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민족지도자 33인에게 선고된 가벼운 형량

일제는 33인이 3.1운동의 실질적인 주모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김상구 컬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1/08/06 [05:18]

3.1운동 민족지도자 33인에게 선고된 가벼운 형량

일제는 33인이 3.1운동의 실질적인 주모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김상구 컬럼니스트 | 입력 : 2011/08/06 [05:18]
2) 33인의 민족지도자에게 선고된 형량

3·1 운동에 대한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건 명칭은 .조선만세소요사건‘(朝鮮萬歲騷擾事件)이고, 기본적 시각은 ‘소요’(뭇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폭행·협박을 함으로써 한 지방의 공공질서(公共秩序)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삼일운동참가자의 형량>

무기

유기형

벌금

구류

과료

태형

합계

10년이상

5년이상

2년이상

1년이상

6월이상

6월미만



집행유예

5

21

43

670

1629

3205

451

6024

565

93

8

7

1674

7816
* 출전: 朝鮮總督府 法務局, 『妄動事件處分表』1920.1

일제의 공식문서에 의하면 검거자 수는 4만 6천명에 이르고, 이들 중 19,054명이 검찰로 송치되었다. 그리고 7,81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들이 적용한 죄명은 다음과 같다. “불경죄, 공무집행방해, 범인은닉, 증거인멸, 소요, 방화, 강간, 도박, 살인, 협박, 업무방해, 절도, 강도, 사기, 공갈, 횡령, 태업, 보안법, 출판법, 제령제7호, 경찰범처벌규칙, 수옥규칙” 등이다. 특히 보안법 위반이 전체 유죄판결의 72%(5,601명) 정도를 차지했고 소요죄가 뒤를 이어 22%(1,700명) 정도였다.

▲ 국가기록원이 3.1운동 90주년을 맞아 일반에 공개한 3.1운동 판결문     © 김상구

앞글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우리가 삼일운동의 주모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소위 민족대표 33인들의 형량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상기 표에 의하면, 5년 이상 형을 받은 사람만 해도 69명이다. 반면 33인 관련자 중 최고형은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승훈,한용운 등 6명의 3년형이었다. 더욱이 길선주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유일하게 구속되지 않고 상해로 망명한 김병조의 체포에 대해서도 그리 심각하게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적용된 법조항도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뿐이었다. 소요죄는 적용되지 않았다. 당시 탑골공원의 시위로 촉발된 조선민중들의 거대한 소요의 물결에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 재판과정의 심문 기록을 소개하겠다. 소위 민족대표들의 육성을 들어보기로 하자.

■독립을 어떤 방법으로 하려고 했는가?
권동진: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 탄원서를 보내어 원조를 구하려고 했다.

■공약 3장 중에 ‘최후에 일인까지 최후에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한 것은 일본 정부에 반항하려는 취지가 아닌가?
권동진: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독립의 뜻을 잊지말라는 의미지 반항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세창: 조선 민족이 최후의 일인까지 일본 정부에 대하여 힘으로써 싸우라는 것이다.

■소요와 폭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선언서를 발표한 것이 아닌가?
김창준: 결단코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무기가 없어 힘으로 다툴 수는 없으므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선동할 목적은 없고 다만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하여 선언서를 배포한 것이다.
오세창: 우리는 평화적으로 싸울 생각이었고 폭동을 선동할 생각은 아니었다.

■피고는 무엇 때문에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가?
김창준: 그것은 조선인의 지위 권리가 일본인과 동일하지 않고 학대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일반이 불평을 가지고 있으므로 조선의 독립을 바란다.

■어째서 독립국이 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
나인협: 자주국가의 자주민족이 되는 것이 기쁘기 때문이다.

■피고는 그런 운동을 하면 처벌될 줄 알았는가?
나인협: 그렇다. 처벌될 것을 알고 있었으나 독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참가했다.

