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타고 신의주 찍고 자갈치까지-4

[조영삼 연재수기] 한창우-최상근-이인모, 운명적인 만남

조영삼 | 기사입력 2011/02/22 [05:22]

기차 타고 신의주 찍고 자갈치까지-4

[조영삼 연재수기] 한창우-최상근-이인모, 운명적인 만남

조영삼 | 입력 : 2011/02/22 [05:22]
어머니가 계시는 부산 집으로 내려온 지 며칠 후, 앞으로의 일도 구상할 겸 마음을 새롭게 다잡기 위해 광안리로 갯바람을 쐬러 갔다. 갯 내음 물씬 서려 있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바바리 깃을 저미고 있는 삼십 초반의 사내, 무언가 심각한 고민이 있는 듯, 한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고드름처럼 한 곳에 붙박힌 채 움직일 줄을 모른다.

이젠 무엇을 해야 하나. 부모님은 아르헨티나로 가라고 한다. 형님이 터를 잡고 있는 아르헨티나. 지구의 끝 동네. 더 이상 갈래야 갈 수 없는 땅 끝으로 간다? 명목이야 형님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라지만 과연 내가 부모님이 바라시는 방향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조국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땅에서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한 채, 형님의 사업을 돕다가 적당히 결혼을 하여 토끼 같은 자식 낳아 가정의 안락한 울타리에 안주한다? 그 다음엔?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내나라 내 땅에서 멀리 떨어진 땅, 지구의 땅 끝 동네에서... 이제는 정말 내나라 내 땅에서 내가 할 일은 없는 것인가? 오늘 안으로 결정을 해야 한다. 부모님에게 그렇게 이야기 하고 나왔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더 이상 연로하신 부모님의 간절한 애원을 거절할 명분도 없는 것이 아닌가. 오랜 세월 애물단지로 겉돌기만 했던 자식. 말이 없고 착실하기만 했던 자식이 잘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를 도중에서 그만 둘 줄은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주변의 만류를 거부하면서 객지에서 노동현장을 떠돌 줄은 더욱 예견하지 못했으리라. 군대에 다녀와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자,

’이젠 이 놈이 마음을 잡고 사람 구실을 하는구나’하고 한 숨을 돌리셨을 어머니, 그렁그렁한 어머니의 눈물을 어찌할 것인가. 그래, 가자! 아르헨티나로. 어디에서 뿌리를 박고 살던 내 땅을 사랑하는 마음만 버리지 않는다면, 그 곳에서도 뭔가 할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가는 것이다.
 
까짓 것, 못 갈 것이 무에 있겠는가.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나자 엉킨 실타래 같았던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 졌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서울에서 전화가 왔었단다. 구요비 신부님에게서 온 전화였다. 즉시 연락을 취해 보았다. 전씨 아저씨 문제가 잘 해결 되어서 좋은 소식을 알려 주려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나는 구요비 신부님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뵙지 못하고 서울을 떠난 것도 양해를 구했다. 서울에 두고 온 마음에 걸렸던 문제들 중에 그래도 한 가지 문제가 해결 되었다니 마음의 짐이 약간은 가벼운 채로 조국을 뜰 수 있어서 기쁘기 한량 없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전씨 아저씨 부디 행복하십시오.’ 한 인간에 대한 삶의 궤적이라는 것은 사소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단순사건으로 인해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서 그 단순한 사건이 결국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내가 아르헨티나 행을 결정하자 부모님은 뛸 듯이 기뻐하셨다. 이젠 한시름 놓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아르헨티나에서 형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하셨다.
 
어쨌든 나는 형님에게도 연락을 하고 아르헨티나의 조카들에게 줄 선물 등을 준비하면서 형님의 초청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어느 날, 나는 부산 서면에 위치한 동보서적에서 오랜만에 『말』지를 샀다. 그런데 거의 반 년 만에 사 보는 『말』지가 나의 운명의 궤적을 바꿔 놓을 줄이야.

『말』지가 운명을 바꾸어 놓을 줄이야

집에 와서 『말』지를 훑어 보기 시작했다. 당시에 정치적 쟁점으로 현안이 되어 있는 주요한 기사부터 읽어 내려 갔다. 그런데 처음에는 제목 부터가 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제껴 놓았던 어느 기사를 눈요기 감으로 생각하며 가볍게 읽어 내려갔다. 
 
