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타고 신의주 찍고 자갈치까지 -6

장기수 어른들과 민민운동가들의 휴식처...'청둥오리농장'

조영삼 | 기사입력 2011/03/01 [05:58]

기차 타고 신의주 찍고 자갈치까지 -6

장기수 어른들과 민민운동가들의 휴식처...'청둥오리농장'

조영삼 | 입력 : 2011/03/01 [05:58]
한창우 선생은 재주가 많은 분이다. 재주 많은 사람이 박복하다고 했던가. 하찮은 것도 한창우 선생 손을 거치면 쓸만한 물건으로 둔갑을 해 버린다. 농장의 아치형 살림집도 손수 지었단다.
 
부산 영도의 가족이 살고 있는 이층 슬라브 집은 물론이다. 한 선생이 가지고 있는 특기 중에 이채로운 것은 귀에 침을 놓아 온갖 잔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겠다. 이름하야 이침(耳針)이다.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사람의 귀는 인체의 축소판이라는 것이다.

즉, ’허리에 해당하는 귀의 부분은 어디이고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은 귀의 어디이다’ 하는 식으로 인체의 모든 부위는 다 귀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로 병이 난 인체부위에 해당하는 귀 부분을 엄지와 검지로 지그시 눌러 보면 실제로 무척 통증이 심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허리가 아플 때 아픈 부위에 침을 놓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해당하는 귀에 침을 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침(耳針)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한 가지를 꼽는다면 일반 침이 가지고 있는 위험부담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침을 잘 못 맞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침은 그럴 염려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단다.
 
한창우 선생은 이침을 감옥살이 할 때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농장 생활을 같이 하면서 나는 한창우 선생이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이침으로 치료하는 장면을 많이 목격했다.

그를 찾는 환자들은 가난한 농민, 노동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따라서 한창우 선생은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간혹 고마움의 표시로 환자들이 돈을 지불하기도 하지만, 그 때도 최소한의 실비만 받았다. 정식 침구사 면허가 없기도 하지만 돈벌이를 목적으로 침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한창우 선생의 철학 때문이었다.

청둥오리 농장은 장기수들의 쉼터이기도 했다. 멀리 서울에서부터 전국에 흩어져 어렵게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장기수들이 수시로 농장을 방문하여 며칠씩 묵고 가기도 했다. 농장 주변은 풍광도 수려하거니와 공기 또한 맑고 깨끗했다.
 
온갖 담수어들이 노니는 평화스러운 연못은 자태를 뽐내기라도 하듯, 앞다투어 피어나는 산 꽃, 들 꽃들과 어우러져 그림엽서의 수채화를 연상케 했다. 무엇보다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노약자의 건강회복에 좋다는 청둥오리고기를 실컷 포식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농장에는 식도락가들이 일부러 청둥오리 고기를 맛보기 위해 드물게 찾아온다. 그들에게는 당연히 상당하는 음식 비를 받는다. 일반 식도락가들에게 받는 요금은 전액 한창우 선생 가족의 생활비로 충당된다. 그러나 종종 방문하는 장기수들을 포함, 민민운동가들에게는 공짜였다. 그래서 농장은 항상 적자였다.

그들은 한창우 선생과 나에게는 조국의 민주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인 까닭에 전혀 귀찮은 손님들이 아니었다. 한 선생과 나는 그들이 오면 신바람이 난다. 그래서 서로 뭘 못해 주어서 안달이었다.
 
우리들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귀찮지만 마음이 통하는 이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식사준비는 즐겁기만 했다. 오리를 잡아 털을 뽑은 다음 몇 시간 동안 푹 고아서 내 놓은 오리백숙을 맛있게 먹어주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내가 오리의 목을 따고 했던 것은 아니다. 농장에 가서 얼마 동안은 차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우 선생이 펄펄 살아있는 오리를 잡아 시퍼런 식칼로 단 칼에 목을 ’댕강’해서는 목이 달아난 오리를 공중에 획 던지는 광경은 끔찍했다. 목 없는 오리는 땅에 떨어져서 분수처럼 새빨간 피를 뿜어 내면서도 한참 동안 바둥거렸다.

