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치원은 '돼지 최씨' 시조?

조종안 | 기사입력 2015/01/14 [04:42]

신라 최치원은 '돼지 최씨' 시조?

조종안 | 입력 : 2015/01/14 [04:42]

[신문고뉴스] 조종안 기자 = 국교가 '유교'였던 조선(朝鮮)은 국가시책으로 전국 각지에 향교와 서원을 설치한다. 군산 지역에도 태종 3년(1403) 옥구, 임피 두 곳에 향교가 세워진다. 숙종 11년(1685) 이후에는 여섯 개(염의, 옥산, 문창, 산앙, 치동, 봉암) 서원이 설립된다. 오늘날 국립학교와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향교와 서원은 충효 정신과 높은 인격을 갖춘 선비를 배출하였다.

 

 

▲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 자리한 옥구향교 전경     ©조종안

 

 


그중 옥구읍 상평리에 남아 보존 관리되고 있는 옥구향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6호)는 태종 3년(1403) 당시 교동으로 불리던 옥구현 이곡리에 처음 세워졌다. 성종 15년(1484) 상평리 광월산 아래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인조 24년(1646)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성균관의 지방 기관으로 교육·제례 기능을 병행했던 옥구향교는 대성전, 명륜당 등 크고 작은 전각 7채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이다. 경내에 단군성묘와 세종대왕비각(숭모비), '경주 최씨' 시조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영정을 봉안한 문창서원, 자천대(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16호) 등이 세워져 있는 게 특색이다.


자천대, 본래는 바닷가에 있던 바위산 이름

 

 

▲ 옥구향교 경내 문창서원 입구에 있는 자천대     © 조종안


 
자천대(紫泉臺)는 조선 후기 건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물매가 매우 원만한 팔작지붕이며 원추형 초석 여덟 개가 건물을 받치고 있어 위용이 넘쳐 보인다. 2층 마루 주위에 난간을 대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주심포와 익공식 절충으로 곱게 단청 되어 단아함과 화려함이 조화를 이룬다.


자천대는 본래 옥서면 선연리 하제 인근 바닷가의 작은 바위산을 칭(稱)하는 명칭이었는데, 그 산 위에 2층 정자가 자리하고 있어 이 또한 자천대라 불렀다. 자천대는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 양식의 2층 정자로 1941년경 일본군의 군산비행장 건설공사로 바위산이 사라지게 되자 옥구 군수 최학수씨와 지역 유림들이 합심하여 옥구향교 인근으로 이전하였으며 1964년 현 장소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 '자천대' 안내문에서


안내문은 "최치원 선생 아버지는 신라 무관으로 내초도(군산시 내초동)에 수군장으로 주둔하였으며 이때 최치원 선생이 태어나 선연리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며 "자천대는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전설들이 전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최치원의 출생에 대해 <삼국사기>는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라고만 적었지 출생지는 밝히지 않았다. 1481년 처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은 '자천대는 서해안에 위치하며 지형은 넓고 평평하고 샘과 돌이 가히 즐길 만하다. 세상이 전하기는 최치원이 놀던 곳'이라며 위치와 유래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군산과 최치원의 인연이 500년이 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는 <무성서원지>에서 최치원을 옥구(군산) 사람이라 못 박고 있으며 이능화의 <조선무속고>(1927)는 출생지(고군산)와 성장 모습을 다룬다. 이중환의 <택리지>(1751)는 바닷가로 쑥 드러낸 작은 산기슭을 자천대라 했고, 신라 때 최치원이 이 고을(文昌: 군산시 산북동) 원으로 내려왔으며, 정자도 있었으나 100년 전 허물었다고 적었다.