아마도 신준영 기자가 쓴 ’아름다운 상술, 최상근’이라는 제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대수롭지 않게 나열된 글자를 따라 단순한 눈 운동을 시작했으나, 중간을 채 읽기도 전에 몸이 야릇한 흥분으로 들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사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기사의 주인공인 최상근씨는 그다지 건전하지 않은 사업으로 상당한 경제적 부(富)를 쌓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솔직한 사람이다. 그의 이력을 살펴 보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월급쟁이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의 여러 곳에 전자오락실을 운영하면서 코흘리개 아이들의 손 때 묻은 돈을 긁어 모았다. 전자오락실은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많고 아이들 교육에도 지장을 초래한다. 그래서 나는 돈을 벌면서도 언제나 떳떳하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 이러한 나의 고민을 아내와 상의를 한 후에 나는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고 결심하고 보람된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비전향장기수들이 출소 후에도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분들을 위해 모은 재산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일차로 경남 진영에서 청둥오리농장을 어렵게 시작한 장기수 한창우 선생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나는 살아가는 보람을 느낀다. 그 분들은 분단의 희생양들이다. 당연히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나는 나에게 불이익이 오더라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할 각오이다.“

그 기사를 읽고 난 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짜릿한 전율과 함께 드디어 이 땅에서 내가 할 일을 찾았다는 희열을 맛 보았다. 나는 대학시절 『태백산맥』을 커다란 충격과 감동 속에 밤을 새워 읽었고, 제주의 4.3항쟁과 여순 봉기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었다.
 
그리고 사촌형님이 운명하는 무역회사를 그만둔 직후에 4.3민중봉기의 현장인 한라산에서 상당기간 기거를 하면서 4.3민중항쟁에서 살아남은 분들에게서 생생한 체험담을 듣기도 했었다.

그러한 경험이 있는 나는 기사의 주인공이 현재 내가 있는 부산에 산다는 것을 알고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이내 무시해 버리고 최상근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내가 망설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부모님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결국 부모님의 바램을 또 거스르는 것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불효를 하게 되리라는 것 때문에 망설이기는 했지만, 때가 되면 이해하시리라 생각하고 최상근씨를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말』지 부산지사에 연락을 해서 최상근씨의 거주지를 알아 내었다. 부산역 앞 초량의 초원다방에서 우리는 첫 대면을 했다. 우리는 자기 소개를 하고 서로의 포부를 이야기 했다.
 
밤 늦도록 이어진 대화 속에서 우리는 의기투합이 되었으며 장기수 선생들을 위해서 보람 있는 일을 함께 해 보자고 굳게 약속을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르헨티나 행을 포기하고 최상근씨의 소개로 경남 진영의 청둥오리농장과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장기수 한창우 선생과의 만남

며칠 후, 최상근씨와 청둥오리농장의 한창우 선생이 전화로 일러준 대로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김해군 진영읍내에서 또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오지의 농장을 찾아갔다. 농장은 마을과도 뚝 떨어진 산자락에 소록도의 ’문둥이 촌’ 처럼 외로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만 100미터 아래 쯤에 역시 마을과 떨어져 쓸쓸하고 적막해 보이는 농가 한 채가 있을 뿐이었다.

사람 그리워하는 빛이 역력한 장기수 한창우 선생이 생면부지의 나를 무척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한창우 선생은 섬진강 하구의 하동이 고향이다. 조영남이 부른 노래, ’화개장터’로 유명한 곳이다. 다리 하나를 건너면 민족사에 없어도 될 위인들이 ’반역의 땅’이라고 낙인 찍어왔던 전라도 땅이다.
 
사대봉건 지배층의 압제와 음흉한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다가오는 외세에 온 몸으로 저항하다가 한 줌 핏빛 흙으로 산화해 간, 수 많은 농투산이들의 고장, 치열했던 우금치 마루의 고장인 전라도가 한 손에 잡히는 화개장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창우 선생은 지리산에서 빨치산 전사로 활동하다가 20년 세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만나서 반갑소. 보시다시피 아직은 농장이 어수선하고 주변 정리도 잘 안되어 있소. 내가 밤낮없이 바둥거려 보지만 이젠 나도 늙고 잔 병들이 몸 구석구석을 압박해 와서 농장을 혼자서 이끌어 가기에는 너무 벅차다오. 최선생에게서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들었소. 그런데 육체노동을 별로 안 해 보았을 젊은이가 힘든 농장 일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지...
 
