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독교인으로 독실한 예수님 숭배자 '간디'

[목회자 칼럼] 복음과 교회는 전진한다

이기영 목사 | 기사입력 2013/11/09 [09:38]

비기독교인으로 독실한 예수님 숭배자 '간디'

[목회자 칼럼] 복음과 교회는 전진한다

이기영 목사 | 입력 : 2013/11/09 [09:38]
우리가 간디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은, 인도의 독립운동사에서 최초로 인도민중을 하나로 단결 시킬 수 있었던 그의 위대한 지도력입니다. 독립직후 국민회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부패의 길로 들어 갔을 때 끝까지 부패와 투쟁한 청렴함,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꼬무날리즘(communalism 혹은 종파주의, 분파)과 투쟁하다 암살당한 위대한 인물입니다.
 
인도의 정신적 민족적 지도자였던 간디는 독실한 예수님 숭배자이면서도 정작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숭배하면서 왜 전형적인 교인이 되지 않고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까?’
 
간디는 그럴 때마다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싫습니다.’ 깊이 새겨 들어야 할 말입니다.
 
간디가 교회에 나가지 않은 이유 가운데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간디에게는 영국인 선교사 친구가 여럿 있었고 실재로 친구들 그룹을 통해 성서와 기독교공부도 많이 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전도를 받고 설교도 듣고 성서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간디가 영국 런던 유학 중에 있을 때 어느 주일에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지기가 그를 유색인종이라고 밖으로 내 쫓았습니다. 그 후로 간디는 교회에 다시 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간디는 기독교 국가인 영국과 유럽의 여러나라들의 식민지 정책과 약소국에 대한 침략행위란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정신에 위배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고 교회로 교회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기초로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체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업적과 위대성을 기억합니다. 당시에 그들은 교회에서 잊혀진 말씀과 복음의 진리를 다시 천명 하였으며, 교회를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그들이 천명한 진리는 성경의 존엄과 권위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 그에 대한 믿음과 능력, 세상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참된 교회에 요구되는 겸손과 용기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가 교회 안에서 순수하게 가르쳐지며 올바른 순종 올바른 삶 올바른 교회 형태를 원하였습니다. 개혁자들은 복음적인 교회란 그리스도의 진리를 순수하게 가르치는 곳에 존재하며 교회는 모든 생활을 이와 같은 하나의 임무에 맞추고 판단하는 곳에 존재한다고 여겼습니다. 아울러 교회란 자신의 원형(formation)에 따라서 항상 새롭게 ‘개혁’(reformation) 된다는 말입니다.
   
신약성서의 교회는 ‘성령의 친교’로 살아있는 공동체를 창조합니다. 성령의 친교는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난 새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삶과 고난, 죽음과 부활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이 말씀에 응답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계사의 한복판에서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말과 삶 속에서 자신들의 행위와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독일의 순교신학자 본 회퍼는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 공동체로 실존한다’고 말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셔서 일하게 하시니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존(presence)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고 하는 것 모두가 다 우리에게 긴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람들을 고용해 역사하시고, 그가 그의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와 함께 역사하셔서 우리로 교회를 이루어가게 한다고 고백 합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고 그렇게 믿기에 감사하며 은혜라고 함이 옳습니다. 우리가 한일은 심히 적으나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신 것이 크기에 어찌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끌려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초대교회가 특별히 무엇을 굉장히 해서 구원받는 자가 더해 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교회입니다. 성령의 친교로 그들은 유무상통하였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고, 온 교회가 사랑으로 넘쳤고,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회적인 상황은 박해와 고난의 현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에 핍박이 있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예수 믿으면 잘 살고 행복하고 번영하고 그래야 되겠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정직하게 깨끗하고 평화롭게 예수님을 잘 믿었는데, 야고보는 순교하였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박해 때문에 초대교회는 난민, 피난민이 되고, 이산가족이 되고, 재산을 몰수 당하고 이리 저리 쫓겨서 다른 나라로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흩어져 머무는 곳에서 복음의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흩어지는 것은 강압적이었지만, 두루 다니며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은 자발적이었습니다. 사회적 정치적인 상황이 내몰아 낸 핍박의 기회를 복음 전파와 선교의 기회로 사용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초대교회를 통하여 큰 역사, 믿는 사람이 수가 더 많아지게 하는 구원의 역사 복음의 진리 확장의 역사를 이루게 한 것입니다.
   
이 박해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핍박하던 괴수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사울은 변화를 받고 180도의 대전환을 한 바울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전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중생의 역사, 거듭남의 역사가 있어야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하는 것 transforming 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바르트는 ‘한 사람이 중생되어 새 사람이 탄생하는 것은 천지창조의 역사에 못지 않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새 사람의 탄생과 함께 그의 인생관, 그의 세계관, 그의 습성, 그의 삶의 태도, 그의 가치관이 확실히 달라지는 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 내용이고, 교회가 수행할 역할이며 그 사명과 능력을 주님께서 교회에 위임하여 주셨습니다.
   