나는 체질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불쌍해서 못 죽이는 사람이다. 그런데 식칼로 살아있는 오리 목을 내려치는 것은 상상도 못해 보았다. 그것도 직접 키우던 것들 임에랴. 그러나 어찌하랴. 농장 일을 해 나가자면 기본적으로 통과해야 할 관문인 것을. 한창우 선생이 부재중이거나 몸이 아플 때는 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눈 딱 감고 오리의 목을 치던 날, 나는 간사하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았다. 모든 짐승들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부속물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려달라고 꽥꽥거리는 오리의 목을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위안거리로 삼았다.

”오리들아! 나를 원망 마라. 내가 아니라도 너희들은 죽을 목숨들. 민주의 재단에 기꺼이 목을 바친다고 생각해라. 성스러운 민주의 재단에...”

말도 되지 않은 억지 합리화를 시켜가며 처음으로 오리의 목을 친 날, 그날 밤은 목이 없는 오리들이 피를 철철 흘리며 ’내 목 내놔라!’ 하고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

나는 하루 해가 짧을 정도로 바쁜 와중에도 김상원씨네 집안 일도 내 일처럼 도와주었다. 운동가 출신이 아닌 한 때 정치에 몸을 담았던 양반이 오 갈데 없는 장기수 노인을 양로원에서 모셔다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생활한다는 것에 크게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치를 청산하고 남은 여생을 장기수들과 더불어 농사나 지으며 조용히 살겠다는 부분에 와서는 ’이런 정치인도 있구나!’ 할 정도에 이르렀다.

사실 김상원씨는 농촌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자랐다고는 하지만 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어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 그가 오랜 야당 정치인 생활을 청산하고 상당 규모의 단감과수원을 혼자 관리하는 것은 농사에 더욱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벅찬 일이었다. 물론 중요한 시기마다 전문 일손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과수원과 마찬가지로 단감과수원도 잔손질이 많이 가는 농사다. 그 때마다 일일이 비싼 인건비를 주고 일손을 살 수는 없다. 적절한 시기에 농약을 준다든지, 잔 가지를 쳐 준다든지, 파종을 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알맞게 거름을 주는 일, 새순이 돋는 봄이나 수확을 하고 난 후의 과수원은 육체노동이 많이 필요할 때다.

김상원씨는 보고 들은 풍월은 상당히 많은 양반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농사를 지으라 한다면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종종 토박이 농사꾼과 김상원씨 사이에 농사 기법에 대해서 입씨름을 벌이기도 하는데, 이론적으로는 십중팔구 김상원씨가 승리한 듯했다.
 
언제나 목소리 큰 사람이 설전에서는 유리한 법이니까.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쳐 보면 수 십 년간 농사일로 잔뼈가 굵은 진짜 농투성이들이 대부분 옳았다는 것이 입증 되곤 했다.

김상원씨의 부드러운 손, 거친 들녘의 풍상에 시달려 보지 않았음직한 얼굴 등은 농사하고는 거리가 먼 듯 했다. 그의 삽질, 괭이질을 보고 있노라면 서툴기 그지없다. 육체노동은 전혀 안 해본 사람이 부둣가의 하역작업에 나가 다리를 후들거리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김상원씨에게 나는 자주 놀려대었다.

”김 선생님은 잡지 등에 소개될 때 농부라고 해서 상당히 기대를 했었는데 이런 얼치기 농부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 명색이 직업이 농부라고 동네방네 선전하는 양반이 삽질 하나 제대로 못해서야 어디 김 선생님 말마따나 ’국제농부’라고 하겠습니까. ’얼치기 국제농부님’이라고 불러도 이의가 없겠지요?”

”하하하하하하. 자네는 겉보기와는 달리 힘이 장사구마. 앞으로 자주 부리 묵어도 지장이 없겟구마. 하하하하하하.”

”어어? 이래 뵈도 어렸을 땐 골목대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노가다 판에서 잔 뼈가 굵었습니다? 전방에서 군대생활 할 때는 하나님과 동격이라는 고참들도 저를 어려워 했지요.”

