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침탈 사료 수집은 나에게 주어진 의무”

[인터뷰] 월급 털어 근대사 유물 수집하는 동국사 종걸 스님

조종안 | 기사입력 2014/11/27 [04:37]

“일제침탈 사료 수집은 나에게 주어진 의무”

[인터뷰] 월급 털어 근대사 유물 수집하는 동국사 종걸 스님

조종안 | 입력 : 2014/11/27 [04:37]

 
 

▲ 세월호 참사 추모 리본을 어루만지는 종걸 스님     © 조종안

 

 


[신문고뉴스] 조종안 기자 = 잿빛구름이 심술쟁이처럼 종일 햇볕을 가린 주말(22일) 오후, 전북 군산 동국사(東國寺)를 찾았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탑 앞에서 주지 종걸 스님을 만났다. 노란 리본에 적힌 수천의 애틋한 사연들. 절집 마당에 나뒹구는 은행나무 이파리들과 어린 넋들이 겹쳐 안타까움이 커졌다.


종걸 스님은 노란 리본들을 어루만지며 "원래는 팔정도(8가지 수행 방법)를 형상화한 불교의 상징인 법륜(法輪)인데 세월호 참사 후 희생자 추모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리본을 만들어 바구니에 담아 놓았더니 방문객들이 하나둘 매달기 시작, 수천 개를 넘기면서 추모탑이 됐다"면서 "언젠가 치우기는 해야 할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 동국사 대웅전 한쪽에 마련된 침탈사료관     © 조종안

 

 


소설(小雪) 체면을 세워주느라 그런지 바람 끝이 제법 쌀쌀했다. 제4회 기획전 <타임캡슐, 쌀의 나라 군산>이 열리는 '침탈사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웅전 한쪽에 마련된 침탈사료관은 일제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조선 백성들이 신작로에 넘친 식민지 시절을 돌아볼 수 있도록 4개의 소 주제로 운영되고 있다.


주요 전시품은 일제가 토지수탈을 위해 들여온 측량기 세트와 군산 쌀 60배 확대 사진, 1894년 청일전쟁 종군일지, 1898년 경부철도 합동계약서, 1901년 당시 군산 상황, 군산 미곡취인소 미두통장, 구마모토 농장의 쌀 선적용 대형 계수판, 소작계약서 등이다. 독립군영화나 시대극에서 봤던 자석식 전화기, 유성기, 진공관 라디오, 행상용 찹쌀떡 상자, 나무로 만든 책가방 등도 눈길을 끈다.


비운의 황손 '흥영군 이우'... 일본 육사 시절 감시당해


 

▲ 일본 육사시절(1933) 이우 왕자 모습,     © 조종안


 

의친왕(이강)과 후궁 수인당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흥영군 이우(李鍝·1912~1945). 그가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11살) 때 볼모로 끌려가 일본 학습원, 육군유년학교, 육사,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945년 8월 7일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하기까지를 기록한 자료도 걸음을 멈추게 한다.


종걸 스님은 지난 10월 황실문화재단 초청 강연에서 일본군 사토 중위가 1929년 4월 1일부터 11월 14일까지 작성한 '감시일지'(御訓育日誌) 내용을 처음 공개했다.


 

▲ 이우의 뇌전증 증세를 기록한 1929년 7월 5일 일기 원본(왼쪽 붉은 선)과 1928년 유년학교 졸업반 수업 진도표(오른쪽)     © 조종안


  
종걸 스님은 "이우는 일본인과 혼인할 것을 강요한 일본 국내성과 이왕직(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조선 왕족 관련 사무를 위해 설치한 기구)의 반대에도 의친왕의 지원을 받아 1935년 박영효 손녀 박찬주를 부인으로 맞았다"며 "어렸을 때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뇌전증(간질)을 앓은 비운의 황손이었다"고 전했다.


종걸 스님은 "사토 중위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 제4중대 1구대장으로 '감시일지'에 '황손 이우는 교관이 나무라면 반항하며 대들었으나 동료들을 너그럽게 감싸줬다'고 기록했다"며 "(이우는) 상관 지시에 잘 따르지 않아 요주의 인물로 지목돼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총명했던 이우는 키 156㎝, 몸무게 46㎏의 작은 체구에도 강인한 체력에 프랑스어에 능통했고, 선호 과목은 승마였으며 독립운동에도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다.


참회 의미로 근대사 유물 수집 시작


종걸 스님은 지난 2012년 5월 일본 운상사 주지 이치느헤 쇼코(一戶彰晃) 스님이 기증한 유물 등 희귀자료 100여 점으로 기획전을 시작했다. 이후 해마다 1~2회씩 전시회를 여는 종걸 스님에게 그 뒷얘기를 들었다. 아래는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이다.


 

▲ 침탈사료관에 전시된 근대 유물들     © 조종안


 
- 근대사 유물을 수집한 동기는?
"동국사가 어디 있는가도 모르고 2005년 군산에 왔다. 도시가 너무 황량해서, 이 지역 사투리로 '짜~안한 마음'이 들었다. 해방 당시 분위기로는 신사(神社)와 함께 동국사도 사라졌어야 하는데, 종교시설이어서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저지른 잘못은 아니지만, 죄의식이 들었다(동국사는 1913년 일본인 승려 우치다에 의해 지어졌으며 현존하는 한국 유일의 일본식 사찰이다). 역사 발굴, 특히 일제침탈 사료는 '나에게 주어진 시대의 의무'라는 생각에 참회의 의미로 수집했다."


