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어선들의 불법어획 근절해야"

임성식 전 군산시 수협조합장 "어민들 건의 외면하면 수산업 위기"

조종안 | 기사입력 2017/06/04 [03:35]

"중국 어선들의 불법어획 근절해야"

임성식 전 군산시 수협조합장 "어민들 건의 외면하면 수산업 위기"

조종안 | 입력 : 2017/06/04 [03:35]

 

 

▲ 사진 전시장을 돌아보는 임성식 전 군산시수협 조합장     © 조종안

 

 

임성식(80) 전 군산시수협 조합장. 그는 평생을 험한 파도와 싸워온 바다의 사나이다. 열네 살 때 돛단배(1.5톤) 화장(배 주방장)으로 어부 생활을 시작, 기관장, 선장을 거쳐 스물아홉에 어엿한 선주가 된다. 그리고 1969년 가을 20톤짜리 만수호(안강망)를 끌고 먼바다로 진출, 국내 최초로 '동지나해'(동중국해) 어장을 개척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정부의 어업 정책이 바뀌면서 상도 많이 받았다. 국민의 정부 시절(2002) 훈장도 받았다.


임씨는 군산에서 북서쪽으로 22km 떨어진 작은 섬 연도(煙島)가 고향이다. 보리죽 먹기도 어려운 가난한 집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남다른 건강과 끈기를 밑천으로 자수성가한다. 자비를 들여 연도에 전기를 끌어들이고 학교 담장을 쌓아주는 등 애향심도 남다르다. 고향 어민들의 가난 해결을 위해 연도 어촌계장을 맡기도 하였다.


한때는 안강망 13척을 보유, '어부 갑부', '안강망의 달인' 소리를 들으며 서해 어장을 누비고 다녔다. 4대(1994~2010)에 걸쳐 군산시 수협조합장도 지냈다. 어민들의 신뢰와 지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정리하고 어선(140톤) 한 척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35년 전 마련한 째보선창 부근 단독주택에서 아내와 조용히 노년을 보내고 있는 임씨. 지난 5월 27일 오후 '사진전'이 열리는 예깊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 국내 처음 동지나해 어장을 개척한 만수호(가운대) 진수식     © 조종안


"옛날 뱅어잡이 배도 있고, 판자로 지은 동부어판장도 있고, 선술집이 꽉 들어찼던 째보선창 부둣가 풍경 사진도 있고, 군산 역사를 다 모아놨고만. 사진을 다 어디에서 구했나···. '만수호'를 여기서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 진수식을 해망동 대신조선소에서 했거든. 가만있자 뒷모습만 보이는 이 사람은 내 마누라 같은디··· (웃음)


여기 이 가운데 배가 동지나해 어장을 국내 최초로 개척했던 그 '만수호'여. 대한민국 수산업이 빨리 발전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고마운 배지. 이후 근해에서만 이뤄지던 어장이 태평양으로 확장됐거든. 가만있자 그때가 1969년 가을이었으니까 몇 년 됐냐. 벌써 50년이 돼가네. 참 그때는 죽을 줄 모르고 덤볐지. 군산 근해에서도 어선 전복 사고가 자주 일어났었거든···."


임씨는 "나도 열다섯 살 되던 해 겨울 개야도(開也島) 근해에서 주꾸미 잡이를 하다가 전마선이 뒤집히는 바람에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본선(本船) 어부들의 재빠른 구조로 살아나는 등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사실 동지나해 어장 진출도 조업이 아니라 생사가 걸린 투쟁"이었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광복 후 군산의 어선과 어획량 변화
 

▲ 어류를 바닥에 쌓아놓고 경매하는 1960년대 군산 동부어판장     © 조종안


군산 지역 어업은 광복 후 연근해를 중심으로 소형 안강망(중선), 연승 어업(주낙 어업), 유자망 어업 등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1960년대 이후 낭장망 어업과 새우어업(조망) 등 새로운 어업을 시작한다. 1969년 동지나해 어장 개척 이후에는 어선의 대형화, 현대화와 함께 동북아 어장을 개발하는 등 활기를 띤다.


