짖궃은 가을비가 망친 여행, 아내의 반응은?

정동진 설악산 단풍열차 무박 2일 여행기

조종안 | 기사입력 2011/10/26 [05:00]

짖궃은 가을비가 망친 여행, 아내의 반응은?

정동진 설악산 단풍열차 무박 2일 여행기

조종안 | 입력 : 2011/10/26 [05:00]
'정동진 설악산 단풍열차 여행' 첫날(10월 21일). 아내와 출발지인 군산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9시 50분. 출발 시각이 30분이나 남았지만 대합실은 동창, 친목모임, 가족단위로 보이는 여행객들로 붐볐다. 그들은 열차 출발 시각이 계속 지연돼도 마냥 즐거워했다. 

두리번거리다가 친형님을 만났다.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형님은 "함께 자란 고향동네 친구들과의 친목모임에서 놀러 간다"고 했다. 형님 일행은 5호실, 우리는 3호실. 형님은 "술안주가 준비되어 있으니 기차가 출발하면 건너오라"고 넌지시 말했다.

▲ 새벽 6시에 본 정동진역 건물     © 조종안

오후 11시 14분. 출발예정 시각보다 한 시간 가까이 늦게 군산역을 출발한 관광열차는 이튿날 오전 5시 58분 드라마 <모래시계>로 유명한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내릴 준비를 하는데 주변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며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기차에 계속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휴대용 마이크를 든 여성 가이드가 오더니 "오늘 정동진 해돋이 시각은 6시 37분인데요. 날이 흐려서요…. 하긴 날씨가 맑아도 일출을 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라며 승객들을 위로했다. 그녀는 버스대기 장소와 출발 시각 등 하루 일정을 설명했다. 

우리가 탄 열차는 무궁화호로 총 6시간 44분을 달리는 동안 장항선(옛 군산선), 호남선, 경부선, 충북선, 태백선, 영동선 등을 거쳤다. 긴 여정이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리니까 보이는 것은 가로등과 '정동진역'이라고 쓴 역 간판뿐. 온 세상이 깜깜했다. 

말로만 듣던 드라마 <모래시계> 기념물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가을비가 심술궂게 내렸기 때문이다. 캄캄한 공간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가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잠을 설쳤더니 입까지 까끌까끌했다. 추위에 허기까지 밀려왔다.

 
▲ 적당히 익은 깍두기와 궁합이 잘 맞았던 육개장.     © 조종안


해돋이고 뭐고 허기부터 달래야겠다는 생각으로 부근 식당으로 들어갔다. 옆 탁자에서 젊은 연인이 황태 해장국을 먹고 있어 맛있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기대는 하지 마세요"란다. 그말이 '맛없다'는 말보다 더 강하게 느껴져 아내는 설렁탕, 나는 육개장을 주문했다.

식당은 갑자기 밀려든 손님으로 어느새 만원을 이뤘다. 돈을 낸 차례대로 음식이 나왔다. 황태 해장국을 시켜먹은 손님들은 대부분 "맛이 없다"고 투덜거리며 나갔다. 그래도 육개장은 얼큰하고 개운했다. 설렁탕을 주문한 아내도 '국물이 톱톱해서 좋다'고 했다. 

창밖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 속으로 아침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정동진에서 비오는 모습이나 구경하려고 가슴 설레며 한 달 가까이 기다리진 않았는데…'라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해돋이와 설악산 단풍은 포기하기로 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오전 7시 25분 설악산을 향해 출발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밝아오는 아침을 막는 것 같았다. 빗줄기도 더욱 굵어졌다. 하늘이 검으니까 기분도 우울했다. 승객들도 내 마음과 같았는지 버스기사가 음악을 켜니까 '노래는 무슨 노래냐'며 끄라고 했다.

 
▲ 38선 휴게소에서 바라본 동해 바닷가 풍경.     © 조종안


오전 8시 32분, 양양 38선 휴게소에 도착했다. 비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와 곧장 버스에 오르려니까 서운했다. 서운한 마음을 달래려 모래사장 입구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빗속의 바다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바위에 붉은 글씨로 음각한 '38선' 글씨는 내가 스물여섯 살(1975년 11월) 총각 때 형님과 설악산에 다녀왔던 추억들을 떠오르게 했다. 하얀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바라보며 기념촬영을 했던 곳인데 벌써 36년이 지나다니, 세월의 덧없음도 함께 느꼈다.

 
▲ 남설악, 노천탕에서 족욕을 즐기는 아주머니들.     © 조종안


설악산 3대 명소로 불리는 '주전골'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 45분. 여전히 비가 내렸고, 잿빛 하늘은 오색으로 물든 설악의 단풍까지 칙칙하게 만들어버렸다. 여행 가이드가 용소폭포, 금강문, 선녀탕, 성국사, 오색약수로 이어지는 관광코스를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날씨가 좋지 않아 포기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던 중 아주머니들이 노천온천탕에서 족욕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판에는 '오색온천 족욕은 신체기능을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해서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위장병과 빈혈증 신경통, 신경쇠약 등에도 특효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오색온천은 '오색약수터'(천연기념물 제529호)에서 한계령 쪽으로 약 3km 올라간 지점에 있으며 먼 옛날 선녀들이 목욕하고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한다.

