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의술 과시용으로 지어진 군산 자혜의원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의료사 100년' (2)

조종안 | 기사입력 2011/03/02 [05:32]

일본 의술 과시용으로 지어진 군산 자혜의원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의료사 100년' (2)

조종안 | 입력 : 2011/03/02 [05:32]
일제가 조성한 수탈의 도시 군산은 개항(1899년) 당시만 해도 갯벌과 갈대밭이 무성한 작은 어촌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옥구현 미면 경포리, 장재리, 죽성리가 속했으며 인구는 일인 77명, 조선인 511명으로 일반 의료시설은 전무한 수준이었다. 

 
▲ 개항 직후 군산시 모습. ⓒ 조종안    


1908년 '군산신보사'가 발행한 <부의군산> '위생 편'은 개항기 위생과 의료시설에 대해 "군산은 북한지방과 달리 기온이 일본과 거의 큰 차이가 없고, 습기가 건강한 지역이다. 풍토병으로 한국의 명물인 말라리아 증(症)이 있다고 하지만, 적은 수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산 최초의 본격 현대의학 병원은 1900년 봄 '가다끼리(片桐)' 의사가 세운 '가다끼리 진찰소'였다. 가다끼리는 1년 남짓 운영되다 '유끼야마(行山)' 의사에게 양도되어 1901년 '군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업한다. 

'유끼야마'는 1904년 2월 본국(日本)으로 돌아가면서 '나까야마(中山)'에게 군산병원을 양도한다. 이보다 1년 앞선 1903년부터 '中山病院'(중산병원)을 운영하던 '나까야마'는 군산병원을 인수 합병(1906년)하여 간판을 '群山病院'이라 하고 지금의 영화동으로 이전하였다. 

'나까야마'는 일본 경도의학교(京都 醫學校) 출신으로 활달하고 친절했다고 한다. 그는 '群山病院' 약국원에 약제사 1명, 간호부 2명과 치과부를 두었다. 그러나 1907년 '민단립병원(民團立病院)'이 개원함에 따라 '나까야마 병원'이라 다시 개칭하였다.

 
▲ 거류민단 시절 군산 거리(1910년 전후) ⓒ 조종안    


'민단립병원'을 개업한 민단은 '동경제국대학'에 의뢰하여 가케야마 유소오(影山勇藏) 의학사를 초빙한다. 가케야마 의학사는 1907년부터 민단이 폐지될 때까지 군산 의료계의 권위자로 명성을 갖게 된다.

그 외에도 개항기 군산에는 동경의학 전문학과를 졸업한 '도쓰가요 시이지'가 1904년 7월 현재의 명산동에 개업한 '붕운당(鵬雲堂) 병원'과 1906년 가을 후쿠오카 출신 '사사키'가 군산 거류민지회 보조금을 받아 개업한 '사사키병원(佐佐木病院)이 있었다. 

1914년 12월 군산에는 사립병원 3곳, 의원 2곳, 산파 4곳, 약종상 8곳이 있었으며 종사하는 의사 수는 의학사(醫學士) 1명, 의사(醫師) 6명, 의생(醫生) 2명과 간호부 3명, 약제사 2명이 전부였다. 산파 개업이 4곳이나 되어 여성들의 분만을 도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지방의 진료소들은 초가집 한 채에 한 명의 의사가 근무하는 소위 '1인 의사 병원(one man-hospital)'을 중심으로 순회 진료가 함께 시행되었는데, 환자가 거주하는 주택 방문 진료 형태는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 일본식 통바지 ‘몸빼’를 입고 환자를 돌보는 간호부(간호사)들. ⓒ 조종안   


조선인으로 군산에 최초로 병원을 개업한 의사는 육기병(1874-1935)이었다. 1920년 '옥산의원'을 개업한 육씨는 서울 출생으로 한학자였으며, 다년간 약방을 경영했던 검정의 출신이었는데 1935년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의사를 의학사, 의사, 의생으로 분류하여 칭하였으며 약사는 약제사라 불렀고, 간호사는 간호부라 하였는데, 간호부들은 '몸뻬'라는 일본식 통바지를 입고 근무했다고 한다. 

일제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세운 '자혜의원'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제는 호남평야의 관문 '군산'을 쌀 수탈의 전진기지로 삼는다. 또한, 대규모 농장을 소유한 일본인 지주와 본토에서 이주해오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자 자국민의 의료혜택을 위한 현대식 병원 설립을 추진한다. 

1909년 12월 전라북도 전주, 충청북도 청주, 1910년 1월 함경남도 함흥에 각각 설립된 자혜의원은 이듬해(1910년) 10곳이 증설되면서 도마다 1개씩(13곳)이 되었다. 군산에는 1922년 전북 남원, 전남 순천과 함께 세워진다.

 
▲ 군산 자혜의원 전경. 뒤쪽 좌측으로 보이는 숲은 군산공원(현 월명공원)입니다. ⓒ 조종안    


일제는 1921년 5월 수륙제를 지내던 수덕산(수륙산)과 지금의 월명공원 사이 땅(현 해양경찰서 자리)을 매입, 10월에 조선총독부제령으로 '군산 자혜의원(慈惠醫院) 설치'의 건을 포고하고 건물 신축공사를 시작, 이듬해(1922년) 2월15일 관립 '군산 자혜의원'을 개설했다.

병원 건물은, 수덕산 토석을 채취하여 해안매립 및 하치장을 건설하고, 3천 톤급 기선 3척이 정박할 부잔교 3기와 육상 창고, 군산역-부두 사이에 철도 등이 놓이는 3차 축항공사 기간(1916-1933)인 1922년 5월에 완공된다. 

