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센인 다음에 광부’ 생존권 짓밟은 ‘전두환’

[사북사태 광부 ‘박노연’-上]석탄증산 보국 "사고나면 책임은 광부가"

추광규 이명수 김아름내 심경호 기자 | 기사입력 2017/11/02 [16:19]

‘ 한센인 다음에 광부’ 생존권 짓밟은 ‘전두환’

[사북사태 광부 ‘박노연’-上]석탄증산 보국 "사고나면 책임은 광부가"

추광규 이명수 김아름내 심경호 기자 | 입력 : 2017/11/02 [16:19]

[특별취재팀. 서울의소리 이명수 심경호 기자, 우먼컨슈머 김아름내 기자, 신문고뉴스 추광규 기자]

 

스스로를 ‘막장인생’ ‘한센인 다음에 광부’라며 체념적이고 자조적인 의식에 빠져 있던 광부들이 파출소를 습격했다. 흥분한 광부들은 진압경찰에 맞서 싸우면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60여 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다.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80년 사북사태라고 부르는 이 사건에 대해 당시 계엄사령부는 관련 인물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79년 박정희 시해로 찾아온 80년 서울의 봄을 싸늘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또 일제 강점기부터 누적되어온 탄광촌의 문제가 분출된 이 사건은 불과 한 달 후 광주에서 벌어질 참극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37년 전 발생했던 사북사태가 현재의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37년 전 사북사태의 한 복판에 있었던 늙은 광부들의 입을 통해 당시로 돌아가 보겠다.

 

당시 상황에 대한 보충자료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의 2008년 4월 8일 결정문 등을 인용했다. 기사는 상-중-하로 나누어 총 3회에 걸쳐 게재한다.

 

 

▲태백 석탄박물관에 전시된 모형.  80년대 광부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 이명수

 

 

# 막장 인생 광부들...그들은 왜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었나

 

“사북사건의 사회적 충격을 빌미로 ‘신군부’는 1980년 4월 30일 긴급 계엄사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고 ‘불법행위 엄단’을 천명함으로써 확산되는 민주화의 열기를 차단하려 하였다. 12.1 2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신군부는 사북사건과 이어진 일련의 노동자 파업과 학원의 민주화 시위를 ‘혼란과 무질서’, ‘무법지대’로 규정하고 5.17 계엄확대 조치의 명분으로 삼았다”(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 中)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시행당한 후 찾아온 1980년 서울의 봄을 얼어붙게 한 그 시작은 사북사태였다. 1980년 4월 21일 오후 14시경 약속되었던 노조집회가 계엄당국에 의해 불허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노조원들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동원탄좌 선산부로 일하던 박노연(78)씨의 증언이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는 사내 종업원들이 4,200명, 3개월 임시부(비정규직)5~600명 등 총 4800명 되는 걸로 기억한다. 어용노조 문제로 사태가 벌어졌다. 4년 간선제였는데 이재기가 3선까지 연임을 했다.

 

노조지부장 선거에서 대한석탄공사에 일하다가 스카우트 됐던 이원갑과 이재기가 둘이 붙었다. 이재기는 기존 대의원 멤버 17명을 데리고 제주도까지 원정 가서 회식하면서 이원갑한테 뺏기지 말자. 역적모의를 한 것이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한 표 차이로 이원갑이 미역국을 먹었다.

 

이원갑이 부정선거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떳떳하게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데 지네끼리 쑥덕거리고 제주도까지 원정 나가서 선거운동하고 그 다음날 투표했다. 부정 아니냐. 무효로 하고 정식으로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직선제로 하자 이랬단 말이에요. 이재기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4월 21일 날 늦어도 오후 1시까지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이재기가 사표를 쓰겠다고 했다. 사표를 수리한 다음에 재공고해서 다시 선거를 하자고 돼있었는데 이재기가 노조에 안 나타났다.  3~400명이 노조에 모여 있었는데 오후 4시 가까이 됐을 것이다. 술 한 잔씩 마시고 이재기 잡아오자고 말하는 등 분위기가  굉장했다”

 

진실화해위는 이어지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때 현장에서 사진 채증을 하던 정선경찰서 소속 사복경찰관이 광부들에 의해 발각되었다. 사복경찰관이 노조 사무실 1층 창문을 넘어 노조사무실 앞마당에 대기 중이던 경찰 차량을 타고 달아나려 하자 주위의 광부들이 몰려 들었다. 당황한 경찰관은 그대로 출발하였고 이때 노조원 원일오 등이 차량에 치여 중상을 입는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경찰 차량은 그대로 도주하였다.”

