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영적 스승 워싱턴DC '골든 코스비'

[목회자 칼럼] 내리막길로, 낮아지는 삶 (Downward Mobility)

이기영 목포중앙교회 목사 | 기사입력 2013/11/18 [05:38]

시대의 영적 스승 워싱턴DC '골든 코스비'

[목회자 칼럼] 내리막길로, 낮아지는 삶 (Downward Mobility)

이기영 목포중앙교회 목사 | 입력 : 2013/11/18 [05:38]
빌립보서 2장 5-11절은 예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명확히 알려 줍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의 역사 속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역사 속에 오셨다는 성육신(incarnation)은 기독교를 타 종교와 다름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예수는 낮고 천하고 어두운 곳에서 억울하고 부당하게 눌리고 시달리고 차별 받은 온갖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낮은 곳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는 그들의 구원자요, 모든 죄의 사슬에서 자유케하신 해방자입니다. 인간 구원과 해방은 바로 낮은 역사의 현장, 어두운 세속의 현장에서 일어난 기쁜 소식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노예들, 곧 로마제국의 절대다수에 해당하는 민중과 함께하는 연대의 기독론(Christology of solidarity)입니다.  
 
# 절대권력을 신성시 했던 로마제국 상황에서 이 뜻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자리에 황제가 들어 서는 그 어떤 이념과 체제도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은 절대화 된 권력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 라고 외쳐야 합니다.
 
초대기독교회사를 보면, ‘황제가 주님이다’(Caesar is Lord)고 고백해야만 했고,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살았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됩니다. 과연 누가 전우주의 보좌에 오르고, 역사의 진로를 좌우할 권세를 지니고 있는가? 황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예배와 황제의 숭배는 정면으로 충돌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로 말 할 수 없는 한가지는 ‘황제가 주님이다’ 는 고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2세기 사람들은,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리스도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불타는 확신에 잡혀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았다는 감격적인 사랑의 행위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복리뿐만 아니라 눈길을 밖으로 돌려 이웃들의 필요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자들, 과부들,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감옥에 갇힌 자들, 유배 당하여 광산에서 노역하는 자들을 방문하였습니다. 또한 전쟁, 기근, 지진 속에서 구제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사역 중에, 기독교 신자들은 가난한 형제들을 위하여 장례를 맡아 치러 주었던 일입니다. 2세기 후반부터 로마와 카르타고의 교회는 자기들의 신자들을 위한 묘지들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중 가장 오래 된 것들 중에 하나가 로마시의 남쪽 아피안 가도(Appian Way)에 소재한 카타쿰(Catacomb)이었습니다.
 
눈 여겨 볼 부분은, 박해가 기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수천명의 관객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순교의 모습들을 지켜 보았습니다. “순교자”(Martyr)란 원래 “증인”(Witness)을 의미하는데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바로 이러한 증인의 모습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처형 당하는 바로 그 현장에서 개종과 회심의 결단을 내린 이교도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마음을 품고 있지 않고, 오히려 종교적 이기주의의 마음을 품고 있다면, 신자 수가 많고 교회의 수가 늘어나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온 힘을 기울여 우리의 삶과 신앙의 방향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도록 180도 바꾸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신 것을 보고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고백하면서 황홀경에 도취 된 적이 있었던바, 그 자세를 버리고 산 밑으로 내러 와야 합니다.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산 밑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해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그의 유명한 책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에서 종교의 본질은 ‘성스러운 것’과의 만남이라고 보고 거룩함의 체험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거룩의 실재와 접촉하는 때 보통과는 다른 경험에 휩싸입니다.
 
하나는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이요, 다른 하나는 ‘기쁨과 황홀감’ 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이란, 거룩 앞에 설 때, 인간은 덧없음의 존재라는 유한 의식, 부정한 존재라는 죄의식,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경외감을 말합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무(nothing), 먼지, 들의 풀잎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거룩한 자 앞에서 인간은 오로지 침묵하고 부복하며 경배를 하게 됩니다. 거룩한 힘에 압도 당하며 속된 존재가 부끄럽게 드러나며 심판 받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엄숙하고 고요한 중에 드리게 됩니다. 
 
‘기쁨과 황홀감’이란 거룩 앞에 설 때 인간은 말할 수 없는 환희와 은혜 충만의 감정에 휩싸입니다. 감사, 기쁨, 만족, 평화, 고양되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거룩 그 자체와 일치되는 체험을 가집니다. 그때 고양된 감정은 자연히 노래, 시, 찬양, 춤으로 격렬한 몸짓과 예술적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예배의 분위기가 감성적, 정렬적 몸 동작이 되면서 역동적 예배 분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신앙공동체, 성숙한 영적 공동체는,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과 기쁨과 황홀감의 그 두 가지 요소를 조화하고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바른 예배란 거룩한 실재가 현존하는 체험이어야 합니다.
 