군산시 수협 관내 연도별 어선 추이를 보면 1962년 당시 어선은 총 711척 가운데 동력선이 158척으로 동력화 비율이 22%에 불과했다. 어선의 80% 가까이가 풍선(風船)이었던 것. 그처럼 열악했던 어로(漁撈) 상황은 작업 능률향상을 위한 동력화 추진으로 1975년에는 총 1120척 중 동력선이 55%(617척)를 넘어선다.


1981년에는 총 1291척 가운데 동력선이 90%(1177척) 이상 차지한다. 어선 척수도 1962년에 비해 1975년 3.9배, 1989년 9.6배(1514척)로 증가한다. 1996년에는 동력선이 96%를 차지한다. 이후 2003년 말에는 총 2079척 중 동력선이 100%(2073척)에 이른다.


어획량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대부분 어선이 풍선이었던 1962년, 그해 어획량은 5천 224톤이었고 위판 실적도 8천900만 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구·어법이 개선되는 1970년대 군산 어민들은 황금기를 구가한다. 1975년 56억 3000만 원을 올리고, 1977년 112억 7000만 원으로 꿈에 그리던 100억 원대를 돌파한 것.


1980년대에도 해마다 기록을 경신한다. 1983년 8월 해망동 공판장이 지금의 자리에 준공되고 1987년 위판액은 420억 원에 이른다. 이후에도 어선이 계속 증가하고 대형화되면서 1999년에는 608억 원으로 정점을 찍는다. 그리고 2000년 이후에는 500억 원을 약간 웃돌면서 답보 상태를 거듭한다.


2011년 군산시 수협 위판액은 825억 원으로 조합 창설 이후 최고 기록을 작성한다. 그 후 해마다 500억~600억 원대 사이에서 등락을 거듭하다가 2016년 712억 원으로 700고지를 넘어선다. 그런데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1977년 실적(112억 7천만 원)의 1/1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시급한 것은 중국 어선들의 불법어획 근절
 

▲ 중국 어선들의 불법 어로 근절을 강조하는 임성식 씨     © 조종안


1950~60년대에는 째보선창 부근에서도 농어, 민어 등 고급 어종이 낚시에 걸려 올라왔다. 그러나 서해안 개발이 본격화되는 1980년대 이후 산업단지 조성과 새만금사업 등으로 근해 어장이 상실되거나 황폐해진다. 더욱이 1993년 이후 마라톤협의 끝에 2002년 6월 발효된 한·중 어업협정은 군산 지역 수산업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에 임성식씨는 "어민들의 권익 보호와 소득증대 정책도 중요하지만, 더욱 시급한 것은 중국 어선들의 불법 어획을 근절시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중 어업협정 이후 우리는 해마다 정부에서 금어기나 휴어기를 정해놓고 강력히 단속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우리가 쉬는 동안 중국 어선들은 하루 수백 척씩 EEZ(배타적 경제수역)를 넘어와 불법 어획을 일삼는다. 이대로 가면 우리 어족자원은 씨가 마를 거다. 어민들의 권익 보호가 따로 없다. 정부의 강력한 대처가 곧 어민들 권익보호다.


우리 수산업은 어족자원 고갈로, 유자망도, 연승도, 안강망도 한계에 와 있다. 우리 어민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차별적으로 이뤄지는 중국 어선들의 불법어업 단속이 더 시급하다. 정부는 어민들이 건의하면 심각하게 검토하고 대처해줘야지 입버릇처럼 하는 잔소리로 알고 외면하거나 문제점을 방치하면 우리 수산업은 머지않아 큰 위기에 닥칠 것이다."


임씨는 "근해에 불법으로 설치해놓은 어망과 어구들의 단속을 당국에 요구해도 돌아오는 것은 불법남획을 일삼는 중국어선들 때문에 손이 부족하다는 답변뿐"이라며 "해경의 손이 부족하다면 신고제를 활성화해서라도 단속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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