- 지금까지 수집한 유물은 몇 점인가?
"엽서 크기의 흑백사진에서 일본군 총검에 이르기까지 기증 등으로 한두 점 모으다 보니 6000점이 넘는다. 이제는 감당을 못할 정도가 됐지만, 새로운 자료를 통해 역사 공부도 하고, 필요한 분들에게 제공도 하면서 보람을 느낀다. 학창 시절부터 옛것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오랫동안 모은 개인 애장품들은 출가하면서 모두 버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모두 보물이었는데···. (웃음)"


- 그 많은 유물을 어떤 경로로 수집했나?
"전국의 고서점, 골동품상, 인터넷 경매 등을 통해서도 사들이는데, 원하는 자료를 만나기가 어렵다. 특히 일제 강점기 자료는 국내에 남아 있는 게 거의 없고, 불교 관련 자료는 더더욱 찾기 힘들다. 사진 한 장에 2만 원 정도 하는데 그나마 정말 필요한 것은 수집가들 손에 들어가 있어, 얼마 전부터는 시야를 중국과 일본으로 넓혔다."


-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큰 금액은 아니지만 매월 '보시'를 받는다. 일반 회사로 말하면 월급이다. 나 같은 사람이 특별히 쓸 데가 어디 있겠나. 승용차 기름값 제하고 남은 돈은 유물 구입에 투자한다. 숨겨진 역사도 발굴하고 교육적인 효과도 있다며 격려해 주고 도와주는 분도 있어 큰 힘이 된다."


 

▲ 군산 쌀(米) 60배 확대 사진(왼쪽)과 군산 미두장 통장(오른쪽)     © 조종안


 
 
-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애착이 가는 유물은?
"흐릿한 흑백사진 한 장에서 퇴색한 나무상자 하나까지 모두가 소중하다. 그럼에도 인지상정이랄까, 불교 관련 자료에 애착이 간다. 오대산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일제강점기(1914) 조선총독부에 의해 도쿄로 옮겨졌다고 구전으로만 내려왔는데, 그 과정을 기록한 문서를 발견했을 때는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기억에 남는 유물은 채만식 소설 <탁류>에 나오는 미두장(미곡취인소) 통장이다. 소설을 보며 어떻게 생겼는지 무척 궁금했었다. 어느 날 서울의 한 대학 교수가 그걸 소장하고 있는 걸 알았다. (판매를) 사정해 그가 구매했다는 금액에 약간의 웃돈을 얹어주고 손에 쥐었다. 실제 사용했던 통장이라서 당시 군산의 미두장 거래 내역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순수하고 정직한 어린이들은 불교에게도 큰 희망"


- 어린이 포교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데.
"당연하다. '어린이는 모든 어른들의 스승'이란 말도 있잖은가. 어린이들은 초파일을 앞두고 내건 현수막만 보고 "부처님이 몇 시에 오시느냐?"고 진지하게 물을 정도로 순수하고 정직하다. 갓 피어난 연꽃 같은 심성을 가진 어린이들이 나라의 버팀목은 물론 불교에도 큰 희망이라 생각되어 가까이 하려 노력한다. 예전에는 이웃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하면 학생들이 '야, 저기 스님 있다!'면서 박제박물관의 박제를 보는 것처럼 신기하게 봤는데 지금은 달라졌다. 학교에서 만나면 쫓아와서 인사도 하고 친근해졌다."


- 지금까지 개최한 전시회와 그 의미는?
"기획전은 동국사에서 4회,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서 3회를 했다. 대여 전시는 전주 어진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충남대학교 등에서 1회씩 했다. 전통문화재를 보여줌으로써 군산 지역에도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불교문화재가 있음을 널리 알렸다. 불과 1세기 전 일이지만, 치욕의 역사 자료를 통해 가슴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교육적 효과도 거뒀다고 자부한다."


- 전시장을 돌아본 방문객들의 반응은?
"제1회 전시회 때부터 전시장에 방명록을 비치해 놓았는데, 개인적 경험부터 일본의 역사왜곡 비판, 나라 사랑하는 글 등 다양한 감상이 담겼다. 3회 전시회 때는 무려 1만 명이 넘게 메모를 남겼다. 참회와 용서를 구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감동적인 내용도 많다. 그러다 보니 입소문을 타게 되어 각종 언론과 방송에서도 보도했다. '비운의 황손 이우 감시일지' 관련 보도는 <네이버><다음> 등 포털 사이트에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 2014년을 마무리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12월은 한해를 정리하는 '송년의 달'이다. 올해는 무지에서 오는 집단이기주의와 안전 불감증으로 각종 사고가 꼬리를 물었다. 그 탓에 형제와 이웃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안 죽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나라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침몰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빌어야 한다. 아울러 크고 작은 사고로 먼저 가신 이들을 위해 올해만큼은 경건하고 조용한 송년을 보냈으면 한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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