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보다 이승만이 닮은 '박근혜'

[편집위원장 칼럼] 후퇴하는 역사는 서로가 불행하다.

임두만 | 기사입력 2014/09/29 [15:37]

박정희보다 이승만이 닮은 '박근혜'

[편집위원장 칼럼] 후퇴하는 역사는 서로가 불행하다.

임두만 | 입력 : 2014/09/29 [15:37]

[신문고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세월호 유가족이 대리기사를 폭행했다는 일명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사건’ 당사자인 대리기사가 29일 김현 의원을 검찰에 고소했다.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김 의원을 고소한 대리기사는 "김현 의원의 '명함 뺏어'라는 말과 함께 유가족의 폭행이 시작됐다"며 "김 의원을 폭행과 상해의 공모공동정범으로 봐야 한다"는 내용의 고소장을 서울남부지검에 제출했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 19일 보수단체 자유청년연합은 김 의원을 이 사건의 폭행 당사자로 고발했다. 따라서 애초 폭행에 가담하지 않아서 참고인이었다는 김의원의 신분은 현재 피의자라는 것이 경찰의 입장이다. 즉 '고발을 당했으니 피의자'란 것이다.

 

뭐 좋다. 그게 법률용어니까...그런데 대리기사의 고소장을 접수한 검찰은 사건을 영등포경찰서에 내려 보내 앞서 자유청년연합이 김 의원과 유가족을 고발한 사건과 병합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제3자 고발로 피의자 수사를 하기에 부담을 느낀 경찰은 이제 당사자 고소로 인해 김현 의원을 피의자로 수사하기가 한결 가벼워 졌다.

 

이승만 정권의 '땃벌단'이 2014년 되살아 나다

 

나는 이 사건을 보며 정말 역사가 70년을 후퇴하고 있구나를 새삼 실감한다. 특히 이 뉴스를 접하기 전인 어제 휴일임에도 인터넷은 때 아닌 서북청년단의 활약상이 도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서북청년단’하면 일단 떠오르는 단어가 ‘백색테러’다.

 

 

▲ 5·16쿠데타가 일어나던 해(1961년) 앨범사진인데요. 그 해에는 보름이 멀다하고 저희 동네 공설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 조종안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또는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약칭: 서청)으로 불리며 미군정 당시 조직된 반공 청년단체로서 활동했던 이 단체는1946년 11월 30일 설립된 것으로 각종 기록에 나온다. 38선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김일성 일파가 장악한 북로당이 친일파 및 지주들을 탄압하면서 이를 피해 월남한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단일 단체로 모인 것이다.

 

이후 각종 우익 청년단체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조직한 대동청년단으로 통합될 때 '서청'은 합동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어 합동파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으나 반대파는 따로 서북청년단을 재건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 서북청년단을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한 전위 폭력단으로 활용했다.

 

제주 4.3기념관에는 이에 대한 이승만 어록도 보존되어 있다. 또 서북청년단원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기념관엔 전시돼 있다. 특히 합동파가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뒤 서북청년회 재건파(서북청년단)는 더 강성한 이승만 친위대 역할을 했다.

 

지금 각종 기록으로 남은 이들의 행적을 보면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청년들인지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제주 4.3항쟁 기념관에 전시된 기록물에 의하면 서청은 제주도민 10%를 좌경분자 처단이라는 명목 하에 탄압 혹은 살해한 것으로 나온다. 김구 살해범 안두희도 서북청년회 재건파 소속이었다. 그리고 전국에서 약 30여만 명이 이들 서청 조직원들의 백색테러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제주 4.3 사건 당시 체포된 좌익분자를 처형하고 있다.   

 

 

그런데 1948년 없어진 이 단체를 재건하겠다는 사람들이 2014년 박근혜 정권에서 나타나 활개를 치고 있다. 역사를 무려 70년을 후퇴시키면서 21세기 한국사회를 세계 2차대전 후 생겨난 냉전당시의 사회로 환원시키려는 것이다. 현직 국회의원을 보수단체가  폭행범으로 고소하고 검찰은 폭행범 피의자로 수사하겠다고 하는 것에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36년 일제치하에서 민족을 탄압한 친일파들 처단을 위해 국회는 법에 따라 반민특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악질 친일경찰을 체포하여 처벌하려던 이 반민특위 특경대는 이승만이 용인한 경찰에 의해 침탈당하고 체포되는 등 수난을 당하다가 해체되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친일파 처단은 금기시 되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30일 대한민국은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의 임기가 2년이었으므로 치러지게 된 선거였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끌던 여당은 참패했다. 그 이유가 위에 적시한 우익의 이름으로 행하던 각종 백색테러, 특히 반민특위의 강제해산 등이었다.

 

결국 이 선거 결과 국회의 간선으로 뽑던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차기 당선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30일, 부산으로 피난을 간 정부를 이끌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당시는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권이 부산과 경남, 그리고 전남북에만 미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전쟁 시작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버린 이승만 정부는 인공 3개월 후인 그해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했어도 다시 서울로 오지 못했다. 그래서 용산에 위치한 유엔군 사령부가 사실상 남한 전체를 통할한 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대통령 권력을 놓기 싫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한 것이다. 남쪽 전 국민이 투표 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 직선제면 자신이 당선된다는 계산으로 저지른 추악한 정치협잡이었다.

