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회영루에서 자장면을 맛보다

[네티즌 칼럼]우리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라며

DRAGO | 기사입력 2008/03/15 [11:29]

춘천 회영루에서 자장면을 맛보다

[네티즌 칼럼]우리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라며

DRAGO | 입력 : 2008/03/15 [11:29]
스시가 한국요리라는 주장이 있다. 함경도 가자미식혜를 기원으로 보는 가설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기원을 따지자면, 동남아시아가 기원일 게다. 민물고기 보존용으로 곡물에 곁들인 것이 시초로 이천 년 전에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설은 면류란 면류는 모두 중국요리라는 설정처럼 광범위하다.

해서, 나는 민족주의 규정처럼 음식 또한 근대적 산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입장이다. 즉, 한두 가지 공통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다. 하여, 스시의 기원을 19세기 일본의 에도(도쿄)에 등장한 쥔초밥(니기리스시)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나 싶다. 그처럼 나는 자장면 역시 한국요리로 본다. 아울러 그 기원을 1950년대로 간주한다.  

자장면의 어원은 장을 볶는다는 의미로 ‘작(炸)장면’이라고 한다. 베이징에 가면 작장면을 파는데, 이게 자장면의 원조라고 한다. 중국 자장면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 4500여명과 함께 40여명 상인이 인천항으로 들어와 청요리를 만들면서부터이다.
 
물론 당시에 자장면이 주력이 아니었고, 만두 등이었다 한다. 보통 공화춘이 원조라고 하지만, 공화춘 외에도 여러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공식적으로 사업체를 등록한 최초 가게가 공화춘일 뿐이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정부가 동남아 등지에서 경제권을 장악한 화교를 경계하여 경제활동에 제약을 가하자 생활력이 강한 화교는 자장면 개발로 활로를 찾은 셈이다.
 
공화춘 후예도 자장면 시작을 1950년대부터 본다. 왜냐하면 저가로 밀가루가 보급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자장면이 탄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 자장면은 중국요리를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을 시킨 한국요리인 게다. 만드는 법도 다를뿐더러 맛도 다르다.  

중국의 자장면과 한국 자장면의 차이

중국 자장면은 한국 자장면처럼 검은색의 캐러멜 소스와 설탕을 넣어 달게 만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춘장의 차이다. 중국 춘장은 메주콩과 밀가루를 섞어 발효시켜 만든다. 지금도 중국 산둥 지방에 가면 이런 장을 가정식에 많이 쓴다.
 
반면 한국  춘장은 밀가루로 만든 장, 밀장이 특징이다. 이 밀장은 요동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에 달달하게 하고자 캐러멜 소스와 설탕을 넣었다. 달달한 맛은 아무래도 일본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한국 자장면은 산둥과 요동과 일본에서 각각 유래한 것들을 섞은 퓨전 음식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한국식 춘장이 생산된 것은 전후 영화장유라는 회사를 통해서였다. 그냥 ‘사자표 춘장’이라고 한다. 당시 원조 물자로 밀가루가 저가로 보급되었기에 밀가루를 이용한 춘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춘장에 캐러멜을 넣어 점도와 단맛을 높이면서 크게 히트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자장면의 실제적인 기원이다. 그렇더라도 지금처럼 까맣게 요리하지는 않았다. 전통 춘장과 반씩 섞거나 전분을 많이 넣어 갈색을 띠었다. 바로 옛날자장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 색깔이 진해지더니 1980년대에는 지금처럼 까만색의 춘장이 일반화되었다.

중국인이 한국 자장면을 먹으면 기름지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음식에 기름으로 범벅을 하는 중국인이 한국 자장면을 두고 기름지다고 하는 것은 뜻밖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인이 한국 자장면을 먹으면 어떨까. 일본인은 아마 달달 하다고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말할까. 달콤쌉쌀느끼한 맛이 한국 자장면이다, 라고 하겠다. 나는 마냥 단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자장면을 먹으면 의외로 쌉쌀한 맛이 있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듯싶다. 또한 나는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자장면을 질리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쌉쌀한 맛 때문이 아닌가 싶은 게다.

세대를 초월해서 어떤 음식이 사랑받는다면 연구할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할머니가 백숙을, 아이는 후라이드 치킨을 따로 좋아해도 자장면만은 공통으로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곰곰이 생각하면 무척 신기한 일이다.
 
옛날 자장면의 맛은 어떤가

내가 자장면에 의문을 품은 것은, 영화 ‘북경반점’부터였다. 본디 배창호 감독이 하기로 했었는데 난항을 겪다가 단편영화에서 출중한 실력을 드러냈지만 충무로에 본격 뛰어든 이후로는 박찬욱, 봉준호처럼 삼류 저질 감독으로 전락한 김의석이 이 영화를 연출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반문을 하게 되었다. 과연 무엇이 정통이란 말인가. 정통은 혹 조작된 신화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영화나 자장면이나 정통이란 조작된 신화 기원에서 찾기보다 현상적인 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와 자장면 실존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인기를 끄는 옛날자장을 생각해 본다. 옛날자장이란 배고플 때 싸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었다. 마치 군대에서 몰래 라면을 끓여먹던 그 라면 맛인 게다. 하지만 오늘날 맛을 추구하는 이들은, 조작된 정통을 숭상하는 것이 진정한 식도락가인양 화교가 하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특별한 자장면을 강조하지만, 뭔가 논점에서 일탈했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 오히려 한국 자장면 유래를 살펴 볼 때, 정통적인 노선이란 현대 한국인 입맛에 맞게 끊임없이 변형을 가하는 것이다. 가령 오늘날 아이들이 이태리 피자를 좋아한다면 이태리 음식 맛을 가미하는 것이다.
 
