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만 아름다움이 있는건 아니었다

[종나미의 도보여행]겨울 한라산 등반을 다녀와서

박종남 컬쳐인시흥 | 기사입력 2011/03/03 [05:14]

정상에만 아름다움이 있는건 아니었다

[종나미의 도보여행]겨울 한라산 등반을 다녀와서

박종남 컬쳐인시흥 | 입력 : 2011/03/03 [05:14]
▲ 배에서 바라 본 일출     © 종나미

새해를 맞아 한라산 정기를 받아 오자 농담처럼 건넸던 말에 살이 붙어 동행인까지 꾸려 시작된 세 번째 한라산 등반.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이동해서 대형버스로 한라산 입구에 내려주면 죽자고 걸어서 한라산 백록담에 점을 찍고 돌아오는 일정이다.

두 번의 경험에 의해 하면 되겠지 싶기도 했지만 겨울산이라 걱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열 명이 함께 출발한 산행이라 저마다의 산행 실력에 차이가 나고 체력도 다른지라 걱정을 보탰다. 지난주부터 보도되는 일기예보가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과감하게 그 시작을 열었다.

시작은 호기로웠다. 하지만 시작도 전에 복병을 만났다. 배를 타고 13시간에 걸쳐 이동하면서 밤을 보내야 하는데 풍랑 탓인지 배가 심하게 흔들려 불면의 밤을 지세우고 새벽에는 저마다 멀미를 호소하며 몸을 가누지 못한다. 아침을 굶고도 두 차례 속을 게워낸 나는 만사가 귀찮아졌다. 게다가 배가 연착을 하여 열시 정각에 성판악휴게소에 도착하였다. 

 
▲ 삼나무 군락지를 오르며     © 종나미
▲ 눈에 덮인 가이드 라인 로프.     © 종나미
▲ 어린이들을 동반한 등산객들     © 종나미

두시간만에 진달래대피소를 통과하여야만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진달래대피소까지는 7.2㎞. 혼자라면 충분히 도전해 볼만하지만 열 명이 모두 통과하기란 불가능해보였다.

처음부터 포기하고 시작할 수는 없는 법. 일단 올라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치가 않다. 아이젠과 스패츠 착용에만도 십 분을 까먹었다. 출발을 하고 나서도 일행들과 속도를 맞추다보니 시간은 진행 속도보다 훨씬 빨리 지나가 버린다.

삼나무 숲을 지나고 새로이 생겨난 속밭 대피소(4.1㎞)에 도착하니 선두팀과 후미는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무조건 전진했다. 마침 뒤에서 시간을 체크하면서 동료들을 독려하는 산악회원들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전진하기만 했다.

오르막이 나타났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숨은 턱에 찼고 다리도 뻐근해져 왔지만 포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진달래대피소에 열두시까지 점을 찍고 일행들을 기다리자는 심산이었다. 통과를 하고 못가는 것은 나의 선택이지만 통과를 못해 되돌아가는 것은 실패라는 생각이 들어 무리수를 두었다.

사라오름 입구(5.8㎞)를 지나치자 다리에서 신호가 왔다. 잠시 한숨을 돌리는 순간, 그동안 제치고 나왔던 사람들이 속속 나를 지나쳐간다. 갈등이 왔다. 그대로 진행을 할까 이즈음에서 적당히 손을 들까. 때마침 뒤쫓아 온 남편이 일행들과 함께 할 것을 권유한다. 포기를 하고나니 마음이 평화롭다.


▲ 너무도 맑고 푸른 제주의 하늘     © 종나미
▲ 서어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     © 종나미

그제서야 주변의 숲이 눈에 들어왔다. 후미의 일행을 기다리며 살짝 허기진 배에다 과일을 공급했다. 땀으로 축축해진 등이 한기를 불러 와 배낭에 밀착시키고 반쯤 드러누우니 너무도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비를 부르는 하늘은 아니었다. 아이젠도 없이 운동화를 신고 등산을 온 운동부로 짐작되는 청소년들은 바지까지 이미 젖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하산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도구 없이 엉덩이를 그대로 붙이고 질퍽거리는 눈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춥지 않아 다행이고 즐거운 표정을 보니 옷 젖는 것쯤이야 보는 사람의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여유가 생기니 사람들과의 소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눈에 묻혀 있는 나무들의 겨울나기도 눈에 들어오니 좋은 점이 점점 늘어난다. 부지런히 올라 12시 30분에 진달래대피소에 도착했다. 먼저 올라온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고 곧이어 후미들도 도착했다.


