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안의 작은 사치 큰 기쁨 '손수건'

[주동식 칼럼] 나는 신호이자, 계약서이자, 깃발 같은 손수건이 좋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 기사입력 2014/12/04 [08:55]

주머니 안의 작은 사치 큰 기쁨 '손수건'

[주동식 칼럼] 나는 신호이자, 계약서이자, 깃발 같은 손수건이 좋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 입력 : 2014/12/04 [08:55]

[신문고뉴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 몇 개 되지도 않는 손수건이 하나둘씩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더니 드디어 개어놓은 손수건이 몇 개 남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어딘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어서 손수건을 팔만한 쇼핑센터를 몇 군데 들러봤더니 팔지 않는다고 한다.

 

 

백화점에서야 팔기는 하겠지만 괜히 손수건 값 물어봤다가 좌절감만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 용기 내는 걸 포기했다.

 

1천원짜리 물건을 주로 파는 곳에서는 손수건이라고 팔긴 하는데 아무리 봐도 내 기준으로는 손수건이 아니라 그냥 헝겊으로 만든 일회용 티슈 느낌이다.

 

마침 농협 하나로마트에 갈 일이 생겨 물어봤다. 좀 늦은 시간이라 식재료 외에는 문을 닫은 코너가 많은데, 일하시는 분에게 물었더니 주인이 퇴근한 양품점 코너로 데려간다.

 

거기에 손수건들이 쌓여 있었다. 1장 당 5천원. 4장을 들고 계산대로 갔더니 계산하는 아주머니가 나보다 더 신기해한다.

 

"어머나, 맨하탄 손수건 이거 아직도 파네? 이거 참 좋은데, 전 이거 사면 10년씩 쓰곤 했어요. 지금도 품질이 괜찮으려나?"

 

할 말이 없어 괜히 트집을 잡는다.

 

"그런데 손수건 한 장에 5천원이면 비싼 거 아닌가요?"

 

아주머니가 입을 다문다. 손수건 값 5천원에 불만을 토하는 인간이라면 상종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손수건을 휴대 품목의 하나로 여기게 됐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확실한 건 나 역시 20대 청년 시절에는 손수건이라는 물건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잘 몰랐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단어가 있다는 것도 알고, 그 물건을 누군가 쓰는 것을 본 적도 있지만 그 물건과 내가 어떤 종류의 인연이라도 맺을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10대 그리고 30대 시절에는 어머니나 아내가 호주머니에 손수건을 찔러준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억은 없다.

 

손수건의 존재를 내가 처음 의식하게 된 것은 교회학교 교사 시절 아니었다 싶기도 하다. 고등부 교사를 하다가 학년을 마쳤을 때 맡았던 여학생의 어머니가 선물을 보내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열어봤더니 거기에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분명 손수건 말고 다른 물건도 있었는데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한 건 기억나지 않는 그 물건이 손수건보다 훨씬 비싼 아이템이었다는 것, 그 물건이 main이고 손수건은 sub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나는 엉뚱하게 그 손수건을 보면서 문득 "아, 사람이 손수건이란 것을 쓰면서 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정말 처음으로 해봤다. 집에서 세수할 때 쓰는 수건, 등산용 머플러, 일회용 티슈 외에 일상 속에 이런 물건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이다. 그게 손수건의 재발견이었는지 실은 사람이 사는 방식의 재발견이었는지 아직도 아리송하다.

 

사실 전부터 알던 평범한 물건 가운데 내게 새삼스러운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 손수건만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산이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네 집이 비닐우산을 만들어 팔았다. 엄지손가락만한 굵기의 대나무로 우산대를 만들고,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우산살을 만들고, 우산대에 구멍을 뚫어 철사를 끼워 걸림장치를 만들고 파란색 비닐을 씌운 그 우산.

 

그 우산은 일회용이 아니었다. 바람만 세게 불어도 금방 비닐이 찢어지고 우산살이 뒤집어져서 사용하기 어려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번 썼다가 버리는 물건은 아니었다. 나중에 '협립'이라는 브랜드의 고급우산이 등장하면서 동네표 비닐우산들은 어느새 찾아볼 수 없게 됐지만 적어도 그 물건이 만들어지고 팔리던 그 순간까지는 일회용품이 아니고 일종의 내구성 소비재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은 협립 우산보다 비싼 우산들도 일회용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잃어버리면 금방 쉽게 잊는다. 며칠 전에도 버스에 탔더니 빈 좌석에 상당히 비싸 보이는 고급우산이 놓여 있었다. 내리면서 기사에게 손님이 놓고 내린 것 같다며 건네줬더니 보지도 않고 받아서 운전석 옆 구석에 휙 던져버린다.

 

손수건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낯 뜨거운 일 당할까봐 두렵다는 미신 때문인지 다림질도 하지 않고 갖고 다니는 물건이지만 잃어버렸을 때의 낙담 같은 심리적 부담이 우산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크다. 가격은 대개 우산이 더 비싼 것 같은데도 그렇다.

 

왜 그럴까? 잘 모르겠다. 어렴풋이 짐작하는 건 내가 어렸을 때 봤던 어른들의 손수건과 내 손수건의 모습이 자꾸 기억 속에서 동조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아버님이 식사하시면서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시던 모습, 어른들이 일하다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거나 손수건으로 바람을 일으켜 땀을 식히던 모습 등이 떠오르는 것이다. 손수건은 그렇게 노동과 땀의 동반자였던 것 같다. 내게는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손수건이 단순히 노동의 도구이자 보조물이기만 했다면 지금 이 나이에 이렇게 새삼스러운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손수건은 어떤 조직 속의 한 부분으로서 노동하는 인간 이전에 한 사람의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인간이 갖추는 예의처럼 느껴진다. 그 신호이자, 계약서이자, 깃발 같다. 일하다가 호주머니에서 꺼내 땀을 닦고, 버리지 않고, 다시 호주머니에 잘 접어서 넣었다가 빨아서 말리고 개어서 가져온다.

 

요즘 직장인들은 거의 손수건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파는 곳도 드물고, 어쩌다 팔리면 계산하는 분들조차 신기해하는 물건이 된 것 아닐까?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도 기념품 얘기 나올 때 몇번 손수건을 추천했지만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아마 손수건 대신 일회용 티슈를 쓰는 것이 훨씬 편리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손수건을 사용하지 않는 분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를 잃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손수건은 대개 참 예쁜 무늬와 모양을 갖고 있다. 비싸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는 물건이 쓸 데 없이 고운 모양을 갖춘 것이 어딘지 어색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냥 내게 허용된 작은 사치일지도 모르니 감사하기도 하고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약간 생각이 달라졌다. 아, 손수건은 예쁠 자격과 권리가 있다. 그보다 손수건은 최대한 곱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개어져 우리 호주머니에 들어와야 할 의무라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저 고운 무늬 속에 얼마나 많은 땀과, 모색과, 비전과, 열정이 스며들고 포개져야 할 것인지 생각해보라. 당연한 결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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