 

이에 야권은 연대하여 1952년 1월 18일에 국회에서 이를 부결시켜버렸다. 그러자 다시 정체모를 백색 테러 단체들이 출몰했다. 국회의사당을 강제로 봉쇄하고 국회의원들을 퇴근도 하지 못하도록 하는데도 경찰이나 헌병대는 이들을 해산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이승만은 이를 기화로 정국이 혼란하다며, 5월 25일에 정부의 행정권이 미치는 부산과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의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계엄령 하에서 국회해산을 명했다. 다음날인 5월 26일, 이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 50여 명을 계엄령이 내렸으므로 경찰도 아닌 헌병대가 연행한 뒤 정헌주, 이석기, 서범석, 임흥순, 곽상훈, 권중돈 등 12명을 국제 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했다.

 

하지만 앞서 거론한 대로 당시 대한민국의 실질적 통치권은 유엔군 사령관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유엔을 비롯한 국제여론이 이승만에게 극도로 나쁘게 흘렀다. 이 국제적 비난 여론은 이승만이 하야해야 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참전국들이 독재자 이승만을 지키기 위해 자국 청년들을 죽음의 전쟁에 보낼 수 없다는 여론이 그것이었다. 그러자 이처럼 국제적 여론에서 퇴진 압박까지 받게 된 이승만은 6월 4일에 국회 해산을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승만 친위대인 백색 테러 단체들의 출몰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부산 국제 구락부에서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을 하는 회의장에 괴한이 습격하여 피습당하는 일(국제 구락부 사건)이 일어났으며, 6월 25일 자작극인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6월 30일, 민중자결단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80여 명의 국회의원을 연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나는 왜 그때가 떠오르고 있을까? 자유청년연맹과 민중자결단은 어떻게 다를까? 일베를 통해 양산되고 있는 사이버 폭력단은 이승만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관제데모데와 어떻게 다를까? 네이버 등에서 암약하며 대통령을 비판하고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에 대고 특정지역과 좌빨을 연관시키는 조직적 언어테러는 과연 자생적일까? 박근혜 정권에게서 박정희 정권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이 연상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2014년 이 땅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 평가자가 실제로 많이 존재한다. 그에 대한 우호적 평가는 그가 ‘가난을 물리친 대통령’이란 거다. 이 논리는 그래서 ‘비록 박정희가 독재는 했어도 개인치부는 하지 않았다’로 나아가며, 급기야 ‘개발독재’란 말에서 이젠 떳떳하게 ‘경제개발세력’이란 말로 치환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를 최대한 좋게 평가한다는 이들의 논리를 인정해도 ‘박정희는 독재를 했지만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 정도다.

 

 

▲ 1959년 3월 자유당이 말기로 치닫던 시절. 임화수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반공예술단'의 단원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찾아 인사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런 평가도 할 수 없다. 이승만은 자기 개인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독재자일 뿐이다. 때문에 이런 권력 탐욕적 권력자 이승만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기붕 최인기 곽영주 이정재 같은 탐욕적 협잡꾼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무한권력을 행사하다 자살하거나 사형을 당하고 이승만은 망명을 가서 타국에서 죽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내게 떠올려지는 박근혜 정권의 모습이 이승만 정권의 모습이라면 잘못된 것인가? 나는 어제 오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다. 이런 상태의 지속은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을 위해서도, 박근혜 정권에 봉직하고 있는 공직자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들을 지지했던 51%의 국민들을 위해서도 그렇다. 2014년 백주에 ‘서청’이 날뛰고, 반대파 국회의원들을 옥죄기 위하여 ‘백색테러’가 연상되는 단체들이 날뛰고, 이들의 부화뇌동이 가능하도록 검찰이 움직여주는 세태는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도 국회소식은 다수의석을 점한 여당이 소수의 야당에게 굴복을 요구하며 버틴다는 소식 뿐이다. 자식을 백주에 바다에 수장시킨 부모들에게 ‘당신들이 나라를 망치는 가해자’라고 손가락질이나 하는 작태가 서슴없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판국을 만든 것에 만족하며 이게 국민여론이라고 굴복을 하라고 한다.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강경대응을 주문하고 여당은 퇴로도 없이 야당을 압박하는 정치, 인터넷은 물론 카톡까지 뒤지겠다는 검찰, 재판을 비난했다고 징계하겠다는 법원...과연 무엇을 위한 강경인가? 이것은 아니다. 이러면 안 된다. 우파의 영원한 집권을 바라는 조선일보 김대중이나 조갑제라도 이런 판국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런 행태가 지속된다면 그들이 원하는 우파들의 집권은 이번으로 끝날 것이다. 테러는 백색도 흑색도 안 된다.

 

집단적 히스테리는 집단 광기를 부를 뿐이다. 최소한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박정희 대통령이라도 느껴지게 하라. 그래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이승만 대통령이 느껴진다면 박근혜 대통령도 박근혜 정권에게도 불행하다. 친노와 친박의 극단적 대립이 해방전후 좌우대립이란 극단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우려가 나만의 우려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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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4/11/19 [23:58] 수정 | 삭제
  • 테러는 백색도 흑색도 안된다. 가 아니라 테러는 백색도 흑색도 적색도 안된다.여야 하는데 말이다. 두만아 너는 적색테러는 없는 자들의 당연한 저항이라 생각하니? ㅉㅉㅉ
  • nnn 2014/11/04 [07:38] 수정 | 삭제
  • 박정희보다 이승만"을" 닮은 '박근혜'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