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하고 털털한 이 시대의 면봉...앵커 '최일구'

[인터뷰] 최일구, "뉴스 진행, 구설수- 자충수- 무리수"

황윤희 안성신문 | 기사입력 2011/04/12 [05:29]

투박하고 털털한 이 시대의 면봉...앵커 '최일구'

[인터뷰] 최일구, "뉴스 진행, 구설수- 자충수- 무리수"

황윤희 안성신문 | 입력 : 2011/04/12 [05:29]
이 분,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고향이었던 삼죽면 ‘톨미’를 떠나 서울로 올라갔지만 아무리 봐도 서울내기 같지 않다. 서울에 적응하기 위해  내성적이던 성격도 바꾸었다는데 그는 결국 타고난 친시골, 친서민적인 성향을 버리지는 못한 듯하다.

‘앵커계의 레볼루션(혁명)’이라 할 만하다. 인터넷에는 그가 뉴스 진행하면서 날린 멘트들이 ‘어록’으로 떠돌고, 팬 카페도 운영 중이다. 40년 만에 저녁 8시로 시간대를 바꾼 mbc 주말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이 나름 성공적인 데는 ‘앵커 최일구(51세)’가 있다는 분석이다. 그 스스로, 시청률의 비결이 어디 있겠느냐는 질문에, “그걸, 내가 직접 말해야 아느냐?”고 반문했다. 그의 대답에 요즘말로 ‘빵 터졌다.’ 

▲ mbc 뉴스데스크 최일구 앵커.      © 안성신문

지난달 23일, 최일구 앵커는 안성시민자치대학 개강식에 초청받아 두 시간 동안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를 듣고 인터뷰를 위해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느낌은 그랬다. ‘아, 이 사람이 과연, 정녕, 진정으로 mbc 간판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맞는가?’ 하는 느낌. 털털하고 소박하기가 mbc 보도국의 부장님을 만난 게 아니라, 동네의 목소리 큰 아저씨를 만난 듯했다. 두 시간의 강의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듯 시종일관 웃겼고,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쉬웠다. 그의 강의의 제목은 이것이었다. ‘나는 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하는가?’ 

많은 사람이 그를 두고 서민적이라 느낄 것이다. 최일구 앵커의 어록을 보면 가진 자보다는 없는 자들의 속을 대변한다는 느낌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 “지난해 영세상인 보호를 위해 ssm규제 법안이 2개나 통과됐습니다. 그럼에도 영세상인들은 가게 문 닫을 판이네요. 당국은 말로만 상생, 속으론 상상만 하고 있나요?” 또는 환경미화원들의 식대를 두고 “하루 식대 7천 원 받아야 하는데 겨우 1천 원 받는다고 하네요. 해당시청이나 용역업체는 취재를 거부하고 행안부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데, 그럼 뭐 어쩌자는 겁니까?” 또는 고가의 등산복에 대해 “엄홍길 차림으로 북한산 가나요?” 하는 것들. 

이러한 멘트들은 앵커인 그가 직접 작성하는 것이다. 최일구 앵커는 멘트에 대해 기본적으로 뉴스를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간판뉴스에서 그러한 발언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최일구 앵커 스스로 자신의 뉴스 진행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세 가지 수를 두지. 하나는 구설수, 또 하나는 자충수, 마지막으로 무리수.” 웃다 넘어갔다.

그는 자신의 진행 스타일이 가져오는 파장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덤빈다. 강의 제목대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것이다. “공영방송은 공공재야. 보통은 무난하게 가자는 것이 대세지. 앵커 보고 절대로 자기 주관 말하지 말라고 해. 객관성과 중립성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거든. 근데 그래도 나는 하는 거야.” 그렇다. 그래도 그는 한다. 그에 의하면 앵커는 얼짱, 몸짱, 말짱이어야 한단다. 그러나 최일구 앵커가 강한 것은 따로 있단다. 바로 배짱! 아, 이 사람에게는 배짱이 있다. 그는 배짱으로 뉴스를 “씹었고” 그 씹음으로 더 많은 이들과 “소통”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영역에서 국민들의 심정을 대변하고자 하는 그 생각의 발로가  어디일까 궁금했다. “안성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이지 않겠느냐”고 그가 딱 잘라 대답한다. 그는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에 특별한 일만 없다면 일주일에 한 번꼴로 내려온다. 그렇게 고향에 다니는 가운데 농촌과 서민과 호흡하는 대목이 있는 듯했다. “어제도 뒷집 형님이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울어. 1년 농사지어봐야 2천만 원 들어오는데, 거기에 비료값, 종자값 따위 다 빼고 나면 월수 100만 원이 안 되는 거야. 농민들이 살기 제일 어려워.”

그는 고향 안성에서 사람들이 토로하는 이야기들을 듣는다. 그리하여 최일구 앵커가 “쌀 공판장에 가서 취재도 하고, 영세상인 사정도 뉴스로 내보내고” 하는 일이 다 거기에서 비롯된다.

최일구 앵커의 뉴스는 또 유머를 무기로 한다. 그는 우리 사회를 유머 부재의 사회라고 진단했다. 그의 뉴스진행을 두고 격이 떨어진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그것이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 풍조, 유머 부재의 풍조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뉴스가 뭐야? 그냥 사람 사는 얘기야. 사람 사는 이야기에는 희로애락이 다 있지. 기쁜 일은 기쁘게, 노한 일은 분노하면서 전하면 돼. 계속 딱딱하게만 뉴스를 진행하라는 법이 있나?” 그의 반문은 명쾌하고 직설적이다. “달래로 몸을 달래보자구요”, “자장면 한 그릇 먹고 돌아오겠습니다”, “경제도 어려운데 mbc가 헬기 한 번 띄웠습니다” 등의 멘트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던 그 무언가가 ‘균열’되는 쾌감을 시청자들에게 선사했을 것이다.

