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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한 마리 키우자'', "안돼!".."왜 안되는데?"
[사는 이야기] 7살 아들의 한 없는 궁금증과 끊없는 질문
 
이민선 안양뉴스   기사입력  2011/12/04 [05:36]
“아빠 우리 강아지 한 마리 키우자, 강아지 하고 놀고 싶어”
“안돼”
“왜? 왜 안 되는데, 이유는 설명해 줘야지”


가끔 이렇게 강아지 설전이 벌어진다. 7살 아들 녀석이 눈을 치켜 뜬 채 ‘왜’를 무기 삼아 대들면 ‘쬐금’ 당혹스럽다. 강아지 수명이 사람보다 짧아서,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낼 때 무척 슬프기 때문이라고 설명 하려다 그만 두었다. 죽음, 슬픔, 이별 같은 단어를 이해하기에 7살은 너무 어린 나이다. 

내가 아들 녀석 나이일 때는 ‘왜’ 라는 말을 알지 못했다. 이유를 몰라도, 아무리 궁금해도 그저 ‘예’ 라고 대답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난 그렇게 ‘예’…‘예’ 하다가 이 세상에 지독한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7살 무렵이었다. 아저씨들이 아버지와 속닥거리다가 돈을 건넸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누렁이를 쳐다보는 아저씨들 눈길이 끈적끈적 했다. 아버지는 엄지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돈을 세고는 아저씨들을 향해 머리를 두세 번 끄덕였다. 

마음이 급했다. 누렁이한테 다가가니 속없는 녀석이 꼬리를 치면서 벌렁 드러눕는다. 배를 쓰다듬어 달라는 표시다.
 
누렁이와는 삼년을 함께 살았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함께 놀아 줄만한 또래 형제가 없던 내게 누렁이는 친구 이상 이었다. 아버지한테 혼이 나는 게 두려웠지만 누렁이를 아저씨들에게 넘겨 줄 수는 없었다. 누렁이 목에 감겨 있는 목줄을 풀었다. ‘멀리 달아나라고’ 고 ‘다시는 집에 오지 말라’고 목구멍에 감겨 들어가는 목소리로 누렁이에게 속삭였다. 

누렁이는 바보였다. 달아나기는커녕 꼬리를 치면서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놀아달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도망쳐 누렁아, 이 바보야, 붙잡히면 너 죽어’ 하고 소리쳤지만 내 몸 안에서만 맴 돌 뿐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나와 아버지와의 거리는 불과 스무 발짝 안쪽 이었다. 소리를 지르면 누렁이를 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들킬게 뻔했다. 

등 뒤에서 어른들 발소리가 들렸다. 살금살금 거리다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였다. 급했다. 아버지한테 혼이 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몸속을 돌던 소리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망쳐 누렁아…”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누렁이 목덜미를 낚아챘다. 아저씨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누렁이 목에 새끼줄을 걸었다. 누렁이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 아저씨들의 완력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어허~저게 왜 빠졌지, 빨리 잡어, 도망치기 전에 빨리 잡어”

누렁이가 용케 빠져 나왔다. 그제야 붙잡히면 죽는 다는 것을 알았는지 누렁이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누렁이는 마당을 지나 얕은 개울을 건너뛰어서 보리밭으로 내달렸다. 아버지와 아저씨들이 누렁이 뒤를 쫓아서 뛰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달렸다. 

네 발 달린 동물을 잡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와 아저씨들은 금세 지쳤다. 아버지가 화난 잔뜩 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미 혼이 날 것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붉으락푸르락 하는 아버지 얼굴을 보니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네가 개하고 친하니까 한번 불러봐, 네가 오라고 하면 분명히 달려 올 것이여, 어여!"

낮은 목소리였지만 아버지 말에는 굉장한 힘이 실려 있었다. 7살짜리가 도저히 거역 할 수 없는 무게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누렁이를 배신할 수도, 그렇다고 아버지 말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야 이놈아 뭐하고 있어 빨리 부르지 않고!"

▲  7살 아들    © 이민선


아버지가 소리쳤다. 난 겁이 나서 누렁이가 있는 보리밭으로 뛰어갔다. 누렁이를 불렀다. 바보 같은 누렁이 녀석이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먼발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꼭 붙잡고 있으라고 소리치며 천천히 다가왔다. 내 손이 누렁이 몸에 닿는 순간 아버지가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스쳤다. 

난 “누렁아 도망쳐” 하고 소리치며 누렁이를 밀쳐냈다. 그제 서야 눈치를 챘는지 누렁이가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다시 벌어졌다. 누렁이는 사력을 다했다. 나도 사력을 다해서 누렁이를 쫓아갔다. 누렁이 녀석은 뛰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그때마다 난 빨리 뛰라고 누렁이를 재촉했다.

등 뒤에서 화가 잔뜩 난 아버지 고함 소리가 들렸다. 누렁이를 잡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신다. 아버지는 나를 금세 따라 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누렁이 녀석도 아저씨들 손에 잡혀서 버둥거리며 질질 끌려갔다.

누렁이는 죽었다. 철사 줄에 묶인 채 불에 그을렸다. 충격이었다. 모르겠다. 어째서 그 잔인한 광경을 결사적으로 보려고 했는지를. 아마 누렁이가 떠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후 난 며칠을 고열에 시달리며 끙끙 앓았다. 

강아지 설전을 벌 일 때, ‘왜’ 라고 물어오는 아들 녀석 때문에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고 기특하다.

아무리 어른이라도, 설사 아버지라도 납득 할 수 없는 말을 하면 ‘왜’ 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40년 넘게 살면서 터득한 세상살이 진리다. ‘왜’ 라는 말에는 모든 사물의 근원적인 이치를 따지려는 사고, 모든 정보를 비판 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고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왜’ 라는 질문이 날마다 나를 새롭게 한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머리를 쓰고 책을 읽는다. 그러면서 ‘예’를 강요하던 암흑기가 끝났음에 감사한다. 지금은 ‘왜’ 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만 ‘예’라는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시대다. 7살배기가 ‘왜’ 라고 질문하는 게 그 방증이다. 

집회와 시위가 끊이질 않는다. 한진 중공업 사태가 해결되자 이번엔 FTA문제 때문에 연일 시위가 벌어진다. 근본적인 원인은 ‘왜’ 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 만 강요하면 이렇게 혼란 스러운 것이다.  

아들 녀석 질문에 답을 해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왜’ 라는 말에 대답을 해줄 생각이다. 강아지가 사람만큼 오래 살지 못해서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낼 때 무척 슬프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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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12/04 [05:36]  최종편집: ⓒ 신문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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