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 50년, ‘따이한 제사’를 아십니까?

[특집연재 1] 베트남전쟁, 그 속의 대한민국과 오늘

황윤희 기자 | 기사입력 2014/03/07 [05:57]

학살 50년, ‘따이한 제사’를 아십니까?

[특집연재 1] 베트남전쟁, 그 속의 대한민국과 오늘

황윤희 기자 | 입력 : 2014/03/07 [05:57]

[편집자주] (사)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지난 2월 13일부터 5박 6일 동안 구수정 씨가 이끄는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과 함께 ‘베트남 평화기행’을 진행했다. 평화기행은 전쟁피해자를 직접 만나고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꼭 닮은 역사를 가졌으나 비극으로 맺어질 수밖에 없었던 두 나라의 서글픈 이야기를 여기에 나눠 연재한다.  

 

▲ 반딩성 고자이 마을의 위령탑, 매년 2월 26일 이곳에서 위령제가 열린다.     © 황윤희


베트남에 ‘따이한(大韓, 한국) 제사’라는 것이 있다. 이름도 생소한 이 제사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을 위한 제사다. 베트남 인민들의 따이한 제사는 그래서 마을별로, 지역별로 한날한시에 열린다.

 

죽은 날이 같으니 온 동네가 집집마다 동시다발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제사를 지낼 사람이 남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온 가족이 몰살당한 집은 제사를 지내려야 지낼 수가 없다.

 

제삿날이면 마을 전체가 향 연기로 뒤덮인다. 자욱하게 가라앉은 연기 속,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를 추모하는 사람의 제례가 ‘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2월 26일, 빈딘성의 고자이 마을에서는 48주년 위령제가 열렸다. 이날은 고자이 마을에서 단 한 시간 만에 380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게 한꺼번에 학살당한 날이다. 그곳의 향냄새가 혹여 당신의 코끝에 날아오지는 않는가.

 

베트남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파악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에, 피해자 수만 9천여 명에 달한다(한홍구). 사망자들의 대부분은 갓난아이와 어린이, 노인, 그리고 여성들이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와 인민들이 확연히 밝히고 있는 이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정부는 학살 50년이 다 되어가도록 인정도,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그렇게 침묵으로 덮어질 수 있는 것인지 묻는 참이다.  

 

미국의 이면, 호치민시 ‘전쟁증적박물관’

 

꼭 반세기 만이다. 우리들의 평화기행은 대한민국이 1964년, 베트남에 처음으로 군대를 파견한 때로부터 정확히 50년 후에 이뤄졌다. 이전에 사이공으로 불리던 베트남 남부의 호치민공항에 발을 디딜 때, 그저 심란했다. 다가오는 역사의 무게가 녹록치 않았다.

 

아버지 세대의 치부를 보는 일은 후세대로서 외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 혹은 우리 세대와 영원히 무관했으면 하는 바람은 절대적으로 그릇되며,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숨을 들이켰다. 열대의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미고 있었다. 우리는 왜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해 총을 들었어야 했나, 그것은 어떻게 기억되고 반성되어야 하는가? 질문이 솟구쳤다.

 

 

▲ 호치민시에 위치한 전쟁증적박물관     © 황윤희


 

13명의 평화기행단은 호치민시의 전쟁증적박물관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매, 작은 체구의 그 여성이 바로 베트남 관련 문헌을 읽을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던 구수정 씨였다. 그녀는 한국이 베트남과 외교를 수립한 1992년, 그 다음해 베트남에 건너갔다가 현지에 수많은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증오비라니! 그런 비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지구상 어딘가에 우리를 증오하고, 그 증오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물이 서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인민들이 가난한 가운데도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라니! 그 증오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가 기억하리라!’ 누군가의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살 떨리는 경험이다.

 

아마 구수정 씨도 그러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 이후 그녀의 일생은 크게 방향을 튼다. 그때부터 베트남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한국의 베트남 파병과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게 된 것이다. 한국이 감추고 싶은 역사, 감히 드러내기 주저되는 역사를 알고 또 알리기 위해 이 여성은 지금껏 홀로 일생을 바치고 있다.

 

현재 ‘아맙’의 본부장으로 있는 구수정 씨의 설명을 곁들여 전쟁증적박물관을 돌아보았다. 박물관은 한마디로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거대한 기록물이었다. 박물관에는 전쟁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찢어진 사지가, 폭격과 고엽제로 초토화된 땅이, 또 사산한 태아의 사체가 전시되어 있었다.

 

전쟁의 참상과 침략군이 저지른 온갖 만행이 적나라하게 전시되어 뒷골이 댕기고 얼굴이 뜨거웠다. 자유와 정의의 대명사인 ‘미국’,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라는 나라의 숨겨진 이면을 이토록 대놓고 드러내놓고 비판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건 어쩌면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 베트남의 힘이었다.

 

우리 일행이 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독립선언문이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사지가 찢기고 온몸이 꺾인 사진들 앞에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전시해놓은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은 그것을 통해 이렇게 반문하고 있었다. - 보아라, 이것이 너희가 믿는 진리이나 너희는 실제에서 그를 어떻게 실현했는가? 너희가 말하는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권’이 이 베트남에는 해당하지 않았던가?

 

 

▲ 호치민시 전쟁증적박물관에 전시된 미국의 독립선언문     © 황윤희

 

 

이는 미국과 미국의 전쟁에 동참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이었다. 박물관에는 신기하게도 관람을 온 백인들이 많았다. 과거 자신의 조국이 한번쯤 제국의 역사를 가졌을 법한 그들은 이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전하는 수많은 침해의 기록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자신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다. 참혹한 사진들 앞에서 그들은 별 말이 없었다.

