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막걸리 맛보기는 저항이 맞물렸던 화사랑"

[이명옥의 책 동네] 김학민 <태초에 술이 있었네>

이명옥 | 기사입력 2012/01/30 [05:25]

"나의 막걸리 맛보기는 저항이 맞물렸던 화사랑"

[이명옥의 책 동네] 김학민 <태초에 술이 있었네>

이명옥 | 입력 : 2012/01/30 [05:25]

▲ 태초에 술이 있었네 김학민의 술 이야기     © 이명옥
<태초에 술이 있었네>의 저자 프레시안 음식문화학교 김학민 교장을 만난 것은 박종철 민주열사 25주기 추도식 후에 가진 조촐한 뒤풀이 자리에서다.
 
그 자리에는 25년 만에 얼굴을 드러낸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축소은폐 사실을 세상에 알린 숨은 공로자 안유님과 한재동님이 함께 했다. 거기서 저자가 자신의 따끈한 저서 <태초에 술이 있었네>를 증정했다.

뒤풀이 자리는 즐겁고 유쾌했다. 평소에 듣지 못했던 시대적 역사적 사건의 숨겨진 비화를 들을 수 있던 자리여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나중에 받아 읽게 된 <태초에 술이 있었네>는 유쾌한 술자리만큼이나 맛깔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술술 넘어가는 술과 문화 이야기다. 

저자는 동서양의 술의 유래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역사적 배경, 술잔, 전통주, 술의 두 얼굴, 술집의 인심까지를 맛깔스럽게 버무려 마지막 장이 언제 넘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술술 넘어갈 만큼 흥미롭게 풀어낸다.

술의 역사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구한 것은 술이 하늘에 제를 올릴 때 사용하던 음료,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위로부터 내려온 문화이기 때문이다. 성경이나 산회에 술이 등장하고 한민족은 고래로부터 하늘을 우러르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백성이라는 기록에서 술의 사용을 알 수 있다. 

술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음료다. 술은 그 탄생부터 자연발효라는 신비로움을 함축하고 있고, 또 생산력이 빈약하던 시절 먹을거리로서의 효용을 희생시키고 갈무리한 곡식의 진액이기 때문에 제사 때 신에게 바치는 귀한 음료였다. 또 제사가 끝나고 음복에 참여하는 자들도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상당 기간 술은 상류층만이 그 기묘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상류층만 즐길 수 있었다던 술, 지배계층의 전유물로 제사상에 올리던 술이 화학물질을 첨가한 소주 등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국가의 주요 세입원으로 일반화되었다. 아편, 차. 커피 등과 마찬가지로 술은 국가나 민족을 망가트리는 부정적인 도구로 악용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제 술은 전 세계 인구 중 70%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는  음료가 되었다.

한국인의 서민 술은 단연 막걸리다. 막걸리는 곡식에 누룩을 넣고 발효시켜 만든 대표적인 술이다. 농경사회이고 하늘을 우러르는 제사 의식을 중요시한 한민족이니 가정마다 가양주가 발달되고 차례나 제사를 위해 집집마다 술 익는 냄새가 났음직하다.
 
실제로 일본과 박정희 정권이 술을 집에서 빚는 것을 금지하기 전 농촌에서는 집집마다 술을 빚어 상차림이나 손님 접대에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시골에서 유년을 보낸 이들은 어릴 때 막 거른 새참 막걸리 심부름을 하며 주전자에 입을 대 슬쩍 맛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나의 막걸리 맛보기는 70년대 말 시대의 암울함과 이십대의 저항이 맞물려 드나들던 화사랑에서 시작된다. 신촌에서 기차를 타고 백마역의 화사랑에 가서 금지곡인 한대수의 노래나 김민기의 노래도 듣고 막걸리에 파전을 놓고 오랜 시간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막걸리를 못 마시던 나는 그저 안주나 축내면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좋아 자주 술자리에 끼었다.

언제부터인지 베니어판 천정에 알몸 전구 하나 달랑 달린 낙원동 일대 막걸리집이나 성대 근처 주점 대신, 소주와 호프집 생맥주가 젊은이들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하면서 막걸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갔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쌀 소비량이 줄어들자 쌀 소비를 늘리기 위해 쌀 막걸리를 빚기 시작해 다시 막걸리 붐이 일기 시작하더니 막걸리 학교와 다양한 기능성 막걸리까지 등장해 이제는 막걸리의 춘추전국 시대를 보는 것 같다.
 
설이나 명절에 맑은 술인 청주가 아닌, 탁주 막걸리로 차례를 지내는 경우도 있나 보다. 막걸리를 음복했다는 지인이 있으니 말이다. 막걸리가 대세가 되면서 생겨난 새로운 문화일까? 

<태초에 술이 있었네>는 단순한 맛집과 술에 대한 소개가 아니다. 저자의 삶과 약력이 말해주듯 일제의 단속과 서양 술의 반입으로 잃어버렸던 얼과 술의 역사, 사회문화적 의미를 촘촘하고 유쾌하게 엮었다.
 
책 속에는 눈물이 있고, 운동과 역사의 현장이 있고, 사람의 체취가 있으며, 오랜 전통과 사회문화적 자부심이 장마다 가득 가득 담겨있다. 그야말로 술과 문화와 역사가 한데 어우러진 종합음식문화예술의 한 마당이 질펀하고 흥미롭게 펼쳐지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동서남북 그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놓더라도 훈훈한 사람의 체취와 독특한 술맛과 맛깔스러운 안주가 있는 집이 당신을 손짓해 술술 술을 부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마시라. 좋은 벗과 이야기가 함께하는 술자리만큼 맛있고 유익한 술자리는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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