역으로 이태리 피자와 한국 피자가 다르기도 하다. 이태리에서 먹어본 정통 이태리 피자는 단 맛이 덜 하였으며, 재료 맛을 살린, 한국의 빈대떡과 같았다. 이처럼 자장면은 전통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한국인 입맛에 맞도록 변화하였기에 사랑받는 것이다.
 
춘천에는 맛집으로 유명한 중국집이 몇 있다.

춘천 회영루에 간다. 춘천에는 맛집으로 유명한 중국집이 몇 있다. 그중 회영루를 택한 것은 화교가 운영하는 몇 안 되는 곳이며, 시내 중심가에 있으며, 무엇보다 굴짬뽕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길가에 있었지만, 찾기가 어려웠다. 해서, 골목길에 있는 줄 알고 골목길로 들어가 한참 헤매다가 나왔는데 춘천고 옆이었다. 돌아서 나오다 주차장이 보이는데 회영루 주차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다행이다 여겨 얼른 주차를 한 뒤 나오는데 나타샤가 말한다.
 
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인데... 아니나 다를까. 겨울연가에 나왔던 데다. 계단까지 마련해놓았다. 신이 난 나타샤를 일단 밥 먹고 다시 오자고 간신히 설득하여 회영루로 갔다.

회영루를 들어서니 중국집 분위기가 물씬 났다. 주인을 척 보아도 화교다웠다. 우리는 굴짬뽕, 삼선짬뽕, 유미자장, 자장면을 각각 시켰다. 역시 자장면이 가장 맛있었다. 평범한 데에 진리가 있다!
 
반면 굴짬뽕, 삼선짬뽕, 유미자장은 상대적으로 비싼 만큼 맛있다고 하기에는 웬 일인지 말하기가 꺼려진다. 마니아들이 그토록 극찬을 하였는데 무슨 일일까. 내 부족한 소견으로는 한국적인 양식, 즉 비빔밥적인 균형이 무너진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음식은 그 자체가 퓨전이라 여겨 본다. 흔히 한국 음식을 보양식이라 하는데 하나하나 따지자면 별 게 아닐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보양식이 되는 이치가 있다. 요소를 중시하여 코스로 정해져 있는 서양 음식과 달리 한상으로 나오는 것이 한국 음식이 아니겠는가.
 
체질에 따라 약초도 독초가 된다는 것이 한국적 한의학 요체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균형을 잃고 어느 맛을 특별히 강조한다면 마니아적인 찬사를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독자적인 맛이 없다.
 
한국적 퓨전을 도무지 느낄 수가 없는, 아무런 예술적 감각이 없어 보이는, 삼류 저질 영화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도대체 이따위 것들을 영화랍시고 만들어대고, 평론을 해대는 족속들이란 참으로 걱정되는 것이다. 기껏해야 연쇄살인마들을 위한 가이드 따위나 해대는 것들을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삼류저질감독들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있었다. 그가 cia에 의해 중점 키워진 작가라는 음모론이 있다. 대륙 진지한 작가들을 견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다. 그처럼 오늘날 미국 헐리웃에서 짐짓 환호한다면, 나와 같은 이들의 주장은 그저 묻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가령 조승희와 같은 사건이다. 과연 진범은 조승희였던가. 또한 데리다 사후에 벌어진 미국 언론의 촘스키 찬양 따위이다. 백위권 바깥 영향력을 지녔던 촘스키를 어느 순간 부각시키는 미국 언론을 보면서 나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프랑스를 죽이고 싶었고, 영국 좌파보다 더욱 좌파적이었던 시라크를 무너뜨리고 싶었을까. 그만큼 데리다가 증오스러웠던가. 비록 내가 프랑스 국수주의에도 넌더리를 내는 편이기는 하지만, 미국 애국주의, 특히 아슈케나짐 유대자본의 천박함만큼 하겠는가 싶은 게다. 대체 그대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우리 인간이 개돼지처럼 살기를 정녕 원한다는 말인가.

나는 이러한 대목에서 이상하게 인종주의를 느낀다. 헐리웃에서 동양적인 것에 대해 마치 근대유럽이 유대인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시선 말이다. 질투와 배제의 시선 따위들. 왜 헐리웃은 삼류 저질 감독들을 주목할까.
 
나는 이것이 오늘날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한국 민중의 이해와는 전혀 상관없는 대통령을 우리는 지난 이십여년간 겪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투표권이 있으며, 또한 영화를 볼 자유가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회영루에 대한 실망을 가득 안고 춘천고로 향하는데, 봉고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선다. 일본 여성들이 내린다. 아, 겨울연가 마니아들이다. 그렇다. 사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길지 않은 인생, 사랑만 해도 부족하다. 사랑하다 죽을 인생들이여.

우리 인생에서 삼류 저질 폭력 사이코 패스들이 사라지는 날을 정녕 소망하며, 우리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라며, 화천으로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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