그냥 공기 맑은 곳에 휴가 왔다 생각하고 며칠 푹 쉬었다 가소. 나야 젊은이와 함께 일하면 더 없이 위안이 되고 든든하겠지만, 그리고 여기는 보통사람들은 접근하기를 꺼리는 곳이기도 해요. 왜냐 하면 공안당국의 감시대상 지역이기도 해서지요. 괜히 우리하고 함께 생활하다가는 공안당국에 찍혀 젊은이의 창창한 앞날을 망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라서...“

“그런 일은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그만한 각오쯤은 얼마든지 되어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이 나라가 서구식이든 미국식이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임에는 틀림 없으니까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기본권을 탄압한다면 분연히 맞서서 쟁취를 해야지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이러한 것들이 몇몇 기득권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니까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 기득권자들이 하면 로맨스요, 나같은 사람들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이분법적 발상은 응당 깨뜨려야지요. 제 장래를 염려해 주시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부당한 것과 맞서 나가는 것, 그리고 보람된 일에 정력을 쏟는 일도 다 제 장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락하고 편한 생활의 추구만이 꼭 바람직한 장래는 아닐 것입니다.“

나는 즉시 농장 주변을 돌아보았다. 건물이라야 한창우 선생이 손수 지었다는 군대의 콘세트 막사를 연상케 하는 아치형 구조물 한 채가 전부였다. 이 또한 정식 허가를 받지 않은 무허가였다. 몇 번 관청에 가서 허가를 받으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자꾸 꼬투리만 잡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식수는 농장 아래에 위치해 있는 외딴 농가에서 소형 모터펌프로 끌어 쓰고 있었다. 청둥오리는 약 천이백 마리 쯤 된다고 했다. 오리들은 그물망으로 울타리를 친 건물 뒤 편의 공터에서 사육되고 있었다.

개체 수에 비해 넓다고 할 수 없는 사육장 바닥은 오리들의 오물들이 십 센티 이상 쌓인 채 썩어가고 있었다.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오리들이 마구 배설하는 것을 제때에 치우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연로한 노인의 노동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변 정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외바퀴 수레를 이용해 바닥에 깔린 배설물들을 한창우 선생의 조언을 받아가며 걷어내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두텁게 쌓인 배설물 층을 제거하는 작업은 군대 시절에 해 보았던 떼 뜨는 작업과 흡사했다. 산야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자연 잔디를 군화발로 삽을 힘껏 눌러 사각형의 적당한 크기로 떼어낸 다음 진지 구축용 자재로 사용하는 떼 작업.
 
다른 것이 있다면 군대의 떼 작업은 상큼한 풀 내음 속에서 했다면, 오리 배설물 제거 작업은 화학반응으로 인해 생성된 메탄가스를 마시며 해야 하는 것이었다. 폐쇄된 공간이었다면 질식사 하기에 딱 알맞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우리는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가며 배설물을 제거했다.

한창우 선생도 그 동안 혼자 일할 때는 지겹고 힘들었는데 농담도 하며 웃으면서 일을 하니까 휠씬 힘도 덜 들고 신바람이 난다고 했다. 우리는 일을 마치고 그늘에 앉아 지하에서 끌어올린, 온 몸에 소름이 오싹할 정도로 시원한 천연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마도 요즘 한창 인기가 좋다는 자연 육각수가 아닐까? 깊은 지하에서 바로 끌어올린 물은 육각수가 아니라고 하더라만, 그러거나 말거나 기분이 상쾌해 지고 피로를 말끔히 가시게 하는 물이라면 육각수든 오각수든 상관이 있겠는가?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형제가 지척에 있는 나라에서 배부른 소리는 작작들 하시라.

한창우 선생과 나는 그 다음 작업으로 농장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을 제거했다. 대충 그렇게 일을 마치고 나니 농장이 한결 산뜻해 졌다. 청둥오리는 원래 깨끗한 곳을 좋아하는 동물이다. 환경이 청결하지 못하면 질병에 쉽게 노출되는 것은 상식이고 산란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게 된다.
 