6.25 60주년 특별사진전 '경계에서' 전시작품     © 국방부


# 군대시절, 추억의 한 토막

그럼 여기서 독자들을 나의 군대 시절로 잠깐 데려가 보자. 나는 남쪽에서는 대전차 방어벽이라 주장하고 북쪽에서는 영구 분단을 조장하는 콘크리트 장벽이라고 주장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설치 되어 있는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1979년 7월 18일,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온 친구들의 친구들의 환송을 받으며 부산병력으로 입대를 했다. 8주간의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남북분단 최고의 긴장지대, 철책선이었다.

옛날 임꺽정의 활동무대였고, 김신조의 124군 부대가 넘어왔다는 고량포. 철책선 교통호에서 전방을 바라보면 개성의 송악산이 아스라히 보이는 지역이었다. 망원경으로는 인민군의 움직임도 감지가 가능했다. 내가 속한 소대의 명칭은 불사조 소대였다. 첫 날 고참들의 신고식은 중대본부에서 수 킬로 떨어진 소대막사까지 높은 포복, 낮은 포복으로 선착순을 시키는 것이었다.

쫄다구의 깡다구를 키워주고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안전사고에 경각심을 심어준다는 명목이었다. 총을 매고 철모를 쓰고 지급받은 개인용 군수품을 잔뜩 챙겨 넣은 40킬로가 넘는 따블백을 둘러메고, 무릅껍질이 홀라당 벗겨지고, 팔꿈치의 살이 빨갛게 드러나는 것도 별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신병들은 빡빡 기었다. 나라는 인간은 평소에는 그렇지가 않은데 인간한계의 극한 상황까지 도달하면 체념하거나 기가 죽기는 커녕 더욱 오기가 발동하는 특이체질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간적인 정에는 때론 한 없이 나약해 지기도 하지만 물리적인 강압에는 한 번도 굴복한 적이 없다. 나는 인솔하는 소대 왕고참이 ’동작 그만!’을 명령해도 못 들은 척, 계속해서 낮은 포복, 높은 포복으로 이를 악 물면서 비포장 길을 나아갔다. 저녁에는 ’알콜 교육’이 있었다. 안주도 없이 ’반합따까리’로 가득 부어주는 깡소주를 단숨에 들이켜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라서 술은 냄새만 맡아도 취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참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처음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객기를 부린 것이었다.
 
배 속이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활활 타 올랐다. 두 번째 잔을 받아 또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정신이 몽롱해 왔다. 세상이 제멋대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장차 겪어야 할 군대 생활의 불안함도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이젠 술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몇 잔을 더 받아 마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른바 필름이 끊겨 버린 것이다. 다음 날 선임하사가 완전군장을 하고 ’뺑뺑이 돌’ 준비를 하라고 했다. 이유인 즉, 어제 우리 신참들을 인솔해 왔던 왕고참에게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주먹을 날려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무반 한 쪽 구석에 모포를 푹 뒤집어 쓴 시체 같은 시커먼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눈 자위가 부은 것도 있지만, 쫄따구에게 맞았다는 것에 대한 ’쪽팔림’ 때문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난 시기를 살아오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전히 필름이 끊겨 버린 경우였던 것이다. 그날 나는 군장을 매고 빈 총을 든 채 작렬하는 여름 땡볕 아래서 종일토록 게거품을 내 뱉아야 했다.

