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민주 반역자 '김창룡' 현충원 묘 파내라!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대전 현충원 안장 김창룡 파묘 퍼포먼스

이호두 기자 | 기사입력 2014/06/08 [04:54]

민족-민주 반역자 '김창룡' 현충원 묘 파내라!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대전 현충원 안장 김창룡 파묘 퍼포먼스

이호두 기자 | 입력 : 2014/06/08 [04:54]

"민족 민주 반역자 김창룡 묘 파내라!

 

지난 6일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친 순국선열들을 추모하는 현충일. 수 많은 호국영령들의 넋이 안식을 취하고 있는 대전현충원에 날선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민족 민주 선열들과는 죽어서도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매국 친일의 대명사격인 김창룡의 묘를 파헤치라는  요구였다.  


이날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평화재향군인회 회원 등을 비롯한 시민들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김창룡 묘 앞에서 이장 촉구 파묘 퍼포먼스를 열었다.

 

▲ 시민들 친일파가 현충원에 왠말.. 파내라!     © 이호두 기자

 


김창룡은 누구길래 6.6 현충일,
죽어서까지 시민들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일까?
 
항일독립군 토벌 공훈 일본헌병 출신
김창룡은 누구인가?
 
이승만 시대 육군중장 김창룡은 1920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하여 1956년 부하 허태영 대령에게 총을 맞아 죽기까지 출세를 위해 항일 독립군, 양민학살을 마다하지 않은 민족 반역자로 평가되고 있다.

▲ 일본군 김창룡이 독립군의 머리를 잘라 들고 웃고 있다         © 민문련 대전지부 제공

 


이봉원 현)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 연구회장은 김창룡에 대해
 
"오늘날 국립묘지에 묻혀있는 반민족행위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자가 바로 김창룡이다. 백범 시해의 배후로도 의심받고 있고, 무고한 장병들을 용공으로 몰아 체포했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까지 저지른 자" 라고 말한 바 있다.

 

▲ 김창룡은 일본군 출신으로 양민학살을 지휘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제공

 


김창룡은 1920년(호적나이) 함경남도에서 출생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실공장 직공생활을 하다 일본인의 소개로 일본 헌병부대 군속(현대의 군무원)으로 들어갔고 그후 헌병보조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진짜 헌병이 되기위해 1940년 중국 장춘의 일본 관동군 헌병 교습소에 입교하여 25세에 조선인으로서 일본 헌병 이등병이 되었다.
 
이후 2년간 만주에서 50여건이 넘는 항일 조직을 적발하여 헌병 오장(현 하사급)으로 특진하였다.
 
해방후 북에서 최고전범으로 검거되어 사형선고를 2번이나 받았으나, 취조실에서 소련군을 의자로 내려치고 도주, 남한으로 내려와 국군장교가 되었다.

김구암살 배후..이승만 독재강화에 큰 공을 세우다 
결국 그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부하의 총탄에 사망
 
한때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이 김창룡 파면을 명령했으나, 좌익 색출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 하여 그는 계속 자리를 유지했다.
 
김창룡은 이승만 정권유지를 위해 민간인 학살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김창룡에 대해 1956년 미국 308CIC 분견대는 이승만이 직접 하기 곤란한 궂은 일을 대신해주는 청부업자와 같은 존재 라고 평가했다.

 

▲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비호.. 배후세력 자처     ©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제공

 


심지어 그는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범행당일 침대 등이 있는 특별히 개조된 감방에 지내게 하며, 편의를 봐주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형무소에서 안두희를 데리고 나와 그해 7월 소위로 복직시키고 1953년 안두희가 대령으로 예편한 뒤에도 계속 그를 비호했다.
 
시민들, 악질 친일 독재 하수인 김창룡, 현충원에서 파내라!
 
김창룡은 1956년, 결국 부하였던 허태영 대령 일행에게 저격당해 죽었다.  

전쟁와중 1951년 육군 특무대장 직위를 부여받은 김창령은 이른바 동해안 반란사건과 뉴델리 밀담설 등 각종 정치공작에 관여하며 무리하게 정적 제거 활동을 벌였다.
 
허태영은 김창룡을 저격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창룡은 일제시대 북만주에서 악질 일본 헌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애국 독립투사들을 투옥했으며, 포로를 학대한 친일전범이다. 그는 월남한 후 공산당을 쫓는 군 정보기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을 기화로 개인적 영달을 위해 혈안이 되어 행동하였다.
 
그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숙청을 되풀이하여 공산당원1에 양민 10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혔다. 뒤켠에서는 살인, 약탈, 협박, 공갈, 항명, 군수품 부정처분, 밀수 등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20억원의 재산을 끌어모았다. (하략)"

 

▲ 민족반역자 김창룡의 이장을 요구하는 시민들        © 이호두 기자


 

민족.민주 반역자 김창룡 묘이장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옥 대전지부장은 "국립묘지에서 파내어져 고향 뒷산에나 묻혀있을 김창룡이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으니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을 학살한 인사들이 국립묘지로 들어오는 것을 무슨 수로 막을 수가 있을까?" 라며 국립묘지 안의 친일파 묘는 반드시 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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