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우는 ‘팽목항’과 ‘세월호’

임두만 | 기사입력 2017/08/20 [19:13]

아직도 우는 ‘팽목항’과 ‘세월호’

임두만 | 입력 : 2017/08/20 [19:13]

[신문고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2017년 8월 17일 진도 앞바다는 파랗고 잔잔했다. 노란 리본이 나부끼는 팽목항 방파제를 곁에 두고 옆의 선착장에서 인근 조도와 관매도 등을 운행하는 카페리는 변함없이 자동차와 사람들을 배에 싣고 또는 부리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 파랗고 잔잔한 물길 위를 배들은 변함없이 다니고 있었다. 그 광경에 나는 흘러간 머릿속 회로를 돌렸다.

 

▲ 넘어지면서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이미지 출처 : 유경근 페이스북     ©임두만

    

2014년 4월 16일 아침...나는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리고 거기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목격했다. 승선인원 400여 명을 태운 배가 가라앉고 있는 광경이었다.

 

잠시 전원구조라는 글씨가 자막으로 떴다. 그래서 안심하려 했는데 그 소식은  곧 오보임이 알려졌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하루 종일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자막이 떠나지 않았으나 배는 점점 기울더니 오후 쯤 아주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배 안의 학생들에게 퇴선 명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은 없었으며 끝내는 물속에 가라앉은 배 안으로 산소를 넣는다는 소리나 듣고 있어야 했다.

    

그날 4.16...이후로 나는 그 시간에 이 나라 대통령이 성형수슬을 했다는 둥, 밤에 잠을 못 자는 불면증의 대통령이 낮에 오수를 취하는 중이었다는 둥의 어처구니없는 소식들을 전언으로 들었다.

 

청와대와 대통령 측은 이런 전언들이 나도는 것을 알고 대통령이 정상보고를 받고 정상조치를 취했음에도 유언비어로 대통령을 모독한다며 정색하고 해명에 나섰다. 하지만 결국 최근 최순실 청문회와 특검의 수사결과 보도까지 청와대의 해명보다는 세간의 설이 더 설득력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 박근혜 세월호     ©편집부

 

 

그날 이후, 나는 당시 권력자의 그 어떤 행위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눈물을 흘렸다든지, 그가 분향소에서 분향을 했다든지, 그가 해경을 해체하고 무슨 안전처를 만든다든지 하는 행위들에서 가식만 보였다. 또 그 가식은 곧바로 드러났다.

    

세월호 진상조사원회의가 법에 의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의 활동방해가 명시된 세월호법 시행령이 만들어졌다. 국회가 법으로 진상을 조사하자고 하니까  행정부가 시행령으로 막은 것이다. 그런 다음에도 진상조사위 부위원장이 사퇴하므로 원할한 조사위 활동이 될 수 없게 한 것, 시한연장의 불허와 위원회 예산의 칼 같은 삭감 또는 중단 등은 그 가식의 표본이었다.

    

그 권력자는 민중의 저항으로 퇴진했다. 그리고 지금 감옥에 있다. 새로운 권력자는 세월호의 진상에 대해 다시 조사할 수 있다는 자세다. 바다에서 끌어 내 올려진 세월호는 팽목이 아닌 목포신항에서 얼마 전까지 돌아오지 못했던 4명의 유해를 하나 둘 꺼내 놓으며 말없이 울고 있다.

    

그리고 가장 최근 들려진 세월호 소식은 침몰지점에 대한 2차 수중수색 작업을 위해 바다에서 퍼올린 토사를 분리 수색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 1점을 발견됐다는 것이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인 단원고 남현철·박영인 군, 양승진 교사, 권재근·혁규 부자 등 5명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바다 밑 약 5천625㎡를 0.2∼2.0m 깊이로 준설하는 과정에서 유해가 나타났다는 것.

 

▲ 노란 리본 형상 조형물...그리고 그 옆의 기다림의 의자...     © 임두만

 

이런 소식을 가슴에 담고 그 바다를 찾았다. 노란 리본 형상의 조형물과 그 옆 기다림의 의자...보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아이들과 엄마들의 손때가 묻어있음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던 유물들, 아이들이 좋아하며 먹던 ‘자유시간’ 등의 초컬릿, ‘마이쮸’ 등의 사탕...책상 위에서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작은 조화들과 필기구가 내 눈과 가슴을 잡았다.

 

▲   이제는 리본만 바람에 날리는 팽목항 © 임두만

 

하늘우체통...그애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하늘로 배달되기를 바라는 마음...리본 하나하나와  “늦게 와서 미안해” “다시 돌아오길” “잊지 않을께요” 등의 글귀가 새겨진 타일만이 그곳이 눈물과 한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팽목은 지금도 그렇게 울고 있었다.

 

 

▲ 하늘 우체통 주변을 돌아보는 사람들은 아직도 눈물을 훔쳤다.     © 임두만

 

돌아오는 길에 박정석 진도문화원장을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서 “사실 그곳의 정식 명칭은 팽목항이 아닌 진도항이다. 이미 세월호 사건이 나기 전인 2013년 진도항으로 개명했었다. 그리고 진도항은 목포 외항의 역할을 하기 위해 그랜드플랜을 준비 중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 인터뷰 중인 박정석 진도 문화원장     © 임두만

 

그는 또 팽목항 유래에 대해 “'팽목항'이란 이름은 나무에서 유래됐다.”면서 “그곳 바닷가 마을에 팽목구미라는 나무가 많았고, 팽목리에 속한 도리섬에는 팽나무가 많았다. 어느 쪽이 진짜 유래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팽목(彭木)이란 항구 이름는 나무를 보고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013년 2월 남해안권 발전 종합계획 선도사업 지역으로 선정된 팽목항의 명칭을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진도항으로 개칭, 공식 명칭은 이 때부터 '진도항'이다.”라며 “진도군은 방파제 옆에 '진도항'이라고 적힌 안내판까지 설치했으나 세월호 사고 후 해경, 진도 주민들이 여전히 익숙한 '팽목항'으로 불러 결국 많은 언론을 통해 그렇게 불려지므로 전국에 ‘팽목항’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곳의 이름이 진도항이면 어떻고 팽목항이면 어떠랴. 이미 그곳은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린 곳이며 눈 앞 거대한 비극의 현장인 바다 한 가운데를 바라볼 수 있는 눈물의 장소다. 295명의 싸늘한 시신이 그곳으로 들어 와 가족의 품에 안겼으며 가족들은 이들을 안고 목놓아 울었다.

 

▲  타일로 새겨진 하늘나라로 보내는 편지 © 임두만

 

미수습자 9명의 가족은 이곳을 1080일 동안 지켰다. "9명 모두 집으로 돌아가자"는 간절한 기도가 이곳에서 이어졌으며 지난 3년의 기억과 기록이 조형물과 노란 리본 등으로 새겨졌다.

 

이곳은 이미 세월호의 아픔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됐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항구'가 되었으며 '통곡의 항구' 등 많은 이름으로도 불렸다.

 

▲ 이곳에서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으랴...     © 임두만

 

2017년 8월 17일...그곳 진도항(팽목항), 그날 그곳은 눈이 시리도록 맑고 파랬다. 이 푸르름 아래에서 “이게 나라냐?”고 울부짖는 이들에게, 어른이 어른다운 나라, 지도자가 지도자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곧 '세월호 사건'임을 절절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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