오리 과에 속하는 동물들이 질병에는 어떤 동물들 보다 강하기는 하다. 그러나 건강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듯이 사람이건 동물이건 건강한 생활을 지속하려면 주변 청결이 기본 아니겠는가. 한창우 선생도 숱한 경험을 겪은 분인지라 나보다 훨씬 세상사에 밝았지만 노동력 부족으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한창우 선생은 부산 영도에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출소 후 한참 늦은 나이에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1남 2녀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부인과는 20년 가까이 연령차가 있었으며 자녀들도 큰 아이가 이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막내 딸이 초등학교 6학년, 손녀 같은 막내 딸을 불면 날아갈 새라, 애지중지 하는 한창우 선생이었다. 왜 그러하지 않겠는가. 오십 줄에 낳은 빨치산의 딸인것을.



농장 터 임자 김상원씨

내가 청둥오리 농장에서 구슬 땀을 흘리고 있을 때 오십 대 초반쯤 되 보이는 초로의 사나이가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꾸불꾸불한 산 길을 털레털레 올라오고 있었다. 아래의 외딴 집 주인이요, 농장 터의 임자인 김상원씨였다. 원래 농장이 자리하고 있는 야산은 김상원씨 가계의 공동 소유로서 종손인 김상원씨가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한창우 선생의 딱한 사정을 듣고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한창우 선생으로부터 듣고 ’요즘 세상에 참 보기 드문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상원씨와 그 때 처음으로 대면을 하고 정식 인사를 했다. 그런데 김상원씨의 손에 4홉들이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혼자 마시기가 무료해서 한창우 선생과 한 잔 하려고 올라왔는데 ’마침 잘 되었다’고 하면서 같이 한 잔 하자고 했다.
 
나는 사실 당시만 해도 술을 거의 못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체질이었다. 그런데 김상원씨는 낯이건 밤이건 가리지 않은 두주불사 형 이란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빨간 핏줄들이 거미줄처럼 선명하게 두드러져 있고 코 끝도 불그스름했다.
 
김상원씨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쉴 새 없이 말을 뱉아 놓았다. 남이 듣거나 말거나. 그는 평소에도 상당히 다변이지만, 술이 온 몸에 적당히 퍼지면 쉴 사이가 없이 뱉아내는 성격이란다. 그가 뱉아놓은 말의 성찬 중에 자신의 이력도 이야기 했는데, 그가 나에게 털어 놓았던 이력은 이렇다.

한 때는 합동통신 기자로도 일했으며 야당으로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하다 국회의원에도 출마를 해 보았지만 떨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정치에 염증을 느껴 고향에 돌아와 단감농장 과수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원래 태어난 곳은 경북 상주지만 어렸을 때 문중의 종가 댁인 큰아버지 집에 양자로 입적이 되었다고 했다.
 
문중의 땅도 한림학사로 있던 조상이 광해군으로부터 하사를 받았는데, 김해의 한림 면 이라는 지명도 조상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참 가문 자랑을 늘어 놓았다. 그 후 김상원씨와 상당기간 지척에서 생활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만 했던 이야기 이기도 하다.

김상원씨에 대한 첫 인상은 허풍은 좀 있지만, ’오랜 백수 특유의 호인기질도 있는 양반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김상원씨가 술이 거나해서 어두운 밤 길을 비틀거리며 돌아가고 난 후, 한 선생이 말하기를, 김상원씨의 부인은 읍내 진영초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지금까지 그렇다 할 직업이 없었던 김상원씨의 뒷바라지를 해 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착한 분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그 후 한 울타리에서 살면서 자연히 검증이 되었다. 참으로 김상원씨 부인은 소박하고 착한 분이었다. 가끔 나는 김상원씨가 부인 하나는 잘 얻었다는 생각에 부럽기까지 했다. 그의 대외적 신임도에 있어서 부인의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었다.