교회는 또한 변화된 새 사람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은 핍박자가 전파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믿지 않고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구, 저 사람 또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저 짓을 하나, 왜 교회에 들어 왔나?’하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나서서 이 문제를 중재합니다. 바울의 덕이나 인격, 명성 때문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바나바의 화해의 신앙과 의지적 결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역사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바울을 선택하고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바울을 통해 이방에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자 강제로 붙들고, 이방의 군왕과 나라들에 복음진리의  증인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습니다. 바나바의 중재로 교회는 이것을 믿고 바울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크게 성장 성숙하여 갔습니다. 교회가 용서하는 공동체로 열려 있을 때 복음과 교회는 전진합니다.
   
‘용서는 심리적 그리고 정신적 염증을 위한 항생제’(Antibiotics for psychological and mental infection)라고 용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말합니다. 용서가 정신적 염증을 치유하는 항생제라면 용서가 있는 곳은 언제 어디에서나 치유가 나타날 것입니다. 용서는 세상에서 가장하기 힘든 것이요 또한 인간이 성취한 가장 위대한 것 중의 하나임에 틀림 없습니다.
 
용서하는 것은 인간의 두뇌로 하기 보다는 인간의 영적 능력 입니다.영적인 존재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용서는 모든 용서의 원형(archetype)이요 본질입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은 우리는 좀더 진지한 태도로 용서를 실천할 수 있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산다는 것은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이고, 그 때에 복음과 교회는 더 많은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며 전진할 것입니다.
   
제2 이사야 선지는 바빌론 포로가 된 유대인들을 위로하며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한 사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전파의 내용은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새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둠에 거하고 있는 백성에게 새 날이 동터온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포로들은 구원이 이르렀음을 들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들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마치 뒤에는 지옥과 공포만이 남겨진 것 같겠고, 태양이 찬란하게 비치는 정상에 올라가 하나님의 나라 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제2 이사야의 예언이 신약의 복음과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성이란 복음이 각 역사마다 각 개인과 민족에게 요구하고 있는 특정한 내용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지만 복음의 내용이란 그 복음이 삶에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합니다. 구속의 은총,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실천, 사랑과 기쁨과 진실의 구현등이 하나님나라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나타나는 부름에 대답하기 마련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출애굽은 그가 가진 복음의 역사성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건설에 있어서, 예레미야는 그 이스라엘의 파멸에 있어서 각각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계의 유엔’ 격인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가 10월 30일-11월 8일 기간에 부산 벡스코에서 열렸습니다. 개신교사상 최대규모의 국제행사에 140여 개국 349개 교단이 참가하였습니다. 제1.2차 세계대전 후 1948년 창립한 WCC는 개신교단과 정교회, 성공회 등 교단소속 신자는 5억7천만 명에 이릅니다.
 
국내에선 예장통합, 감리교, 기장, 대한성공회가 가입되었습니다.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입니다. 한국에서 열리는 WCC의 역사적 의미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분단 이데올로기로 고통 받는 남북한 현실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계기입니다. 세계사의 비극적 결과인 분단을, 외세가 아니 남북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세계교회가 마음을 합해 돕는 것은 지당한 일일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한국교회에 주어진 복음의 역사성에 부합되는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복음 전파를 위한 구조적 변화라는 점에서 입니다. 그리고 가난과 폭정과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북한의 형제자매를 해방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입니다.
 
전쟁과 갈등의 위험으로 가득 찬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을 불어넣는다는 뜻에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매우 기독교적이고 복음의 역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 나눔의 증진은 상생의 원리에 토대를 둔 것이어야 합니다.
 
한반도 평화협정은 남북간의 평화공존을 제도화하고 이러한 변화를 국제사회가 보장하게 하는 중대한 목적을 갖습니다. 물질의 나눔은 보다 풍요한 남한 측에 부여된 특히 교회에 부여된 소명입니다. 독일의 교회가 디아코니아회사를 설립하여 동독의 형제들을 구제하여 왔던 것처럼, 남한의 교회도 은밀히 혹은 공개적으로 북한의 인도적 지원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성경에 십일조란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외국인들을 위해 쓰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대략 매년 1조 2천억원(2005년 통계)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7천억원을 교역자들과 사역자들의 생활 영위와 농어촌 특수선교 및 국외선교를 포함합니다.
 
나머지 5천억원을 반으로 국내외의 일상적 구제에 절반을 쓰고, 나머지 절반은 북한동포 돕기에 쓰면, 즉 2천5백억원 정도를 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한반도 평화 정착을 준비하는 복음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깊숙히 침투한 세속적 성공 제일주의 방식의 신화를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하나님의 품성으로 대체하지 않는 한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서 해방 받고 자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평신도 신학의 아버지 크레머는 ‘평신도는 오늘 교회 안의 사장된 자산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즉 굉장한 힘을 가진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 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장된 인력(men power)를 충분히 활용할 때 교회는 놀라운 역사를 감당해 가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현장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일터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복음과 교회는 전진 합니다. 교회의 개혁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는 절망적인 현실을 돌파하면서 우리의 역사적 과제를 안고 씨름하며 전진 하여야 합니다. 복음의 복음성을 자각하며 교회의 본래적 직임에 신실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정의와 평화, 진리와 양심의 보류로서 굳건히 서야 합니다. 복음과 교회는 전진 합니다.   
 
[출처]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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