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개혁의 의미' 2013년 종교개혁의 달에...

이기영 목사 | 기사입력 2013/10/19 [04:48]

'자기개혁의 의미' 2013년 종교개혁의 달에...

이기영 목사 | 입력 : 2013/10/19 [04:48]
1.
 
<Total Woman>이란 책의 저자 모건 여사의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모건 여사가 결혼을 하고 살아본즉 남편의 일상생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생활을 통해서 남편의 성격을 바꾸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침이면 늑장을 부리는 남편을 흔들어 깨워서 출근을 재촉했습니다. 또한 그날의 해야 할 일들을 낱낱이 적어서 지시하고, 꼭 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당부하였습니다. 퇴근 후에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건 여사는 자기의 성격까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부부관계가 파멸에 이를 것 같아…’ 그녀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남편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스스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에는 전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났습니다. 남편이야 일어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앞의 본분을 다했습니다. 저녁에는 남편이 일찍 돌아오든 말든 자기는 자기대로 정성껏 남편의 귀가를 대비하여 준비했습니다.
 
혹 남편이 밤늦게 돌아오는 일이 있어도 그 이유를 묻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 설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자기편에서 생각을 고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렇게 생활해 나가느라니 남편의 생활태도가 서서히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로 소문나 있습니다. 밖에서 돌아오는 남편에게 다짜고짜 물 한양동이를 덮어 씌울 만큼 괄괄하고 사나운 여자였습니다. 스승의 이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제자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스승님, 그렇게 지내지 마십시오. 차라리 이혼하시고 다른 좋은 여자분을 만나 사시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쎄…나도 내 아내의 불손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나는 수양이 부족한 사람일세. 만약 지금의 아내가 내 곁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오히려 내 마음을 닦고 수양할 기회를 잃게 되는 셈이지. 그러니 아내는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일세.”
 
2.
 
우리는 ‘개혁’이란 말을 쉽게 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개혁이고, 어떻게 개혁을 할 것이냐, 나 자신이 개혁해야 하느냐, 혹은 상대편이 개혁을 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무엇을 위한 개혁이냐 즉 무엇을 구체적으로 바꾸어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개혁의 목적이 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 가령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할 때, 교회개혁의 목적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바른 신앙인이 되기 원하고, 바른 교회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개혁자는 나 자신부터 스스로 개혁(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바꾸어지기를 바라는 것보다 나 자신부터 스스로 바꾸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자기개혁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고 변화해가는 것이 곧 자기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인(성숙한)입니다. 그러니 누구의 권면 충고보다는 자기 스스로 발견하고 변화되어가고 일을 만들어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개혁이라 할 때 몇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 개혁적 의식과 역사가 모든사람에게 적용되고 확산되어 나가야 합니다. 나라의 개혁을 말할 때, 어느 정치집단, 지도자들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고 개혁되어야 합니다. 남의 개혁만 구경하고 있다면 거기서 멈추고 말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신앙인의 자세와 삶이 바르게 정립되고 변화된 새로운 삶을 추구하며 실천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
 
10월은 종교개혁의 달입니다. 종교개혁의 깊은 의미를 잘 깨닫고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세계문제를 고민한다든가, 인류를 염려한다든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해서 종교개혁을 주도해 낸 것이 아닙니다.
 
즉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세계변화를 지향하면서 외친 구호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마침내는 정치개혁도 이루고, 문화개혁도 이루고, 사회개혁도 이루고, 세계마저도 개혁했습니다. 본래 이 종교개혁의 역사가 그렇게 거창하게, 세계지향적으로 시작했던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개혁은 한 크리스천의 진실한 신앙적 고민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한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믿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래가 믿었던 신앙인입니다.
 
더욱이 수도원에 들어가 하나님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평생을 헌신하기로 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 한 사람의 심령 속에 이루어진 변화가 그 인격과 그 생활을 바꾸고, 나아가 세계를 바꾸어 놓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4.
 
루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한번 회상해 보겠습니다.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Margarethe Lindeman)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Erfurt)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 후 1505년 여행도중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 친구가 죽는 일을 당한 후 소명을 받아 같은 해 에르푸르트의 어거스틴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508년 비텐베르크 대학(Wittenberg)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이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것임을 재발견하였습니다. 이 결과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루터의 95개조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습니다.
 
1521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의회에 소환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한 후,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의 영주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그성에서 숨어 ‘융거 게오르그’라는 이름을 가진 귀공자로 변장해 지내면서 신약성경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습니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저술에서 사제직과 수도생활, 공로, 교계제도, 고해성사를 거부하였습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경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습니다.
 
한편 1521년 말부터 사회혁명가이자 종교개혁자인 토마스 뭔처를 비롯, 루터의 영향을 받은 과격한 종교개혁가들이 줄기차게 등장하여 사회적 혼란은 더욱 심화되어 갔습니다. 특히 1524년과 1525년 사이에 토마스 뭔처 등의 지도로 일어난 농민혁명에서 루터는 처음에는 농민들의 편을 들었으나, 제후들의 착취에 대항하는 농민들의 혁명활동이 점점 과격해 짐에 따라 결국 태도를 바꾸어 제후들에게 폭력진압을 촉구함으로써 농민들의 혁명은 잔인한 탄압으로 진압당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루터의 영웅적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주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스레벤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은 칼빈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운동과 함께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점으로 되었습니다.
 