■피고는 조선독립이 꼭 될 줄로 생각하는가?
박동완: 그렇다. 일본과 여러 나라가 허락할 줄로 생각하고 있다
최성모: 나는 목적이 좋으므로 동지가 되었다. 독립이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내 의사를 발표했을 뿐이다.
양한묵: 반드시 되리라는 생각은 없어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김완규: 되고 안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생각이다.

■선언서를 배포하면 일반 인민은 그것에 자극되어 과격한 자는 폭동을 일으키리라고 생각지 않았는가?
박동완: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도 자연 일어날 것으로 생각은 했다.

■쌍방의 주권자가 조약으로 합병한 조선을 독립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손병희: 나는 어려서부터 천도교를 믿었기 때문에 국가나 민족 관념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합병 후 조선인은 항상 압박을 받고 있다. 이때에 민족 자결을 제창한 고로 지금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일어나게 되었다.

■피고는 한일 합병에 반대하는가?
신석구: 그렇다. 조선은 4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로서 타국에 병합되는 것은 누구든지 싫어한다. 나는 한일 합병에 반대한다.
이종일: 연방제도라면 몰라도 식민지로 된 것은 반대이다.

■피고는 어떤 일에 불평불만이 있어 조선을 독립하려고 하는가?
신홍식: 한일이 합병된 후 나는 종교 신앙으로 볼 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생각했다. 그 후 망국 민족이 되고 보니 일본 사람이 우리를 얕게 보고 있어 차별 대우가 심하므로 이번 민족 자결 문제가 제창되고 있는 이 기회에 조선도 하나님의 뜻으로 독립국이 되리라고 믿고 가담했다. 그러나 일본을 배척하기 위하여 독립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실질적 지배를 벗지 못하면 결국 독립선언은 무효가 되고 말 것이 아닌가?
한용운: 국가의 독립은 승인을 얻어서 독립하려는 것이 아니고 독립선언을 한 후 각국이 그것을 승인함을 생각했다.

■피고는 이번 계획으로 처벌될 줄 알았는가?
한용운: 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 데 힘을 다한 것이니 벌을 받을 리 없을 줄 안다.

■피고는 총독정치에 반대하는 것인가?
오세창: 조선인에게 자유를 줄 것과 평등한 대우를 희망하고 있다.
이승훈: 조선 사람에 대한 교육 정도가 낮고 실업에 대해서는 더 말할 수 없으며 조선 사람의 인격을 야만과 같이 취급하는데 불만이 있다.

■피고는 총독정치에 대하여 불복하므로 이 운동에 참가했는가?
백상규(용성): 총독정치에 불평은 없으나 독립하는 것이 마음으로 좋아서 찬성했다.

■피고는 어찌하여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가?
박준승: 조선은 4천 년 전에 건국했으며 나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유럽에서 국제연맹회의를 하고 있으므로 이 좋은 기회에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성모: 사람은 자유를 위해 생존하는 것인데 조선 사람은 자유가 없으므로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갑성: 일본 정부가 조선에 대하여 조선어로 교육을 시키지 아니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지 않으면 징병의무를 부여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정치에도 관여시키지 않고 열등 대우를 하므로 독립을 바란다. 또 이번에 구류되어서 더욱 그런 생각을 강하게 하였다. 나는 감옥에서 짐승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감옥은 지옥 이상의 지옥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피고는 독립선언서가 온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정춘수: 잘된 것도 없고 잘 안된 것도 있으나 나는 독립 청원을 할 의사가 없고 그 선언을 한 것도 내 의사가 아니므로 3월 1일에 오지 않았다.

