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삼절, 직소폭포 기생 '이매창'

[송기옥 칼럼] 10승지지 변산반도 부안에는 송도 3절 대신에!

송기옥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08/17 [05:29]

부안의 삼절, 직소폭포 기생 '이매창'

[송기옥 칼럼] 10승지지 변산반도 부안에는 송도 3절 대신에!

송기옥 칼럼니스트 | 입력 : 2012/08/17 [05:29]
변산반도 부안은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경치가 빼어나 예로부터 십승지지(十勝之地)라 부른 갖가지 문화가 숨 쉬는 명승지다. 요즘 격포해수욕장을 비롯한 변산,고사포,상록,도청,위도 등 6개 해수욕장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서객들이 끝없는 칠산 바다 수평선 너머 피안(彼岸)을 향하여 청춘 남녀들은 꿈과 희망에 찬 낭만을 즐기고 있다. 변산반도는 바다만이 아니라 산도 아름답다.
 
▲ 직소폭포의 겨울/94x62cm/한지에 수묵담채/2010(송기옥 선생 제공)    

 
희대의 염문 뿌린 송도 3절 황진이가 있다면 부안에는...
 
부안에는 '부안 3절'이 있다. 고려의 옛 서울 송도의 3절 즉 서경덕 벽계수와 염문을 뿌렸던 황진이는 잘 알려져 있지만, 부안의 3절은 그렇게 많이 아는 이가 없다. 송도의 3절인 박연폭포와 황진이, 황진이의 교태에 암하노불(岩下老佛)같은 30년 수도승 지족선사(知足禪師)는 파계 당했으나, 세상의 부귀영화도 다 버리고 처사(處士)로써 주자(朱子)의 모방 없이 독창적이고 사색적인 성리학을 연구하여 이이(李珥)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선생을 존경한 황진이...

부안의 3절로 직소폭포와 기생 이매창과 지포(止浦)김구(金坵1211-1278)선생을 들고 싶다. 박연폭포(朴淵瀑布)는 일명 城山폭포라 하여 황해도 개풍군 북부 천마산에 있는 높이40m폭포다. 이에 비해 부안의 직소폭포는(直沼瀑布)는 30m로 내소사 뒷산 관음봉아래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봉래구곡(蓬萊九曲)을 이룬 폭포로써 갖출 것을 다 갖춘 변산의 제1경이다.

하얀 옥구슬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실상용추(實相龍湫) 폭포 밑에 가면 올 같은 폭염을 말끔히 식혀주며 그 아래로 옥녀담(玉女潭) 3단 폭포와 나무꾼과 선녀 얘기가 숨겨진 검은 바위가 수 억겁에 파여 만들어진 선녀탕(仙女湯)에서 흐르는 맑은 물은 부안호 1급 식수원의 근원지다.

송도의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재색과 한시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에 쌍벽을 이룬 부안의 명기 이매창(李梅窓1573-1610)역시 한시(漢詩61수)와 거문고와 가창에 뛰어나 당대의 이름난 학자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과의 교분이 두터웠으며, 매창이 38세 젊은 나이로 죽자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란 시를 지어 그 당시 있을 수 없는 천한 기생에게 바칠 정도 였으며, 4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매창의 시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매창에게 파계 당한 정인 유희경(劉希慶1545-1636)은 지체가 낮은 노복출신인 천민이었으나 시문을 잘한 충직한 사람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해에 잠시 만났으나 1,592년 의병을 모아 전쟁에 나갔다.
 
매창은 아마도 정인을 사모하는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 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유명한 시를 남겼다. 여기서 유희경을 부안의 3절로 세우는 이도 있지만, 나는 송도의 충신 정몽주와 대등 할 만 한 국난을 극복한 고려 원종 때의 지포 김구선생을 들고 싶다.

지포 선생은 12세에 진사시(進士試)와 같은 조사시(造士試)에 합격한 신동(神童)으로 고종19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판관,한림학사,보문관 태학사에 이르렀으며 원나라 다루하치(達魯花赤)에 간신배들이 붙어 국왕에게 예를 올리지 아니함에 이들 권세에 눌려 아무도 나서지 못했는데 김구 만이 이들을 탄핵하여 예를 올리게 하였으며,

1,263년(원종4년) 원의 세조 홀필렬(忽必烈)은 고려 조정에 인질과 병정과 처녀를 징발하여 바치라는 명령에 왕을 비롯한 문무백관이 무서워 벌벌 떠는데, 오직 김구선생만이 목숨을 걸고 홀필렬에게 ‘그 같은 가렴(苛斂)에는 순응 할 수 없노라’는 표문을 지어 보냈는데 원 세조는 김구의 충정어린 담대한 문장력에 감동한 나머지 오히려 양 500마리를 포상하였으며, 나라를 위기에서 건진 보기 드믄 충신이었다.

지포 선생은 1,278년 고려 충렬왕 4년 68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는 그의 높은 학문과 국난을 위기에서 극복한 공적을 기려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지금의 변산면 지서리 지지포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사당에는 지포 문집과 묘소와 공적비가 보존되고 있어 부안군민과 그의 후손들은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유서 깊은 고려의 475년간의 도읍지 송도의 삼절에 어찌 지포 (止浦)김구(金坵)같은 고려인의 충절과 얼이 숨 쉬는 부안 삼절의 인물로 삼지 않을 까. 비록 멋스럽고 사치스런 기녀와의 염문(艶聞)은 없었지만...


 <브레이크뉴스> 전북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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