1938년 평양의학전문학교 뢴트겐과 강사 '하라 야스로(原保郞)'가 당시 28개 주요 관 공립병원을 대상으로 했던 설문조사 결과가 담긴 논문(조선 의학회 잡지 제28권 1호 112-118)은 군산 자혜의원을 불치의 병이었던 '폐결핵을 진료하는 뢴트겐 방사선 시설을 갖추고 개원한 병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1922년 8월 진료를 시작한 자혜의원은 부지 4818평에 건물 5동과 본관, 전염병실, 간호부 기숙사, 소독실, 영안실, 해부실 등을 갖추고, 기숙사 3동을 따로 지었다. 그 후 환자가 증가하면서 업무량이 늘자 1929년에는 병실 1동, 기숙사 1동, 매점 1동을 중축하였다. 

자혜의원 주변은 봄이면 상춘객이 몰려드는 군산공원과 해망굴, 신사, 신사광장, 공회당, 은행 사택, 안국사(현 흥천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세관과 나루터와도 한 마장 거리여서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자혜의원은 3년 후 명칭과 운영체제가 바뀐다. 1923년 간도 대지진은 재정 긴축의 정도를 강화시켰고, 총독부는 본국 자금으로 보충해나갔다. 그러나 본국(일본)에서 시작된 재정 긴축의 여파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총독부는 부담을 최소화하려고 운영 주체를 도(道)로 이관한다. 

1925년 4월 1일 '조선도립의원 관제'가 공포되면서 당월 15일 '군산 자혜의원'은 '군산 도립의원'으로 개칭된다. 이와 함께 토지, 건물, 각종 의료기기와 장비가 모두 도 지방비에 이양되고 관리 운영도 군산부에서 전라북도로 이관되었다.

1941년 조선총독부 후생국 위생과가 작성한 <조선도립의원 요람>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자혜의원' 증설이 필요했다"면서, "도립의원은 원래 '도 자혜의원'으로 칭했으며 국가경영에 속한 것이었으나 대정 14년(1925년) 도(道) 경영으로 이관됨과 동시에 '道立醫院'으로 개칭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장항에 사는 소작농 아들(7세)이 열차에 치여 응급치료 후 군산 도립의원으로 보냈으나 곧 사망했다는 내용의 중앙일보(1932년 12월16일) 보도는 충청지역 주민도 군산 도립의원을 자주 이용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1930년 오룡정(현 오룡동)에 '부립회생원(府立回生院)'이 있었으나 시설이 미비하여 1932년 7월 군산 도립의원 구내에 별도로 독립하여 병사(病舍)를 지었다. 병실 12개, 환자 24명을 수용하는 건물이었는데 경영 관리는 군산 도립의원에 위탁하였다. 

군산 도립의원(원장 아리마조지로)은 개원 이후 통원환자 6만5000명, 시혜환자(施惠患者) 1만4000명(1934년 12월31일 기준)으로 서울을 제외한 평양, 대구 다음으로 환자가 많았고, 직원은 의관 6명, 의원 4명, 약제사 1명, 서기 2명, 간호부 25명, 고용인 6명으로 나타나 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외과, 내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안과, 소아과, 치과의는 물론 주임 서기까지 일본인이고 시료부장(노윤모)만 조선인이었는 것. 일본은 자국의 의술을 과시하려고 본토에서 실력 있는 의사를 선발해서 보냈다는 점 등이다.

 
▲ ‘군산부(群山府)’가 작성한 1934년 말 군산의 병원 통계표. 군산부사(群山府史)에서 ⓒ 조종안    
▲ 군산시 평화동 ‘농방골목’에 남아 있는 ‘세창병원’ 건물.(2010 가을 촬영) ⓒ 조종안    


1934년 12월을 기준으로 군산에는 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 1개, 일본인이 운영하는 병원 8개가 있었으며 조선인이 원장인 병원은 안동병원(권태형), 세창병원(강세형), 동화병원(이도준) 등 3개에 불과했다. 지금도 평화동 옛 '농방골목'에는 서양식으로 지어진 세창병원 건물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자혜병원. 군산의 상징인 '월명산'에도 '자혜(慈惠)'가 들어간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일제는 월명산 정상에 '慈雨惠民'이 음각된 3m 높이의 비석을 세우고 기우제를 지내왔다.(95년 5월 철거)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아무튼 식민지 백성 처지에서는 치욕적인 글귀로 받아들여졌다. 국왕을 협박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백성을 학살한 일제가 '자혜'를 베풀다니, 모순도 그런 모순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치과는 10개소가 개업하고 있었다. 일본인 경영업소가 아홉 곳이며 소화통 1정목(지금의 중앙로 2가)에 있었던 사은당(四恩當 원장-황하성) 치과 한 곳만 조선인 경영업소였다. 치과는 60년대에도 전치과·이치과 두 곳에 불과했다. 

1937년 9월 말 도립의원은 군산 외에 36의원 1분원 4출장소가 문을 열고 있었고, 해방(1945) 무렵에는 46개로 늘어나 도마다 3개꼴이 되었다. 군산 도립의원 운영 체제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지방공사 '전라북도 군산의료원'으로 전환되는 1983년 7월 1일까지 이어져 왔다. 

[기자 주]  '자혜', 치욕적으로 받아들여져

자혜병원. 군산의 상징인 '월명산'에도 '자혜(慈惠)'가 들어간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일제는 월명산 정상에 '慈雨惠民'이 음각된 3m 높이의 비석을 세우고 기우제를 지내왔다.(95년 5월 철거)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아무튼 식민지 백성 처지에서는 치욕적인 글귀로 받아들여졌다. 국왕을 협박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백성을 학살한 일제가 '자혜'를 베풀다니, 모순도 그런 모순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군산문화원 이복웅 원장의 <군산의 현대 의료사 고찰>에서 일부를 발췌 보완했습니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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