■피고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권동진: 그렇다. 독립이 될 때까지는 어떻게든지 할 것이다.
김완규: 그렇다. 나는 한일합병을 반대하므로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할 것이다.또 나는 일본국민이 되지 않을 것을 명심하고 있다
김창준: 그렇다. 나는 원래 한일합병을 반대해 왔으며, 앞으로도 나 혼자만은 할 수 없을 것이나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실행할 것이다.
나용환: 그렇다. 기회만 있으면 또 할 작정이다.(4/18)
내가 이런 말 하면 비겁한 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 나는 정치에 무관심하므로 총독 정치에 불만이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7/29)
나인협: 그렇다. 독립하려고 이번에 독립운동을 한 것이니 앞으로도 기회만 있으면 또 하겠다.
박동완: 물론 그렇다.
박준승: 앞으로 기회만 있으면 하겠다.
백상규: 기회만 있다면 할런지 몰라도 지금 같아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 판결문 내역 중 일부, 손병희의 나이 주소 등이 확인된다.     © 김상구
손병희: 기회만 있으면 독립 운동을 하려는 내 뜻을 관철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 운동을 할 것이다.
신석구: 그렇다. 나는 한일합병에도 반대했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할 생각이다.
신홍식: 그런 계획들이 있을지는 모르나 새로 일어날지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일이고 몸은 끌려왔지만 정부나 총독이 선언서를 인정할 줄로 생각하니까 목적은 이룰 줄로 생각한다.
홍기조: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오화영: 기회만 있다면 할 것이다.
이필주: 그렇다. 어디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정춘수: 최초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을 스스로 깨닫기 때문에 종교사업이나 하겠다.
최 린: 그렇다. 나는 끝까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한용운: 그렇다. 계속하여 어디까지든지 할 것이다. 반드시 독립은 성취될 것이며 일본에는 중(僧)에 월조(月照)가 있고 조선에는 중에 한용운이가 있을 것이다.(3/11)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5/8)

선언서를 기초했다는 최남선은 정작 서명도 하지 않았고, 길선주는 선언장소에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가 그 후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어떻게 변명을 했는지 무죄로 선고받았다 한다.

게다가 정춘수는 “나는 독립 청원을 할 의사가 없고 그 선언을 한 것도 내 의사가 아니므로 3월 1일에 오지 않았다..... 잘된 것도 없고 잘 안된 것도 있으나 나는 독립 청원을 할 의사가 없고 그 선언을 한 것도 내 의사가 아니므로 3월 1일에 오지 않았다.... 최초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을 스스로 깨닫기 때문에 종교사업이나 하겠다."라고 말했다.

다시 한 번 그들의 말을 음미해보라. 이들 중 민족대표 혹은 민족의 사표로 섬길 분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그리고 출옥 후 그들 중 변절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싸운 사람은 정말 몇 명이나 되었던가?

이러한 사실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33인의 죄는 인정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조선만세소요사건’의 실질적인 주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일제가 3·1운동을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판결문에 잘 나타나있다.


3) 일제가 파악한 3·1운동의 목적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1919년으로부터 1921년 사이에 기소 판시된 3·1운동 관계 형사사건 판결문1)을 보면 3·1운동의 목적, 전개과정 등에 대하여 상당히 상세하게 거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3·1운동의 목적은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인 조선을 제국의 통치에서 이탈시켜 그 지역에서 별도의 독립국을 건설하는 것”2)이라고 보고 있으며, “주동자들은 평화 교란을 선동하고, 조헌을 문란케 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결문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조선인은 자유민이며, 조선은 독립국이다, 전 조선민족은 원근에서 서로 호응하여 최후의 1각, 최후의 1인에 이르기까지 독립완성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를 기록한 선언서를 다수 인쇄하여 경성 및 조선 내 각 곳에 배포하여 도처에 많은 군중이 조선독립시위운동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그 결과 수안군 수안면(遂安面),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玉尙面),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陽城面) 및 원곡면(元谷面) 등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야기함에 이르렀다.3)고 일제는 판시하고 있다.

4) 3·1운동의 전개과정

3·1운동의 전개과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다. 일제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판결문에 기록된 3·1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1918년 1월 상순경 미국 대통령 윌슨이 강화기초조건으로서 14개조를 제창하다. 그리고 1월 중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다. 이 두 가지 사건이 3·1운동 추진의 계기가 된다.

