간의 자유라는 것도 사실 개인의 소극적 자유(거주 이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등)보장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자타가 공인하는 이성적 민족이라고 칭송을 받는 독일민족조차도 바이마르공화국을 붕괴시키고 그토록 원하는 개인의 자유를 쟁취했지만 나치를 지지하고, 나치에 복종하고, 나치의 앞잡이가 되어 세계사의 비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쓴 에리히 프롬은 이 같은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서 개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에서 오는 불완전함과 그 결과로부터 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권위와 절대권력 홀은 절대자로의 귀의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군중속의 고독' 때문에 진영과 정당에 입당하고, 인간 존재의 고독 때문에 종교를 택하고, 파시즘 혹은 절대 권력자에 복종함으로서 안정감을 택하고, 여론이라는 익명의 권위에 복종함으로서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려 했다고 분석했다. 그 결과, 나치즘 정치체제의 지도자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복종과 더불어 유태인 학살이라는 강압적 행위가 동시에 나타났다고도 말했다.

 

'악의 평범성'이란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가 1960~1964년까지 겪었던 실화를 다루었던 영화인 한나 아렌트에서 주장된 이론이다. 당시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인 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내용을 보며,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한다.

 

▲ 한나 아렌트의 영화 악의 평범성 장면     ©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600만여 명의 유태인을 독가스실에 넣어 학살한 아이히만의 반인륜 범죄에 대해 아렌트는 사유 능력이 없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꼭두각시 관료가 저지른 평범한 악행일뿐이라고 말했다. 즉 그는 평범한 이 사회구성원 누구라도 아이히만의 처지와 상황이 되면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개연성이 있다고 '악의 평범성'에 면죄부를 주었다.

 

이는 국가권력이 밑에서 복무하는 관료, 전문가 등에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 나아가 이런 이론으로 국가권력의 악행도 일정부분 면죄부를 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악의 평범성'이론은 틀렸다고 본다.

 

코로나19가 한참 창궐해 정권의 안위가 흔들려 국가권력의 존폐유무까지 거론될 무렵 중국의 언론과 국민들에겐 국가로부터 유형무형의 통제와 감시가 가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40여일이 지난 2020319일 중국에선 코로나19 확진자 0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중국의 발표가 그렇다는 것 뿐. 그리고 중국 지도자 시진핑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중국 바이러스라고 하지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계가 이런 중국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즉 중국은 통계를 조작하고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의 눈초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구에서 17세 소년이 원인모를(?) 질병으로 죽었다. 기저질환이 없는 꽃다운 소년이 41도 고열 속에서 사경을 해매며 죽어 가는데 병원은 그를 방치했다고 유족은 분노한다.

 

▲ 영남대병원 전경    

 

치료병원과 감염병 통제당국에서 이 소년의 사인을 두고 코로나19의 음성이니 양성이니로 혼돈을 주다가 질병관리본부는 최종적으로 음성임을 단정했다.

 

그러나 이 환자를 치료하고 '양성'으로 발표했던 영남대병원은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이 때문에 정권에 비판적인 인터넷 갤러리들은 무수한 의혹을 쏟아내며 당국이 정권의 압력 때문에 사망진단서의 사인을 바꾸지 않았는지 의심한다. 그리고 이들은 또 당국이 유가족을 회유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과연 지금 우리나라에서 아이히만처럼 나치 전제주의 정권의 불합리한 통제와 감시적 명령을 묵묵히 수행하는 의료전문가 및 현장 의료진이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 사회는 나와 다르다. 지금도 무수한 설들이 난무하며 당국을 의심의 눈으로 보고 있다.

 

오늘 이 글을 쓴 이유는 이런 왈가왈부를 목도하며 너무나 촘촘한 그물망처럼 짜여진 현대국가의 '파놉티콘 통제 및 사회'라 할지라도 언론이 본질과 소명에 따른 보도를 하고 전문가가 학문적 소신과 양심의 자유를 걸고 진실을 말해왔다면 이 혼돈은 바로 정리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라도 진실은 결코 억압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반대로 의혹을 아무리 키워도 진실을 왜곡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진영과 정당, 정치와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지금같은 '혼돈'의 시대에 국가권력이 의심을 받는 상황이 더는 확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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