5.
 
루터는 에르푸르트의 어거스틴회 수도원에 있었습니다. 수도원에서 그가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돈을 번 것도 아니고, 남자 수도원이라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죄를 지을만한 사건이 없었는데도 수도원에 있는 루터는 죄로 인해서 고민합니다.
 
언제나 루터는 ‘내 죄, 내 죄, 말씀, 말씀’하며 살아 갑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도대체 루터가 고백한 죄가 무엇인가, 궁금해서 그 옛날 루터가 고백했다던 죄가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보았는데 그것은 별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부가 그저 마음으로 짓는 죄입니다. 의심하는 죄, 절망하는 죄, 세상으로 기우는 죄, 특별히 시기와 질투하는 죄…참으로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루터는 그 죄가 고민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당시 어거스틴회 수도원장 요한네스 폰 슈타우비츠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였습니다. 아침에 가고, 점심에 가고, 저녁에 가고….어떤 날은 20여 회를 찾아 갔다고 합니다. 가자마자 문을 두드려 슈타우비츠에게 “내 죄를 고백하겠습니다.” 하며 한참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나중에는 슈타우비츠는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루터야, 죄 좀 모았다가 가져오너라” 하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루터는 죄로 괴로워 했습니다. 견딜 수 없어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때는 죄 같지도 않은 것들입니다. 고해 받는 슈타우비츠 원장은 들으면서도 “그런 것이야 죄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을 죄로 생각했기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슈타우비츠 원장은 몸부림치는 루터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사색하지 못하게 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성부께서는 너무나 고귀 하시다-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기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리스도의 상처 속에서 이해되고 발견될 수 있으며- 그 외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6.
 
여러분, 우리에게도 마땅히 이런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자기자신의 죄, 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안타까워하는 자기고민과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요, 사회의 죄가 아니요 세상의 부정부패에 앞서서 내 죄가 먼저 해결할 수 있도록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사회와 나라를 위한 일도 참여하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 받으실 때 친히 올라가셨던 계단이 있습니다. 훗날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녀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 예수께서 올라 가셨던 그 빌라도 법정의 계단을, 예루살렘에서 뜯어다가 로마(Rome)에 옮겨 놓았습니다.
 
로마의 성 계단교회에 가보면 정말 나무로 된 그때의 계단이 있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계단이라고 해서, 여기를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회개하면 죄를 깨끗이 사함 받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2천년 된 이 계단을, 그 당시로 말하면 1500년이 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엉금 엉금 기어서 올라가고 내려오고, 또 올라가고 내려오고… 그러나 아무리 오르고 내려도 이로 말미암아 죄사 함의 확신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릎으로 그 계단을 기어오르던 루터의 귀에 번개처럼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루터는 정신이 번쩍 납니다. 익히 읽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늘 듣던 말씀이 그날 새롭게 알게 됩니다. 새로운 뜻으로 들려 옵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습니다. 저 위대한 종교개혁은 바로 이 순간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이 있기 전에 루터의 자기 개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의를 다 부정한 것이요, 의롭다고 하는 많은 노력까지도 포기한 것입니다. 죄인이 행하는 모든 선행은 공로가 될 수 없고, 죄인 된 관계에서는 어떠한 의도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그럴 때에 그 속에서 비로소 개혁(Reformation)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자기개혁(Self-Reformation), 이것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은혜라는 것을 또한 알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오심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하라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하는 길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길로 가는 것이다”라고 유명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 길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긍휼로, 오직 은혜로만 갈 수 있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오직 은혜로’라는 말이요, ‘오직 은혜로’라는 말은 ‘오직 긍휼로’라는 말입니다. 곧 그 은혜와 그 긍휼을 그대로 내가 수용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터에게는 ‘믿음’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평생 믿던 그리스도였지만 그 그리스도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2천년 전의 예수가 아니요, 바로 오늘의 예수님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예수가 아니요, 바로 내 생명에 직결된 예수입니다. 내 죄를 짊어지신 분, 사해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사망과 사탄과 율법과 진노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그 엄청난 새로 난, 중생된 자유와 체험을 가진 자로 살게 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으로 살게 됩니다.
 
7.
 
본문 말씀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갈2:16) 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오래 전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사건이 오늘 내 사건으로 여기 내게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다”- 나는 율법을 향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은혜 안에서 내 모습이 새로 태어난 것을 체험합니다. 십자가를 향한 내 마음에 새로운 변화(transformation)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거룩하고, 의롭고, 온전히 겸손하고, 온유한 하나의 그리스도인 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직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직 말씀”이 개혁교회의 표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홀로 섭니다. 이것이 ‘만인 제사”입니다.
 
여러분, 자기 개혁을 바랍니까? 나 아닌 다른 사람에 앞서서 먼저 나 자신부터 변화되는 귀하고 중대한 역사가 여러분 앞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이웃이 변화되고 세상나라가 개혁해가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실을 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출처]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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