▲ 최일구 앵커는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와 유머 부재의 풍조를 깨고자 한다.        ©최일구 앵커 제공
그러나 그의 유머는 즉흥적이거나 타고난 것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수사반장 알아? 유머는 집하고 용하고 응을 살피고 점으로 만드는 거야.” 이것도 그가 직접 고안해낸 문구였다.
 
“선친이 유머가 풍부했어. 경건해야 할 제사 때도 농담을 하셨지. 항상 웃고 계셨고……. 집안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흥얼흥얼 노래도 하시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리셨지.” 최일구 앵커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부모님을 위해 교직을 버리고 농사꾼으로 전향했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아들과 매일같이 우편으로 신문을 나눠 읽는 것으로 정을 나누었다. 한 유명 토크쇼에 출연한 최일구 앵커가 눈시울을 붉힌 대목도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강의 내내 파워포인트가 넘어갔다. 강의 내용에 맞춘 이미지, 동영상, 음악 등을 담은 화면으로 강의가 지루하지 않았다. 아마도 후배 기자들에게 만들라고 시켰겠지 싶어 물었더니, 아니란다. 손수 그걸 다 만들었다 했다. 그리고는 동영상까지 잘라서 붙이는 이 정도의 기술력은 자기 또래에 흔치 않다고 자랑도 한다.

그는 일에 대한 부지런함과 열성으로 끝내 최고에 올라선 사람이다. 그 무엇도 딱히 엘리트적이라 할 수 없었던 그가 결국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 데에는 발바닥으로 뛰고, 쉼 없이 도전하는 부지런함과 열성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 원망하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최일구는 말한다. “기자는 엉덩이가 무거워선 안 돼.”

대기자 최일구의 최고의 업적을 꼽자면, 당산철교의 부실을 세상에 폭로해 전면 보수공사를 하도록 한 것과 서울 하늘에 최초로 헬기를 띄워 야경을 찍은 사태 등을 들 수 있겠다.

오래 전 mbc의 인터뷰에서는 최일구 기자를 두고 이렇게 기록했다. “최일구 앵커는 ‘부지런함’과 함께 ‘인간적이다’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언뜻 보면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친해지고 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인간적인 벽을 느낄 수 없다고 한다. 겉으로는 퉁명스럽고 털털해 보이지만 그가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보면 조직적이고 꼼꼼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는 정년을 6년쯤 앞두고 있다. 퇴임 후 안성 출신으로서 고향을 위해 특별히 기여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물었다. 물음은 완곡했으나 금방 알아차린다. 정치할 거냐는 물음이었다. 첫 대답은 “모르겠다”였다. 그리고 “아직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오래 전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을 이야기한다. “시장직 끝나고 나서 고향에 가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하더라고. 교정의 큰 은행나무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는데, 내가 보기엔 그 모습이 보기 좋더란 말이야. 나는 기본적으로 선비는 선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 정치인은 타고난 성향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 그는 요즘 자신의 처지를 뒷방 늙은이라고 했다. 보도국의 부장자리에 대한 비유다.
 
시간이 좀 나서 mbc의 뒷방에서 요즘 인문학 독서에 매진하고 있단다. 79학번인 그는 대학 1, 2학년 때 민주화를 위해 싸운 경험이 있다. 그때 동기들이 수배를 받고 감방에 가고 했었다. 그러나 식구들이 말렸고, 결국 그는 군대를 갔다. 최일구 앵커는 그 젊었던 날에 대한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창시절을 통틀어 유일하게 회장을 맡았었다. 처음으로 학급회의를 진행하는데, 교탁에 지우개 가루가 하얗게 쌓였단다. 어릴 적 내성적이고 숫기라곤 없던 그가 처음으로 회의를 진행하면서 줄곧 지우개만 뭉갰던 것이다. 그랬던 이가 뉴스앵커가 되었으니, 실로 인간승리의 드라마라 할 만했다. 최일구 앵커가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으며 머리가 아닌 발로 뛰어온 사람인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 그는 “기자란 국민의 면봉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잘 들리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에서였다.     © 최일구 앵커 제공

존경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거창한 위인이나 성공한 명사의 이름이 나올 거라 예상했었지만 예상을 비껴갔다. 최일구 앵커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나의 멘토야.” 그는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최일구 앵커는 “기자란 국민의 면봉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잘 들리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에서였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마도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더 큰 도덕적, 직업적 책임감이 요구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역에서 도전과 열정, 배짱과 부지런함으로 새로운 세계를 일구었다. 그것이 아마도 앵커 최일구의 최고의 미덕이 아닐까?

인터뷰 내내 최일구 앵커의 어머니를 비롯한 몇 명의 식구들이 곁에서 그를 기다렸다. 가정사가 아닌 일에도 가족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강의를 듣기 위해 곱게 화장을 하고 나온 어머니가 아들이 받은 꽃다발을 들고 계셨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휭하니 식구들과 함께 떠났다. 어디로 갔을까? mbc 뉴스데스크 최일구 앵커는 그 길로 식구들과 ‘장’보러 갔다. 


이 기사는 <안성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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