이사야 6장1-7절은 거룩 체험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 줍니다. 청년 이사야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을 때, 성전 안에서 거룩의 임재 체험을 합니다. 이사야는 갑자기 성전 안에서 스랍들이 “거룩 거룩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 온 땅에 그 영광이 가득하시다”라는 영광송을 들었을 때, 문지방 터가 흔들리고 성전 안에는 거룩한 연기가 가득 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사야는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자 곧 죄 많은 백성 속에서 사는 한 사람 죄인이라는 사실을 느끼면서, 거룩한 분을 부정한 몸으로 대면 했으니 화가 되고 재앙이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 천사가 제단의 숯불을 하나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대고 그의 속된 입술이 깨끗해 졌음을 선언합니다. 
 
거룩 체험의 가장 전형적 기사로는 모세의 소명 이야기(출3:1-6)와 사도 바울의 소명 이야기(행9:1-9)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엘리야 등 예언자들과 베드로와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경험했고 증언을 했습니다.   
 
20여권의 저서를 낸 영성 신학자, 하바드 대학의 헨리 나우웬(Henry Nouwen)교수가 죽기 몇 해전 큰 충격적인 뉴스를 세상에 퍼뜨렸습니다. 세계적인 신학자인 그가 하바드를 사임하고 토론토 근교의 정신박약자와 신체 장애자 시설인 데이브렉(Daybreak)의 한 직원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바드의 명성과 보수를 버리고 정신박약자들의 행동교정과 용변지도, 저들의 식사, 세면, 옷 입는 훈련 등의 자질구레한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보수도 보잘 것 없는, 소시얼 워커(social worker)의 초년병들에게도 별로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세계는 의아해하며 잘 이해가 되지 아니하기에 각가지의 질문들이 나우웬 교수에게 쇄도했습니다. 신학자가 훌륭한 신학교육과 목사를 배출하는 것이 더 보람되지 않느냐는 동정과 아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우웬 교수는 번복의 뜻은 물론 없었고, 그 답변으로 <예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라는 작은 책을 냈습니다. “예수를 정말 아는 길이 무엇인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길이 무엇인가?” 등을 묻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 볼수록 그를 알고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성공의 길과는 다르지 않느냐는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길이란 오르막 길이 아니며, 결국 인생을 내리막 길로 살아봐야(Downward Mobility)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과 교훈은 세상의 낮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그렇게 살 때 예수를 바로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의 체험은 바로 이런 삶에서 온다는 확신의 간증입니다.
 
사실 성서의 모든 이야기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아래로 내려오시고 예수가 인간이 되어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지상으로 오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요 성서의 정신입니다.
 
진정 크리스천으로 크리스천의 영적인 삶을 추구하려 한다면 빌립보서가 보여주듯(2:5-8) 하나님의 본체인 그리스도가 동등 됨을 포기하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입고 사람들과 같이 되며 죽기까지 복종한 것처럼 따르는 것이 크리스천이요 크리스천의 영성입니다. 
 
나우웬 박사는 어려선 공부를 잘하는 천재소리를 들으며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하바드 대학의 교수가 되기 위해 정상의 길만 걸어 왔고, 또 이런 성공만을 위해서 살아 왔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그 동안 작은 성공의 외로운 정상을 향하여, 권력과 인기의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 길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옆에 앉은 정신박약자 청년 아담 군의 불구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리막 인생들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예수를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오르막 길에선 예수가 잘 보이지 않고 내리막 길에서만 예수가 잘 보이며,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며 “나를 따르라”던 그 복음을 통해서만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지금>(Here and Now)라는 소책자에서 현재를 잘살며(Living in the Present),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매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기쁘고 보람되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영원을 사는 것이라 합니다.
 
그는 가톨릭의 사제이지만 개신교 신학교인 하바드 대학에서 기독교 영성을 가르치고 기독교 영성에 관한 많은 저서를 출판하고 신 구교를 막론하고 영성 추구 자들의 독자를 많이 가진 저자입니다. 그가 고백하듯이 그 자신도 오랫동안 기독교 영성이나 영원 등을 이전에는 신령한 것과 죽은 뒤의 영원한 저 세상에서의 일들로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러한 생각이나 신앙은 변하여 ‘여기에서 지금’(Here and Now) 벌어지는 역사현장의 고난에 찬 일들이 더 소중하고, 기독교 영성이나 영원이란 바로 이러한 관심과 삶임을 깨닫게 됐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으로 사는 것이요, 오늘 역사 현장에서 사랑과 봉사의 삶이 없다면 그 어느 날의 영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과 이웃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여기고 인내와 기쁨으로 동참하며 함께 나누며 사는 것이 영원이요 영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생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여준 삶으로 세상 복판의 어떤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외면이 아닌 참여요, 그 문제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이 따를 지라도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바로 이러한 생의 자세와 신앙이 크리스천의 영적 신앙이요 삶의 자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최상의 삶은 하나님이 선물로 준 ‘오늘’(Today), ‘지금’(Now), ‘순간들’(Moments)을 지상 여기에서, 기쁨과 감격 속에 잘 사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에게 예수가 가르친 생의 우선적인 가치가 고루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의 생을 아름답고 보람되게 살았을 뿐 아니라 이세상에 더 큰 은덕을 끼치고 모든 사람에게 새 희망이 되게 하였습니다.
 