▲ 진달래대피소에서 바라 본 한라산 정상부     © 종나미
▲ 먹이를 찾아 모인 까마귀 떼     © 종나미

대피소 맞은편 데크에서 컵라면을 사서 도시락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어버린 밥에다 반찬도 도무지 고열량에다 기름투성이들이라 젓가락이 쉬 가지 않았지만 김치만 가지고도 꿀맛이었다. 주변에는 등산객들의 음식물 찌꺼기로 배를 불린 까마귀들이 커다란 몸체를 하고서 시끄러이 울어댔다.

배가 부르고나니 정상부분이 눈에 들어오고 슬슬 정상을 밟지 못하는 아쉬움이 고개를 든다. 주목 군락지들을 살펴보며 눈 속에 묻혀있다 모습을 드러낸 진달래대피소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여전히 눈이 벽면 높이만큼 쌓여 있는 곳도 있으니 얼마나 많은 눈이 왔는지 짐작이 갔다.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은 찼다. 광풍이 한번 몰아치자 눈보라가 산등성이를 타고 퍼져나간다. 앉아서 관망하는 격이 되니 그것조차도 아름답다. 인증 샷을 남기고 하산하는 길.


▲ 새로이 개방 된 사라오름     © 종나미
▲ 사라오름의 분화구     © 종나미

가벼워진 짐만큼이나 마음도 덩달아 가볍다. 사라오름 입구에서 사라오름으로 가는 길. 원래 길이 넓어 보이지 않았는데 눈이 쌓여있고 그 눈 위에 새로이 길이 생겨나다보니 오르는 이들과 내려오는 이들의 교행이 어렵다. 서로가 적당히 기다려주며 급경사로 치닫는 사라오름에 올라서니 그동안의 노고가 한순간에 환희로 바뀐다.

분화구 안에는 바람에 물비늘을 일으키는 물이 고여 있었고 햇살을 받아 눈이 부셨다.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풍광이 거기에 있었다. 분화구 바닥을 걸어가는 기분도 색다르다. 한라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라오름(1324m), 약 358개의 오름 중에 가장 높은 곳에 만들어졌다. 올망졸망 자리하고 있는 현무암들이 마치 눈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 사라오름 전망대에서 바라 본 광경     © 종나미
▲ 사라오름 전망대에서 바라 본 한라산 정상부     © 종나미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는 쌓인 눈이 봉우리를 만들어 더 높아져서 아래를 조망하기 좋았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남쪽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드니 한라산 동남쪽 사면이 정상부분과 함께 보인다.

멋이 있다. 진달래대피소에서 보는 맛이랑 달랐다. 성널오름이 거대한 덩치로 모습을 자랑하고 있기도 했다. 한참을 내려오지 못하고 감상에 빠졌다.

하산하는 길은 쉬웠다. 하지만 시간에 비해 진도가 빠르지 않다. 거의 뛰다싶게 내려왔지만 남은 거리가 줄어드는 속도는 더디다. 그만큼이나 올라갈 때 무리를 했다는 결론이다. 얼마나 속도를 냈기에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속도랑 맞먹는지.


▲ 거의 달려서 내려오는 하산팀.     © 종나미

시간에 쫓기는 팀들은 우리를 제치고 뛰어 내려간다. 그렇게 마음 편하게 하산을 하여 시계를 보니 3시 50분 임박. 여행사 버스를 타고 관음사로 향했다. 정상을 등정하고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여행사 버스이기에.

기다리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다. 두 번 산행을 하면서 관음사에 도착하면 발을 옮겨 놓기가 지옥이라 빨리 몸을 어디에 의탁하고 싶었기에 주변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는데 실패한(?) 자의 여유로움은 많은 것을 허락한다. 3명의 정상 완주 여행사 일행을 박수로 맞이했다.

돌아오는 배안에서의 즐거움은 다음 한라산 산행을 부른다. 다음은 ‘윗세오름’ 코스가 좋네, ‘돈내코’ 코스가 좋네, 다시 정상을 밟아야 하네, 하면서 모두들 들뜬 마음을 쉬 잠재우지 못했다. 끝까지 정상 등정을 성공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는 계기가 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 기사는 <켤쳐인시흥>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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