청둥오리 공부

그리고 현재 김상원씨 집에는 비전향장기수 한 분이 얹혀 살고 있는데, 지금 고질병이 악화되어서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이인모 선생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한창우 선생을 통해서 이인모 선생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분의 비극적인 말년 인생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나는 부산 집에 다녀오는 길에 한 번 문병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분을 모시고 있는 김상원씨가 정치인 출신 답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김상원씨 집안 일도 힘이 닿는 한 도와주어야 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며칠 후, 나는 농장을 일대 혁신하기로 하고 우선적으로 오리털을 자동적으로 뽑는 기계를 장만하기로 했다. 그 동안 오리털은 오리를 통째로 적당한 온도에 잠시 담근 다음 손으로 하나하나 뽑아 왔었는데, 직접 해 보니 이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오리는 닭하고는 또 달라서 온도를 아무리 잘 맞추어도 잔 털 제거는 잘 되지 않았다.
 
무수한 잔 털들을 손으로 하나씩 뽑자니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건 장정들이 할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오리털을 뽑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한다면 훨씬 생산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오리 한 마리의 털을 제거하는데 몇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것처럼 소모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당장 특수기계 제작소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전문 제조업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청둥오리고기는 수요도 적고, 따라서 오리털을 뽑는 기계를 전문적으로 제작해서 밥벌이를 하기에는 적합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닭 털 뽑는 기계를 제작하는 업소를 찾았다. 그래서 업자에게 오리털의 특성을 설명해 주고 특별 제작해 줄 것을 당부했다.
 
당연히 제작비도 닭 털 뽑는 기계에 비해서 월등 비쌌지만 감내하기로 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일일이 수작업을 하는 것 보다 경제적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다행히 통장에는 그 동안 모아둔 돈이 꽤 적립되어 있었다.

어렵사리 자동 오리털 뽑는 기계를 마련해서 시운전을 해 보니 아주 세세한 잔 털은 완벽하게 처리되지 않았지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단축되었다. 그 다음에 착수한 것이 광고 전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한창우 선생의 그 동안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해서 옛 문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의방유취』, 『본초강목』, 『동의보감』, 그리고 서양의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등에서 청둥오리 제원에 관한 내용을 추려 정리해 나갔다. 여기서 잠깐 동서 문헌에 나오는 청둥오리 제원을 대략 정리해 보자.

먼저 청둥오리의 기름은 불포화지방산으로 다른 육류의 기름에 비해 체내에 거의 축적이 되지 않는다. 고기는 이뇨 해독작용과 독성분 제거 작용을 하며, 담배의 니코틴을 순화시키는 작용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의학적으로 규명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경험과 실험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증명이 가능하기는 하다.
 
예를 들어, 청둥오리는 다른 가축에 비해 월등히 질병에 강하고 독성분에 강하다는 것이다. 나는 문헌에 기록된 것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나를 직접 실험해 보았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장소에서 아무도 몰래 한가지 실험을 해 보았는데, 청둥오리와 닭, 그리고 집토끼에게 같은 분량의 청산가루가 섞인 먹이를 주어 보았다.
 
많이 잔인하기도 해서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눈 딱 감고 실행을 한 것이었다. 잔인한 장면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 한 선생도 모르게 몰래 감행을 했던 것이다. 실험의 결과는 같은 양의 극약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끼와 닭은 한 동안 바둥거리다 죽어버린 반면에 청둥오리는 괴로움을 참지 못해 퍼덕거리기는 했지만, 서서히 원상회복이 되어갔다.
 
놀라운 해독작용이었다. 자연생태계가 스스로의 자정능력이 있듯이 청둥오리도 어느 정도의 독은 해독시킬 수 있는 체내 공장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여기서 독자들의 오해가 있을 것 같아 사족을 단다면, 식용으로 사육하는 청둥오리는 순수한 야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야생청둥오리는 식용으로 대량 사육할 수 없는 것이 국제 관례이며, 따라서 식용으로 사육되는 청둥오리는 야생과 집오리의 교배종인 것이다.
 
청둥오리들이 들으면 자존심 상할 용어로는 잡종이요, 좀 더 근사한 단어를 사용하자면 우생학적, 유전공학적으로는 개량종인 진일보(?)한 개체인 것이다. 맛은 야생 청둥오리의 담백함을 살리되 육질이 부드럽고 덩치가 크며 2세 출산 능력이 야생보다 월등하다는 것이다.
 
한가지 퇴화한 것이 있다면 날개는 있으되 닭 날개 정도의 기능밖에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식용으로 개량한 ’이기심 많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날 수 없다는 것이 천만 다행임에는 틀림 없다. 기껏 공들여 키워 놓았는데, 늦가을 어느 날 ’주인님, 안녕!’ 하고 시베리아로 훌쩍 떠나버린다면, 공든 탑이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져 버릴 테니까.