# 워싱톤에는 이 시대의 영적 스승 골든 코스비(Gordon Cosby)목사가 이끄는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무엇보다 ‘외적인 사랑 나눔’(The Outward Journey)으로, 일년 예산이 천만 불인데 75개의 독립 전문사역을 하고 있는 워싱톤의 빈민지역에서 참다운 섬김의 목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정식 교인의 숫자는 60년 가까이 오는 역사에 120명을 넘어 본일이 없습니다. 이유는 그 교회의 교인이 되려면 각자가 자기 전문사역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빈민지역 버려진 아파트를 개조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자립을 돕습니다. 그 지역의 어린이들을 위한 방과후 학교와 자립갱생을 돕는 알코올과 마약치료 센터가 있고, 직업전문학교를 열어 매년 평균 천명이 직업을 찾도록 하고 있습니다.
 
무숙자들을 위한 노인 아파트와 죽음의 길을 돌봐 주는 호스피스를 운영합니다. 워싱톤에서 빈민지역으로 손꼽히는 아담스 몰간지역 한 복판에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는 동상이 있고 바로 그 주변으로 이런 돌봄 사역의 센터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스비 목사는 하루도 몰간 타운을 떠나지 않습니다. 매일 오전 12시에 있는 기도회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거리에서 방황하는 무숙자가 찾아와도 그는 그 시간 그와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벌써 90을 넘어선 코스비 목사의 목회철학은 ‘헌신의 소명과 내적 경건, 외적 경건’(Call to Commitment and Journey Inward, Journey Outward)입니다. 바로 이 어른에게 영향을 받고 그 유명한 헨리 나우웬 신부가 하바드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장애인 선교에 생명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교회 산하 ‘섬김의 사역자 학교’(the Servant Leadership School)에는 전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이 와서 공부를 합니다.
 
골든 코스비 목사는 ‘21세기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가 무엇인가요?’라는 대답을 ‘진실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Being an Authentic Self)라고 한마디로 정리해 줍니다. 오늘날 미국 교계에 깊은 영성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 그 어른이 ‘진실된 존재’가 되는 것이 오늘날 크리스천의 과제라고 정리해 줍니다.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 앞에 진실된 존재가 되지 못하고는 우리는 아무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고 계속 말씀합니다.
 
그리고 코스비 목사는 그 교회의 명성과 영향력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작은 교회가 되려고 한다.’(Committed to Smallness)라고 정리합니다. 교회 확장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목적이기에 120명이 넘어서면 그 교인들 가운데 소 그룹을 떼어 따로 예배공동체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장공 김재준목사는 스무 살에 승동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김익두목사의 설교를 듣고 나서 “가슴이 뜨겁고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정열을 불태우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장공을 신앙적으로 사로잡은 것은 주로 청빈의 영성을 살아간 성 프란시스, 톨스토이, 하천풍언 등을 순례하면서 청빈과 경건을 익혔습니다.
 
일본과 미국을 돌며 새로운 신학사조를 설렵하신 후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안고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길을 달려 갔으며, 죄악의 역사를 속량키 위한 투쟁의 삶에 온 몸을 던지며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생명, 평화, 정의’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신 하나님나라의 내용이자,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할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그것은 장공의 신학적 비전이자 신앙의 목표였습니다. 그는 이 비전을 안고, 식민과 독재의 수렁에 빠진 민족의 역사에 뛰어들었고, 타계주의와 교리적 근본주의에 빠진 바리새적 종교정신에 맞서서 양심과 신앙의 자유수호투쟁을 벌였습니다.
 
한국교회를 개혁교회 전통에 세우는데 헌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6:33)고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삶이었고, 그 삶은 우주의 속량을 꿈꾸는 드넓은 신앙정신이 약동하는 삶이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된 존재’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실된 존재가 된 그리스도인, 이는 곧 자기존재의 옹근 인격의 열매, 즉 사랑과 정의, 진리와 평화를 만들어가는 헌신의 사역을 하는 책임적 존재로서의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새 생명으로, 진실된 존재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가는 것입니다.
 
박해 중에서도 이웃사랑의 사역을 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적인 신앙과, 오르막 길이 아닌 내리막 길로 살아 봐야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오늘 진실된 존재의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님나라 운동에 헌신하시며 사시는 이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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