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두 사람의 죽음으로 우리사회가 시끌시끌합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백선엽 장군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두 사람에 대한 각자의 평가는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심지어는 박원순 시장에 대한 서울시장을 두고는 부부싸움으로 크게 다퉜다는 뉴스까지 나오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백선엽 장군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입니다.
정의당 김종철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백선엽씨는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이 조선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세운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한 장본인”이라고 현충원 안장에 반대했습니다.
이와 반해 같은 날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백 장군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초석을 다졌던 진정한 국군의 아버지”라며 “백 장군을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모시지 못한다면, 이게 나라인가”라고 반발했습니다.
젊은날 일제 부역보다는 생명 구한 백야사 공훈 살펴봐야
먼저 박원순 시장이 자신의 비서에게 그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가 지난 세월 우리사회에 끼친 공은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황망한 죽음에 슬퍼하는 시민들에게 추모의 시간을 주는 서울시장에 대해 문제제기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갖는 이에 대한 존중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추모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그의 현충원 안장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이 또한 나와 다른 생각을 갖는 이에 대한 존중은 아닐 것으로 봅니다.
특히 그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몫으로 남겨 놓는 게 옳다고 저는 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일생을 평가할 때 젊은 날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연군 토벌에 나섰다는 친일 행적보다는 그가 1951년 해방전쟁 시기 지리산 일대에서 구한 수만의 생명의 무게가 훨씬 크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백선엽의 일생을 살펴볼 때 저는 1951년 11월 말부터 1952년 3월까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쥐잡기 작전’을 주목합니다.
백선엽은 소장 계급으로 이 시기 백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이하 백야사)를 설치하고 지휘를 맡았습니다. 백야사는 기존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을 맡던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와 각급 경찰부대 병력에다 새로 최전방에 있던 국군 수도사단과 제8사단으로 구성된 부대입니다.
백야사의 1차 작전은 1951년 11월 말 전남 일원에 계엄을 선포한 뒤 12월 2일 아침 6시에 개시돼 12월14일까지 진행됐습니다. 이 기간 백야사는 전과로 사살 940명, 생포 1600명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어 2·3·4차 작전이 연이어 전개된 후 1952년 3월14일 모든 작전이 완료됐습니다.
당시 전과에 대해 기록은 조금 씩 차이가 납니다. 전사편찬위원회가 1988년 발간한 <대비정규전사>에는 사살 7737명, 생포 7993명, 귀순 506명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는 4차 작전은 제외된 기록입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10년 조사보고서를 통해 사살 6606명, 포로 7115명으로 집계했습니다.
이런 공식 통계는 최소치라는 것입니다. 실제 백선엽도 회고에서 “실제 사살 및 포로는 추정 숫자를 훨씬 상회했다. 이는 공비들의 세력이 강력했고, 공비들에 포섭된 비무장 입산자도 많았음을 반증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투항하거나 생포된 입산자들은 광주포로수용소와 남원포로수용소에서 분류 작업을 거쳐 광주법원재판에 회부되면서 처벌을 받았습니다.
저는 십 수 년 전 지리산 입산자 출신의 한 선생으로부터 당시 상황을 청취한바 있습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되면서 우익의 학살을 피해 모여들기 시작해 지리산 일대에는 1950년 11월 경 5만 명을 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백야사의 작전이 시작됐던 1951년 초겨울 무렵 지리산과 백운산 등 야산자들의 숫자는 못돼도 3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와 함께 백야사 작전이 끝난 후 지리산 야산대는 사실상 와해되면서 1952년경에는 수천명도 안되고 제2 해방전선이 아닌 생존권을 위한 보급투쟁에만 매달렸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증언이 맞는다면 백야사의 작전으로 최소 3만 명 이상의 야산자들 가운데 사망자를 1만 명으로 셈한다고 해도 세명중 두명은 목숨을 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 이 시기 선무공작을 우선했던 백야사의 방침으로 최연소 빨치산이라고 했던 조선대 박현채 전 교수나 소설 남부군의 이태 선생 등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내전초기 수만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들을 사전 예비적으로 학살했던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 되는 부분입니다.
즉 내전초기 학살과 1년 6개월여의 치열한 내전으로 증오심이 극대화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1년 6개월여 후 펼쳐진 백야사의 동계작전은 사살이 우선이 아닌 생포와 귀순을 우선하는 선무공작에 치중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백선엽이 젊은 날 일제하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항일연군을 향해 총을 겨눴다는 ‘과’와는 비교를 할 수 없는 크나큰 ‘공’입니다. 2만 명이 넘는 목숨 값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입니다.
증언은 또 있습니다. 1985년 당시 의경으로 정보3계에 근무하면서 부천 범박동에 거주하던 빨치산 출신 보호관찰 대상자를 몇 차례 만난 적 있습니다.
일제 때 머슴 출신으로 ‘멧돼지’라는 별명을 가지신 분이었는데 그는 군경을 몇 사람 죽였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백야사 작전 당시 생포된 후 남원수용소에서 분류 작업을 거친 후 10년 정도의 처벌을 받은 후 우리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백선엽 때문에 살아 날 수 있었다고 평가한 말을 들은 기억이 새롭습니다.
백선엽의 회고록을 보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백선엽은 이렇게 회고 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위로 두 아들이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셋째 아들마저 입산한 뒤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며느리들과 손녀를 모두 데리고 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산속에 들어왔다고 했다."
상상을 해보면 이 노인분 양반 지주계층으로 세 아들 모두를 일본 유학등 배울 만큼 배우게 했을것 같습니다.
그러니 세 아들 해방공간에서 사상투쟁을 하다가 학살을 피해 세 사람 모두 입산했구요. 그런데 위로 두 아들이 죽고 마지막 남은 셋째 아들마저 산에서 폐병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있던 며느리 3명과 딸을 데리고 입산할 때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거기에 더해 환자트가 발각된 후 이동하면서 셋째 아들을 죽여달라는게 결국 자신 손으로 마지막 남은 셋째 아들을 묻어주고 싶었다는 백선엽의 회고에 너무나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박원순 시장과 백인엽 장군에 대한 죽음에 대해 지금은 추모와 애도의 시간입니다. 각자의 평가를 존중해 줘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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