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돌아온 3선 김민석’, 그에게서 김대중 향기가 난다

인터넷언론인연대 기획, 21대 국회의원 당선자에게 듣는다. 서울의소리‧신문고뉴스 공동취재, 민주당 김민석 당선자 인터뷰

임두만 | 기사입력 2020/04/25 [17:30]

[인터뷰] ‘돌아온 3선 김민석’, 그에게서 김대중 향기가 난다

인터넷언론인연대 기획, 21대 국회의원 당선자에게 듣는다. 서울의소리‧신문고뉴스 공동취재, 민주당 김민석 당선자 인터뷰

임두만 | 입력 : 2020/04/25 [17:30]

[신문고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김민석이 여의도로 돌아왔다. 그 김민석을 만났다. 무려 18년 만에 국회의원 당선자'가 된 그와 정치, 정책, 정당, 민생을 놓고 대담을 나눴다. 대담 도중 종종 그에게서 김대중이 비춰졌다. 그 스스로도 김대중을 통한 공부가 있었음도 숨기지 않았다.

 

18, 말이 18년이지 그 기간은 신생아가 태어난 뒤 자라서 대학에 들어갈 긴 기간이다. 갓난이가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어른이 되기까지의 기간이란 말이 더 실감난다.

 

1964년생, 1996년 32세에 초선, 2000년 36세에 재선, 2002년 38세에 집권여당의 서울시장 후보...김민석의 이름 앞에 붙일 수 있는 찬란한 정치 경력이지만, 이 욱일승천은 일거에 무너져 내렸다.

 

이회창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필요하다. 그 단일화의 불쏘시개가 되기 위해 내가 희생하겠다” 2002년 10월 17일 김민석은 이런 뜻을 밝히며 민주당을 탈당했다. 이후 그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자 그는  "죽기로 한다면 산다는 각오로 모든 비난을 무릅쓰고 새 시대에 맞는 국민통합 정권을 만들기 위해 민주당을 탈당한 것"이라고 자신의 결단이 민주정권 재집권임을 강조했다.

 

김민석의 이런 결단은 결국 노-정 단일화의 성공으로 이어졌고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에겐 스스로 말한 대로 죽기를 각오한 희생을 현실화시킨 독약이었다. 그리고 이 독약의 해독기간이 무려 18년이다. 따라서 김민석은 이를 회고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 서울의소리 스튜디오에서 인터뷰에 임한 김민석 당선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다.  

 

하지만 18년이 긴 세월이듯 50대의 김민석은 그만큼 무거워져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진중함을 느끼게 했다. 단어선택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역사의 전환을 말하는 그에게서 그 스스로의 전환기를 넘어섰음을 느끼게 했다. 특히 김대중을 회고할 때는 더 진중했으며, 말 속에 깊이가 있었다.

 

그는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를 수행했다며 김 전 대통령께서 중국음식을 좋아하셔서 종종 중국음식점에 같이 갔다"고 말하고는 "선거일 전전날도 중국집에서 밥을 먹었다"고 회고했다.

 

그런 다음 "당시 많은 여론조사를 통해 승리를 내다보는 중이었으므로 김옥두 의원 등과 김 대통령을 모시고 중국집에서 밥을 먹으며 제가 이번 IMF때 써 먹힐려고 그동안 떨어지셨나 봅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그러자 그래 그런 것 같아그러시면서 울려고 하시는 거였다고 전했다.

 

그러 다음 정치인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자 한 것, 즉 평생 국가를 위해서 뭘 하고 싶어 하셨지만 그것이 IMF 이후 구조조정이라든지 국난극복이라든지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하지만 실제상황에서는 IMF극복이라는 과제가 주어졌고 그것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말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을 회고하는 김민석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인터넷언론인연대

 

그리고는 “DJP연합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전교조 합법화' '민노총 합법화' '4대 복지의 완성'. '남북대화'도 이루어졌다. 결국 그가 원하던 것을 하신 것이다라며 이처럼 모범 답안이 예상하는 대로 가는 것이 아니므로 (이번의 여당 대승은)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촛불과 개혁이라는 게 흐름이 맞지만 더 큰 무엇이 있을 것이라며 더 큰 무엇은 코로나19의 극복일 것이고 그 이후 국가의 미래를 책임 질 정책의 개발과 집행이라고 말했다.

 

이런 그의 말은 그의 구상이 상당한 깊이로 침전된 것임을 느끼게 했다. 또 정책으로 북유럽의 사회민주제를 통한 평화로운 복지국가 완성을 거론,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외통위에서 외교와 통일 등에 관해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책 쪽의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해 정책전문가 김민석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정책전문가 김대중의 뒤를 따라서....

 

▲ 이날 인터뷰는 미래일보 장건섭(우)기자도 함께했다.     © 인터넷언론인연대

 

이런 포부를 숨기지 않은 김민석은 자신의 여의도 롤백에 대해 당선이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제가 정치를 하고 국민들에게 실망도 드렸다"면서 "이번 일(지역구 당선)로 저에 대한 모든 이해와 양해 그리고 용서가 이루어졌다고는 보지 않는다고 조심스러워했다.

 

이어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라며 정말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하고는 큰 틀에서 국가나 세계문명의 전환기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의미 있는 정치 큰 정치를 하도록 노력 하겠다고 다짐했다. 따라서 이런 김민석에게 자연스럽게 김대중의 향기가 느껴졌다.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서 94만6천여 표 차이로 졌다. 그러나 당시의 대선이 공정한 게임이었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이 대선의 치열한 접전이 결국 정치인 김대중을 정치적 금치산자로 만들었다.

 

이후 김대중은 납치, 감금, 연금, 체포, 구속 등의 단어로 나타난 재야인사'였고, 전두환 이후엔 사형수, 추방, 망명 등의 단어가 더 붙었다. 그 인고의 세월이 16년이다.

 

김대중이 정치 현장으로 돌아온 것은 인고의 16년이 지난 1987년이다. 하지만 16년 인고의 세월 뒤에는 또 연이은 패배로 다시 10년의 와신상담이 있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국민들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후 대통령 김대중은 우리의 정치와 경제 패러다임 변화, 그리고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노벨평화상 수상 등으로 국격과 민주주의 역사를 한단계 성장시키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 당선인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인터뷰 진행자 임두만 고문과 함께   

 

그 스스로 돌아온 정치신인이라고 말하는 김민석, 또는 젊은 3선으로 호칭하는 김민석 그 김민석이 다시 18년 만에 재출발선에 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스스로도 말했듯 당선이 곧 모든 면죄부는 아니다. 그를 바라보는 눈은 분명하게 호불호로 갈린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김민석 자신의 몫이다.

 

첨부된 영상은 김민석과 1시간에 걸친 인터뷰 영상이다. 서울의소리 스튜디오에서 생중계로 진행되었으므로 단 11초의 가감, 즉 편집이 없는 전문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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