② 해외 즉 상해에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냈다는 것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는 소문에 천도교 등 각계의 인사들도 자극을 받게 되었다.
 
③ 1919년 1월 하순 경, 손병희 등 천도교 인사들이 조선독립선언 및 청원서 제출을 계획함. 계획의 실행은 최린이 담당하기로 결정하다.

④ 1919년 2월 상순 밤, 최린·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이 회동함. 이삼일 후 최린 등 4명은 박영효(朴泳孝)·윤용구(尹用求)·한규설(韓圭卨)·김윤식(金允植) 등 구 한국시대 요직에 있었던 이름 있는 자 및 기독교 관계자와 손병희 이하 천도교도 중 중요한 자를 조선 민족 대표로 옹립하려고 했으나 박영효(朴泳孝) 등은 이 제안을 거절한다.

⑤ 천도교측 인사인 최남선이 기독교측 이인형(이승훈)에게 교섭을 시도함. 그러나 양측의 의사소통 부재로 인해 기독교 단독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의 제출하려고 함. 그리고 2월 23일 경 유럽에 서면을 발송할 경우의 편의를 위해 현순을 상해로 파견한다.

⑥ 2월 22일경, 천도교측이 기독교측에 5천원의 자금을 대여하다.

⑦ 2월 24일경, 논란 끝에 청원서 제출과 독립선언을 병행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기독교측의 오기선은 끝내 탈퇴함. 이때 불교계의 참석도 결정하다.

⑧ 2월 26일경, 최남선이 선언서의 초안을 기초함. 그리고 2월 27일경, 33명의 선언자들이 최종 날인하다.

▲ 기미년 독립선언서, 최남선이 기초했다.     © 김상구

⑨ 당초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 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하였으나,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박희도·이갑성이 학생측과 접촉하여 그들의 동참을 유도함으로서 민족대표들은 당일의 소요가 염려된다고 판단하였고, 이 같은 우려 때문에 급히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하다.

⑩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외 ‘제국정부·조선총독부·귀 중 양의원에 제출할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 그리고 ‘미국 대통령 앞으로의 청원서’ 및 ‘강화회의의 열국위원에게 제출할 의견서’ 등 4통의 문서를 함께 작성하였다.

⑪ 2월 27일, 이종일이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천도교 인쇄소 경성부 수송동 보성사에서 2만 1천매를 인쇄하다.4)

이 판결문에 의하면, 국내에서 3·1운동을 주관한 이들은 외교를 통한 즉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동시에 조선총독부에도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하고,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하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 중 청원서 제출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특히 임시정부 수립은 애초 계획에도 없었음이 확인된다.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청원서 제출은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국내 독립선언 주관 단체와의 연결고리는 대단히 약하는 뜻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단체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실행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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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독립운동사자료집 제5집 3.1운동재판기록,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 1972년 / 1598쪽
2)동 자료집 p6
3)동 자료집 p6
4)이상 동 자료집 p16~p21
원본 기사 보기:역사복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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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집사람 2011/12/17 [10:53] 수정 | 삭제
  • 삼일운동은 대표자가 말하듯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에 대하여 필자는 삼일운동의 취지와 의의에 대하여 과소평가를 하고 있다
    파리강화회의와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을 청원하는 무혈운동으로의
    시작이다 그런청원서가 성사되지 않아 유혈운동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지 임시정부가 먼저가 아니다 그리고 나서 임정이 수립하고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취임한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는 폴란드가 러시아으로 부터 독립운동보다도 앞서는 세계최초의 근세 근대의 국가적 국민의 독립만세를 외친태극기를 들고 흔든 만세운동이다 그런 자주적인 운동을 매도하고 폄하해서는 안된다 시위는 독립선언을 하면 국민들의 시위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만세운동이었을 명심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