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교, 문제아 '연산군-세조' : 모범생 '세종-성종'

[최재천의 책갈피] 경연 '왕의 공부' -'조선역관 열전'

최재천 변호사 | 기사입력 2011/09/13 [05:03]

제왕학교, 문제아 '연산군-세조' : 모범생 '세종-성종'

[최재천의 책갈피] 경연 '왕의 공부' -'조선역관 열전'

최재천 변호사 | 입력 : 2011/09/13 [05:03]
조선 명종 19년(1564) 2월 13일, 왕의 공부시간 ‘경연’(經筵). 선생님은 기대승, 학생은 명종. “(기대승) 언로(言路)는 국가에서 매우 중대한 것입니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가 편안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나 지금 언로가 크게 열려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 행여 성급하고 경솔한 말이 있더라도 심상하게 여기고 용납하여서 자기의 소회를 반드시 아뢸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명종) 언로가 통하고 막힘은 진실로 국가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번에 사헌부에서 올린 소장은 미진한 뜻이 있어서 내가 따져서 물었으니, 특별히 언로에 해로울 것은 없다.”
 
“(기대승) 성상의 뜻은 이와 같더라도 옛사람의 말에 ‘가가호호마다 찾아가서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말한 근거를 지금 거듭거듭 따져 물으시니 듣고 보기에 매우 편안치 못합니다.” 
 
▲ 경연, 왕의 공부 / 조선역관열전    
고봉 기대승은 경연에 참석하여 강학한 내용을 <논사록>에 기록했다.
 
경연이란 철학과 역사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 고전(經)을 공부하고 고전에 관해 토론하고 담론하는 자리(筵)다.
 
국가의 모든 권력을 지닌 1인 전제군주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도록 하고, 국가 전체의 공공선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운용하도록 이끌어가는 것.
 
한마디로 제왕을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을 전공한 김태완이 <경연, 왕의 공부>를 정리했다. 좋은 임금이 모범생이었다. 세종과 성종이 대표적이다. 두 임금은 재위 기간의 갖가지 경연 관련 기록이나 기사가 풍부하게 남아 있어 열심히 공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반면, 세조와 연산군은 제왕학교의 문제아라고 할 수 있다. <세조실록>에는 경연 관련 기사가 매우 빈약하다. 연산군은 초기 기록에는 경연을 자주 거르거나 오랫동안 쉬었으니 다시 참석하라고 주청하는 신하들과 옥신각신하는 내용이 눈에 띈다. 후기에는 스스로 학문이 성취되었다며 경연을 폐지하겠다는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
 
조선에서 사대교린에 관한 업무는 예조와 승문원의 소임이었지만 통역만은 반드시 역관에게 맡겼다. 문서작성과 외교실무도 역관의 몫이었다. 역관들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사역원(司譯院) 제도가 있었다.
 
교육은 교수와 훈도가 전담했는데, 회화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교수가 됐다. 사역원 생도의 정원은 한(漢)학생 35명, 몽(蒙)학생 10명, 여진학생 20명, 왜학생 15명으로 총 80명이었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언어별로 나뉘어 수업을 받았다. 사역원 생도들은 정식 역관이 되려면 3년에 한 번씩 실시되는 식년시에 합격하든지, 잡과의 하나인 역과(譯科)에 합격해야 했다.
 
역사교양서 저술가로 활동 중인 이상각이 <조선역관열전>을 정리했다. 인조 11년(1633) 10월 22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호역(胡譯) 정명수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평안도 은산의 관노였는데 후금과의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됐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조선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현지에서 여진어를 익혀 역관이 됐다. 후금의 사신 용골대를 수행해 조선에 들어온 그는 노비 시절에 자신을 구타한 전 은산현감을 붙잡아 모욕을 주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인조 21년에는 칙사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 때 황제의 칙사는 조선 국왕보다 서열이 높았다.
 
이번엔 스승 완당 김정희와 역관인 제자 우선 이상적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 완당이 제주도에 유배되어 고독에 시달리던 어느 해, 청을 오가던 우선은 <황조경세문편>(皇朝徑世文編)이란 책을 스승에게 보내주었다.
 
자그마치 총 120권, 79책에 달하는 대작. 이듬해인 1844년, 나이 58세, 유배 생활 5년째에 접어든 완당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제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준비했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는 <세한도>(歲寒圖)였다. 모처럼 우리 역사를 읽었다. 정치와 학문,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와 도리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 여름의 끝자락.

 
이 글은 <주간경향> 941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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