 

사북사태의 그 시작은 노노갈등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온 탄광촌 특유의 인건비 착취와 열악한 환경등 수십 년간 이어져 내려온 탄광촌의 적폐에 기인하고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광부들의 누적된 불만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렇게 전했다

 

“(주)동원탄좌는 1980년 강원도 정선군 일대에 총 24개 석탄 광구를 보유하고 연간 약 160만 톤 전국 총생산량의 약 9%를 차지하고 종업원 수는 총 3,428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회사였다. (주)동원탄좌 사북광업소는 석탄 산업에 대한 국가의 육성정책에 따라 많은 보조금과 특혜조치를 받으며 외형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니 인력에 의존하는 낮은 기계화율과 부비끼등 고질적인 임금문제, 불량사택과 낙후된 후생복지시설, 노동자들의 사회생활까지 감시하는 근로감독제도 '인감제도'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광부들의 불만을 촉발시킨 요인으로 지적된 ‘인감제도’에 대해 1980년 정부합동조사반 보고서는 이렇게 그 실상을 전했다.

 

“동원탄좌 회장의 친척이 운영하는 소비조합 구판장에서는 광부들이 회사 직원임을 증명하는 인감증만으로 외상구매를 가능하게 하였다. 광부들의 월급은 구판장 외상값을 회사에서 미리 제하고 지급되었다. 탄광지역이 원래 물가가 높았지만 당시 사택내 구판장은 회장의 친척이 소비조합을 운영하며 이권화 하여 물건을 오히려 비싸게 팔고 타 상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심지어는 타 지역에서의 구매를 막기 위하여 산중에 있는 사택단지에 시내버스 노선을 개설하려는 것도 방해했다."

 

 

▲  탄광촌 사택을 재현해 놓았다.    © 이명수 기자

 

 

# 일은 시키는 대로 돈은 주는 대로 받고

 

탄광촌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신아일보>는 1980년 5월 3일자 기사에서 “해발 800미터의 지장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사북광업소 광부사택은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방지대다. 160동의 연립주택에 760가구 3,000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산비탈에 옹기종기 서있는 연립식 주택은 10년 전에 건립한 것으로 무척 낡아 있어 2.5km 떨어진 시가지로 나가는 길은 경사 40도의 비탈길로 차량통행마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슬래브 단층인 연립식 주택 1동에 5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한 가구가 방 2개 부엌 1개(8평)로 구조가 똑 같으나 수리를 하지 않아 벽과 천장이 허물어져 물이 새고 수도도 설치되어 있으나 겨울철이면 물이 나오지 않아 개울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목욕탕은 1개로 그나마 여자용은 없어 주부들이 시가지까지 나가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진실화해위는 “특히 동원탄좌의 경우 임금인상 시기가 도래하면 임금인상의 기준이 되는 3개월 전부터 임금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임금인상분을 상쇄하여 결국 임금인상 효과를 실질적으로 낮추는 편법을 사용하였다”고 지적했다.

 

그 사례로 “(주)동원탄좌 사북광업소 후산부로 근무했던 윤0철의 노임지불명세서를 보면 기본금은 임금인상 시기인 3~4월을 기준으로 이전 3개월 동안 점차적으로 감소되어 결국 3월의 실질 임금인상 효과는 전년 11월 대비 5~11% 내외에 그쳤다”고 설명했다.   

 

사북사건 발생 직전 1980년 3월 14일 계엄사령관의 자문을 위하여 구성된 계엄위원회 19차 회의에서 당시 내무부 차관 서정화는 “광산의 경우 광부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하다. 주택 및 급수시설을 포함한 생활 여건도 나쁘거니와 광부의 임금으로는 자녀교육이나 생활이 불가능한 실정인데다 요즈음은 체불 노임 때문에 이들의 생활고는 가중되고 있다”면서 “광산에서는 이러한 광부들의 입을 막기 위해 ‘덕배’라는 폭력조직 까지 동원하고 있다. 원성이 집단화 되지는 않고 있지만 체념적인 이들의 원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보고했다.

 

진실화해위는 “1979년 4월 3일 동원탄좌 노조지부장 선거에서 발단되어 1년여 동안 지속된 동원탄좌 노조의 파행사태는 사북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면서 “노조의 파행사태는 이원갑과 이재기의 동원탄좌 노조지부장 선거를 둘러싼 노조 세력 간 내부갈등 이른바 노노갈등으로 표면화 되었으나 당시 어용노조에 대한 회사 측의 배후 조종과 노조지배 당시 주요 국가기관들의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 개입 행사가 사태의 악화에 기여하였다”고 분석했다.