첫 번째 야간 경계근무. 훈련용 실탄이 아닌 실전용 실탄을 105발이나 지급받고 수류탄 한 상자, 그리고 크레모아 격발기를 챙겨 들고 진지에 투입 되었다. 남방한계선 최 북단에, 서쪽 바다에서 동해 바다까지 전설 속의 뱀처럼 꼬불꼬불 이어져 있는 교통호. 그리고 괴물처럼 시커멓게 서 있는 철책선. 나의 몸은 아연 팽팽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조국의 허리를 두 동강 내고, 7천만 우리 민족에게 단장의 아픔을 더욱 깊게 해 주고 있는 원수 같은 쇠말뚝들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정녕 가고 싶어도 더 이상 갈 수 없는 조국의 반 쪽 끝이란 말인가. 지금 내가 만지고 있는, 냉혈동물처럼 섬뜩한 차가움으로 소름을 끼치게 하는 철골 구조물 덩어리들을 엿 바꿔 먹을 날은 언제쯤이나 올 것인가. 철책선 너머 저 숲만 훌쩍 건너면 우리의 잃어버린 반 쪽 형제들이 살고 있다는데, 우리는 언제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첫 날 북녘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온갖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함께 근무를 서고 있는 고참이 ’한 눈 팔면 인민군이 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목 따간다’는 엄포도 씁쓸하고 서글픈 상념에 빠져 있는 내게는 소설의 한 대목에 지나지 않았다.

햇살이 온 누리를 넉넉한 품으로 감싸 안고 있는 낮에는 실컷 자고, 삼라만상이 암흑의 대지 속으로 숨어버린 밤에는 경계근무를 서는 올빼미 생활이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그 동안 새로운 신병이 소대에 전입해 들어왔다. 나의 소대 서열도 한 단계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등병 쫄다구였다.

밤새 경계 근무를 마치고 관할 구역 교통호 청소를 하고 있는데, 소대의 군기반장 격인 김모 상병이 다가왔다. 그는 경례를 하는 나를 향해 다짜고짜로 주먹을 날려왔다. 예기치 못한 한방이었다. 옆구리에 격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유인즉, ’왜 새로 들어온 신병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키냐’는 것이었다. 나는 통증이 가시지 않은 허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김 상병님! 장 이병은 ’졸면 인민군이 목 베어간다’는 최전방에 배치된 지 며칠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참들의 서슬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장 이병이 어느 정도 전방 생활에 익숙해진 다음에 교육을 시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에게는 넉넉한 적응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소대원 전원이 한 마디 씩만 그에게 주문을 해도 장 이병은 서른 가지를 시행해야 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군 생활의 적응에 부담을 주는 불필요한 교육을 그에게 시킬 의향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김 상병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진 순간, 군화 발이 사정없이 나의 가슴으로 날아왔다. 나는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헛발질을 한 김 상병은 교통호 바닥에 딩굴고 있던 각목을 집어 들었다.

“이 새파란 쫄다구 새끼가 하느님과 동기동창인 고참 무서운 줄 모르고 반항을 해? 골통을 빠개 버릴 테다.“

군기반장의 권위를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그는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몽둥이를 휘둘러 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청소용 빗자루로 막았다.
 
그리고는 그의 복부를 향해 힘껏 주먹을 날려 버렸다. 뒤로 벌렁 나뒹굴어진 그의 목덜미에 나의 군화발을 밀착시켰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김 상병! 여기는 지금 너와 나 둘 밖에 없다. 설마 평생 말뚝 박으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오늘 아침 벌어진 일을 다른 소대원들에게 말하고 안하고는 네 자유다. 나는 하극상 죄로 영창 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너는 쫄다구에게 맞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남아있는 너의 짠밥 생활도 편치는 않을 것이다. 창피당해 찌그러진 얼굴로 남은 군 생활을 할 각오가 서 있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똑똑히 들어 두어라. 그 따위 물리적인 방법으로 신병들을 억압하는 것은 일본군대의 잔재다. 지금이 일제시대인가? 나는 앞으로 김 상병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 보겠다. 남은 군 생활 동안 우리 둘 만이 이렇게 오붓하게 있을 때가 어찌 오늘만 있겠는가?“

김 상병은 쫄다구에게 맞은 창피함 때문인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 후 내가 군을 제대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서울 생활을 다시 시작했을 때 우연히 서울역 근방에서 김 상병을 만났다. 그는 택시운전 노조 간부로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날, 뒷골목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부딪치며 군 시절을 회상하면서 걸쭉한 농담들을 주고 받으며 잿빛 서울 하늘이 떠나갈 듯 웃어 제쳤다.

[편집부 주] 이 수기는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두차례씩 약 50회 가량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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