▲ 남설악 주차장 가는 길의 돌담과 단풍.     © 조종안
▲ 남설악 주차장에서 바라본 설악 능선의 비구름.     © 조종안


주어진 시간이 짧아 멀리 갈 수가 없으니 우산을 살 마음도 나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빗속으로 보이는 오색 남설악 일대와 개발로 망가진 흘림골 풍경만 카메라에 담았다. 그래도 검게 변한 산등성이를 휘감고 도는 구름이 아쉬움을 달래줬다. 

우리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먹는 일뿐이었다. '아침이 시원찮았다"는 형님 친구들과 식당을 찾았다. 오전 11시, 아내와 나는 담소를 나누다 황태 정식으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처음 맛보는 황태정식은 별미였고 담백한 취나물은 입맛을 돋우었다. 

낮 12시 37분에 우리는 강릉으로 이동했다. 새벽에는 해돋이를 보기 위해 정동진역에서 하차했지만 집오로 갈 때는 강릉에서 출발한단다. 버스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듯한 바다를 한 시간 남짓 끼고 달려 시내로 진입했다. 거리에는 이이(李珥)를 추모하는 '율곡제' 기간임을 알리는 청사초롱이 걸려 있었다.

 
▲ 강릉역 건물과 매표소. 우리가 이용했던 관광열차.     © 조종안


강릉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41분. 주변에 명소가 많은 강릉은 도시 규모는 작지만 차분하고 정리가 잘 돼 있었다. 기차역 역시 한적한 시골역처럼 작고 아담했다. 강릉역의 아담한 역사(驛舍)는 무조건 큰 것을 으뜸으로 치는 세태를 꾸짖는 듯했다. 매표소 창구 여직원이 손님과 마주 보며 표를 파는 모습도 정겨웠다. 

관광열차 출발시각은 오후 2시 20분이라고 했다. 출발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플랫폼을 보니 꽃무늬가 아름답게 그려진 열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갈 때는 좋은 열차를 이용하는구나!'라고 좋아했는데 알고보니 관광용 바다열차였다. 헛웃음만 나왔다.

 
▲ 기차 객실 통로에 먹자판을 벌인 승객들과 생선회     © 조종안


오후 2시부터 승차를 시작했지만, 출발은 예정보다 20분 늦은 2시 40분에 했다. 승객들은 열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집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바닥에 깔아놓고 먹자판을 벌였다. 흥이 오르다보니 옆 좌석 승객에게도 술잔을 권하는 등 객실 내 분위기는 전날과 180도 달랐다.

광어회, 전어회 등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펼쳐놓은 한 팀은 "'짠돌이 모임'에서 부부동반으로 14명이 왔다"며 말을 건넸다. 이 팀은 자영업을 하는 분들로 모두 부자들인데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해서 모임 이름에 '짠돌이'를 넣었다고 한다.

 
▲ ‘스위치 백’ 구간 안내문이 걸린 흥전역     © 조종안


오후 4시 12분 도계역을 출발해서 조금 지나니까 "선로 이동을 위해 잠시 기차가 역방향으로 운행할 것"이라며 "정상운행이니 놀라지 마십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영동선의 흥전~나한정 구간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스위치 백(경사가 급한 철도를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여러 개의 작은 경사로 쪼개 올라가는 방식)' 구간이란다. 

"얼라, 기차가 '빠꾸'(뒤)로 가네!"
"그렁게 말여, 무슨 일이당가?"

"별시럽네, 기차도 술 취허는가?"
"산이 너무 높은 게 기차가 미끄러지는가?"

"기차가 미끄러지믄 우리는 어떻게 허라고···."

 바닥에 앉아 술잔을 나누던 손님들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했다. 그들은 술을 마시느라 안내 방송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흥에 취해 기차가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상관없다는 듯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마냥 즐거워하는 승객들을 보니까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한 손님이 "종이에 자꾸 적는 걸 보니까 색다른 일 하시는 양반 같다"며 나에게도 술잔을 권했다.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함께 어울리다 보니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까지 풀리는 것 같았다.


▲ 반찬이 생각보다 푸짐했던 열차 도시락.     © 조종안


오후 5시 45분 쯤 태백역을 지나고나니 도시락이 나왔다. 김치, 돈가스, 젓갈, 오이, 부침개, 짠지, 연뿌리 등 반찬이 다양했다. 기차에서 먹는 도시락은 그 자체로 별미였다. 아내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도시락을 즐겁고 맛있게 먹는 것으로 본전은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는 오후 7시 10분 제천역에 도착해 승무원을 교대하고 전날과 같은 코스를 달려 오후 10시 46분 군산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을 걸어 나오는데,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약이 올랐으나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고단했지만 즐거웠어요"라는 아내 말에 위안이 됐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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