 

 

▲1980년 4월 22일 사북사태 사건 현장      사진 제공 =사북민주화항쟁동지회

 

 

사북 민주화 항쟁 동지회 이원갑 회장(80)은 사태발생전 탄광촌의 문제점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광부들은 ‘배우지 못한 사람’ '돈이 없는 사람‘ ’의탁할 것이 없는 사람‘등으로 이루어졌다. 무전 무식 무탁이다. 한마디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다 보니 회사에서는 인간 취급을 안했다. 인권유린이나 임금착취가 있어도 말하지도 못했다. 근로기준법 규정은 있었지만 광부들에게는 마지막 직업이다 보니 어디로 가든 광부밖에 할 것이 없었다. 전국 탄광 거의 대동소이한 환경이었다.

 

사택은 베니다 합판 양쪽에 스치로풀 중간에 댄 것이 벽이어서 추웠다. 겨울이면 고산지대이다 보니 특히 추웠는데 어쩔 수 없이 방에다가 연탄난로를 설치 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로인해 연탄가스 중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70년도에는 월급을 쌀로 받았다가 하반기에 들어서 현금으로 받기 시작했다. 쌀 장수도 회사 사장 친인척이었다. 하질미 팔고서는 값은 같은 가격을 받았다.

 

소비조합은 사북에는 현재 카지노가 있는 지장산 사택과 새마을 사택 두 군데에 2~30평 규모였다. 요즘말로 마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진 돈이 없으니 이곳에서 인감증을 제시하고 가져온 후 월급날이면 공제했다. 가격이 30%이상 비쌌다.

 

안전장구 시설 장비 등을 지급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회사 측은 안전시설은 도외시하고 탄을 캐는 데만 집착했다. 그 당시 70년대 에너지 파동이 나면서 정부는 ‘석탄 증산 보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탄만 캐면 기업주가 어떤 사고를 내도 모든 책임을 광부들에게만 떠 넘겼다.

 

불평불만을 하면 그날로 해고당했다. 고정된 직장이 아니고 매일 작업배치를 받는데 그날 안 해주면 그걸로 해고 된 것이었다. 노동청에서 구제신청을 받아줘도 회사에서 절대 안받아줬다. 벌금 물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버릇을 고치려고 그러는 것이었다. 광부들이 구제신청을 하는 것은 원직에 복귀하기 위한 것이지 회사에 벌금 물리려고 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시키는 대로 일만 하라는 거였다. 오죽했으면 광부를 하려면 눈감고 입 막고 귀를 막아야 할 수 있다고까지 했다. 일은 시키는 대로 하고 돈은 주는 대로 받으라는 거였다.

 

▲ 태백 석탄박물관에 채탄 현장을 복원해 놓은 모형      © 이명수 기자

 

 

동원탄좌에는 ‘암행독찰’이라는 게 있었다. 사장 친인척으로 5명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이들의 하는 일은 광부들 염탐하는 것이었다. 24시간 내내 사택촌을 돌아다니거나 사람들 얘기 나누는 것을 엿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들은 내용을 총무과에 보고를 하니 회사에서는 간밤에 부부싸움을 한 것 까지도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

 

징계를 내리면 주로 감봉 30%를 처분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광부들은 도급제였기 때문이다. 한통 캐면 한통 값을 열통 캐면 열통 값을 받는 게 도급제인데 징계를 내린다고 그 돈을 삭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광부들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처우가 바닥에 떨어 진 것은 노동조합이 회사 측이 시키는 대로 하는 어용노조였기 때문이었다. 지부장 선거는 간선제였는데 대의원 선거는 지부장 선출 1주일 전에 이루어졌다. 대의원으로 당선이 됐다고 하면 총무과에서 곧 바로 버스에 싣고 강릉이나 속초 등의 관광지로 간다. 거기서 돈을 주면서 회유도 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선거 날이면 투표장 앞에 버스를 세웠다.

 

누가 지부장 선거에 나와도 안 되는 구조였다. 지부장은 회사말만 잘 들으면 계속할 수 있었다. 선거가 아닌 회사가 지명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지부장이 되면 각종 혜택을 보기 때문에 노조원인 광부는 눈앞에 없고 회사말만 들으면 되니까 철저한 어용노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광부들은 이런 문제에 불만이 쌓이고 쌓여 있었다. 1980년 4월 광부들은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낳겠다면서 한꺼번에 들고 일어난 거였다. 당시 광부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지부장 선거 문제’, ‘임금인상 문제’, ‘처우개선 문제’등이었다. 사람들은 나보고 주동자라고 하는데 아니다. 4천여 명의 광부 전부는 물론이고 그 부인들이 바로 주동자다. 자발적인 참여로 사북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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