 

제국주의에 대항한 민족해방전쟁

 

베트남 전쟁은 당시 미국과 우리정부가 내세웠던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싸움’이라는 틀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미국과 한국정부가 표면에 내세웠던 명분일 뿐이다. 또한 그러한 설명은 냉전의 대립이 무의미해진 오늘날에 전쟁의 본질을 가리는 방편으로 기능한다.

 

박정희 정권이 내세웠던 ‘빨갱이 월맹(북베트남)의 침략을 물리치고 자유월남의 민주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빛나는 말잔치다. 남의 나라의 민주체제 수호를 위해 목숨 걸고 참전한 용사가 실로 얼마나 될 것인가?

 

오늘의 학자들은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제국주의에 대항한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쓰고 있다. 고 리영희 선생도 베트남 전쟁을 미국이 ‘반공 십자군 성전’이라는 허울 아래, 고의로 저지른 추악한 전쟁이라고 명료하게 밝힌 바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신들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체제를 구축하고, 자신들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베트남전쟁을 일으켰다. 베트남 남북단일정부를 구성하기로 한 제네바협정을 거부하고, 남베트남에 독자적인 반공정부를 만들고자 한 것은 미국이었다. 이에 북베트남이 독립과 통일을 위해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남베트남 정부를 공격하자, 미국은 도미노이론을 내세워 전쟁에 개입했다.

 

베트남에게 이 전쟁은 민족해방전쟁, 통일전쟁, 독립전쟁이었다. 이는 우리 독립군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필사적으로 독립투쟁을 벌였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러하니 침략군 미국의 부당함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한 우리에게도 명분은 없다.

 

▲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왼쪽부터)을 비교해 놓은 전시물    © 황윤희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베트남은 3백만 명이 목숨을 잃고, 200만 명이 불구가 됐다. 고엽제 살포로 전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고엽제 피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400~80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2세, 3세에게 대물림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투입된 폭탄의 양만 제2차세계대전의 3배에 달한다.

 

이는 1㎡에 폭탄 하나가 떨어진 셈으로, 베트남 인민들은 ‘우리는 지상에 살고 싶어도 살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그리하여 베트남의 땅굴은 전쟁 수행을 위한 구조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구조물에 더 가까웠다. 미국에게도 베트남전쟁은 자국의 역사상 가장 길고(20년), 가장 많은 전사자(5만 명)를 내고, 가장 많은 비용을 투입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최초로 패배한 전쟁이었다.

 

베트남 인민들은 이 전쟁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그렇게 많은 인명과 비용, 폭탄을 투입하고도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 우리의 승리의 역사는 모든 민족과 국가에게 외세의 간섭 없이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갈 신성불가침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5천년 역사의 오점, 베트남 참전

 

한국은 1965년부터 청룡여단, 맹호사단, 백마사단 등 본격적으로 전투부대를 파견하기 시작한다. 특히 1965년 11월과 12월 맹호사단이 빈딘성에서 작전을 수행하면서 ‘용감성’을 증명, 미군은 이윽고 한국군이 베트남 전장에 가장 적합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구수정). 그 용감성이란 결국 ‘잔인함’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64년부터 72년까지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수는 32만 명에 달한다. 이는 같은 시기 미국이 파병한 군인의 수, 268만 명에 비하면 10명에 1.2명꼴이며, 1972년에는 파병 한국군의 수가 미국군의 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이는 한국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으로 베트남 전쟁을 수행했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우리나라가 5천년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고 배웠다. 무수한 외세의 침략을 물리쳤으나 남을 해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선하고 정의로운 나라라는 말을 듣고 자라며 민족적 자긍심을 키웠다. 그런데 왜 참전해야 했을까?

 

당시 유엔은 베트남전을 더러운 전쟁이라고 규정, 참전하지 않았다. 베트남전쟁 수행에서 핵심역할을 맡았던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도 종전 20주년을 맞아 출간한 회고록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군사개입은 큰 실수였고, 수많은 미군과 베트남인들이 희생되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우리는 미래세대에게 우리가 왜 그랬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 베트남전에 개입한 나라들의 파병군인 수. 한국군은 미군 10명에 1.2명 꼴이다     © 황윤희


  

그러한 잘못된 전쟁에 참전한 것이 진정 우리의 뜻이었던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참전에 대해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전 도쿄대 부총장 후루타 모토오는 1954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한국군을 파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렸다고 썼다.

 

또 베트남파병과 관련해서는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베트남전에 관해 ‘한국이 미국에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으며, 이듬해 3월에는 송요찬 국무총리가 ‘비록 한국의 국내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이 열악하기는 하지만 점차 악화되고 있는 베트남에 전투병력을 파병할 준비는 되어 있’음을 재차 강조했다고 한다. (《역사 속의 베트남 전쟁》, 2007, 일조각) 이는 미국이나 남베트남 정부의 공식요청이 있기도 전으로, 결국 파병이 한국정부 독자적인 뜻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참전의사를 바탕으로 성사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참전은 다른 민족의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침해한 부도덕한 일이었다. 우리 민족의 희디흰 옷자락을 피에 적신 행위였다. 우리는 더 이상 5천년 역사 불가침의 자긍심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럼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던 것인가? 얻은 게 있다면 참전을 정당화해도 될까? 질문은 다시 이어진다. <다음호에 이어짐> 

 

[안성신문]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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