장기수 이인모 선생과의 운명적 만남

며칠 후 나는 부산 집에 다녀오는 길에 부산대학병원에 들렀다. 예정했던 이인모 선생의 병문안을 하기 위함이었다. 운명적인 만남, 우리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그 인연의 끈이 억겁의 세월 동안 가느다랗게 이어지다가 바야흐로 20세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반도 남단의 대학병원에서 씨줄, 날줄로 다시 만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의 파란과 곡절을 예고하는 전주곡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만남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할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서구의 어느 시인은 인생의 길을 숲 속에 난 두 갈래 길에 비유했다. 한 길은 많은 사람들이 숱하게 오고 갔던 평탄하고 잘 닦여진 길이요, 또 한 길은 아무도 가 보지 않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잡초 무성한 미지의 길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숲길을 걷다가 두 갈래 갈림길에 맞닥뜨렸을 때, 주저없이 잡초 무성한, 이름뿐인 길 보다는 뺀질뺀질하게 잘 닦여진 길을 택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이다.
 
그 길은 적당한 곳에 안내판도 있고, 다리가 아프면 쉬어갈 수 있는 쉼 터도 있게 마련이다. 또한 위험한 곳에 대한 경고 안내도 해 준다. 그러나 잡초 무성한 길은 한 번도 사람의 발 길이 없었던 길이거나 누군가가 용감하게 갔었다 하더라도 도중에서 낭떠러지에 떨어져 버렸거나 짐승의 밥이 되어 버린 길일 것이다.

그 날 대학병원에 가는 길에 내가 탄 버스가 덤프트럭과 충돌하여 몇 사람의 사상자가 난 것은 내가 택한 ’숲 속에 난 미지의 길’이 파란의 길임을 예고하는 전초였는지도 모르겠다.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서둘러 병원이 있는 대신동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유수의 대학 병원답게 환자들로 북적거렸다. 다리와 얼굴에 미이라처럼 붕대를 동여맨 사람, 금방 사고를 당한 듯 심연의 지옥에서나 들 수 있겠다 싶은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 화사한 꽃들이 만발해 있는 정원을 목발에 의지하여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 완쾌가 되어 퇴원하는 중인지 환자 옷을 입은 사람들과 석별의 악수를 나누고 있는 사람, 세상의 온갖 환자들은 다 모인 듯한 대학병원 이었다.
 
다리가 잘린 이도, 팔이 없는 이도, 처음부터 장애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이 불구자가 되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커다란 착각 속에 살아간다.

’장애는 나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딴 나라 사람들의 문제다. 우리 마을에는 장애인 학교를 세워서는 안 된다. 애들 교육에도 안 좋고, 집 값도 떨어지니까...’

착각은 자유다. 그러나 때론 질펀하고, 때론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힘차게 걷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예비 장애인’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미리 하시라! 내가 장애인이 되고 난 후에, 나의 자식이 불구로 태어났을 때, ’아! 내가 그때 왜 병신들을 경멸했던가.’ 후회한들 이미 때는 늦으리.

옛날에 성량이 풍부한 장래가 촉망되는 가수가 있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의 노스텔지어를 노래해서 황량한 도시인들의 가슴에 심금을 울렸던 가수가 있었다. 어느 추운 대학입시날 아침에 그는 성량 풍부한 목소리로 출근 길을 서두르는, 쫓기는 사람들에게 포근함을 선사해 주었다.
 
그런데 수험생을 아들, 딸로 둔 일부 극성맞은 아낙들이 방송국에 빗발치는 항의전화를 해 대었다. ’오늘이 우리 집 기둥이 시험 보는 날인데, 우리 집 고명딸이 시집 잘 가기 위해서 명문대학 시험치는 성스런 날인데, 재수 옴 붙으라고 하필이면 그런 사람의 노래를 틀어 놓느냐’고. 그 장래 촉망되는 가수는 타고난 ’병신’인 장님이었던 것이다.
 
그 후 그 가수는 ’어머님! 왜 나를 낳으셨나요’ 라는 절규를 끝으로 피눈물을 흩뿌리며 스스로 가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이름은 이용복이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 질 수 있는 축복의 땅’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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