김중규 군산시 학예사는 "사람들은 이 고장 전설과 <택리지> 등에 등장하는 자천대를 현재 옥구향교에 있는 2층 누각만 '자천대'라고 말하는데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자천대는 1934년 일제가 비행장(군산 미군비행장) 확장공사를 하면서 부숴버린 선연리 중제마을 인근 바위산 이름으로, 당시 주민들이 이곳을 자천대, 혹은 '독서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자천대 낙성 기념 백일장도 열려

 

 

▲ 일제가 발행(1919)한 지도에 표기된 자천대. 서해바다와 중제마을 중간에 위치한다.     © 조종안

 

 


자천대가 있던 선연리는 군산 서남쪽 바닷가에 위치한다. 북쪽 옥녀봉 아래 상제마을에서 중제마을을 지나 하제 포구까지 남으로 길게 뻗어 내린 지형이 옆에서 본 코끼리 머리를 연상시킨다. 이곳은 조선 시대까지 섬(島)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대규모 간척공사(1920~1923)로 육지가 됐다. 1919년 1월 일제가 발행한 지도에도 한자 표기의 '자천대'가 발견된다.


선연리는 '신선과 인연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뽕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했으며 조선시대 옥구팔경(沃溝八景) 중 하나인 '화산낙안'이라 하여 상제, 중제 마을의 모래사장으로 내려앉는 기러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하였다. 최치원 전설 영향을 받아서인지 조선시대 이전부터 선비들의 필수 유람지가 됐으며 시인 묵객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 1934년 6월 10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자천대와 최학수 옥구 군수     © 조종안

 

 

1934년 6월 11일 자 <동아일보>는 "옥구군 옥구면 선연리 자천대는 1500~1600년 전 문창후(文昌侯: 고운의 시호) 최고운(최치원) 선생의 '유상 독서지'로 지금까지 일반 유림이 경모하여 내려오던 터인데 불행히도 이것을 기념할 만한 정각(亭閣)이 없었으므로 옥구 최 군수의 철저한 후원과 유림들의 열성으로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자천대를 신축했다"며 오월 단오일에 낙성기념 백일장을 거행한다고 소개한다.


6월 10일 자 <매일신보>는 최학수 군수 사진까지 삽입하고, 황폐화 된 자천대를 보며 섭섭해 하는 유림들의 반응을 전하면서 최 군수가 현지를 시찰하여 모 은행 소유의 토지임을 확인하고 매입하여 완공하기까지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리' 발(發) 기사는 16~17일 양일간 성대한 낙성식과 함께 기념백일장도 개최한다며 시제(詩題)와 형식(七律, 五律)까지 제시하는 친절을 베풀고 있다.


일제강점기 발행된 신문을 통해서도 최치원이 20세기 초까지 군산 지역 유림에 끼친 문화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다. 전설과 고문헌, 옛날 신문 등에 등장하는 최치원 이야기는 육지와 섬(島)을 넘나든다. 이처럼 군산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최치원에 대한 기억은 그 자체로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지배해온 생활문화의 한 축을 차지한다.


김중규 학예사에 따르면 자천대는 나무가 없는 검붉은 바위산으로 정상에는 최치원 선생의 무릎 자국이 남아 있는 '무릎바위'가 있었다 한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2층 기와로 된 누정도 있었다고. 자천대 옆에는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연못이 있었고 석양 무렵 서해바다가 노을로 붉게 물들면 절경이 최고조에 달했다 한다.

 

최치원은 '돼지 최씨' 시조


고운 최치원(857~?)은 '우화등선'(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한 대학자로 알려진다. 열셋에 당나라에 유학, 열여덟에 과거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다. 당나라 멸망 계기가 됐던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뛰어난 문장으로 '토황소격문'을 올려 난을 평정하였다. 885년 귀국하여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진성여왕에게 직언(시무십여조)하는 등 개혁을 꿈꿨던 인물로 전해진다.


군산지역 전설과 고문헌에 따르면 최치원은 신라 헌안왕 1년(857) 군산(옥구군 내초도)에서 출생하였다. 신라 무관이었던 아버지가 오식도 수군장으로 근무하였고, 이때 최치원이 내초도 '금돈시굴'(토굴)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바닷가 모래사장에 손가락으로 글씨 연습을 하였고, 자천대(바위산)에 올라 글을 읽었는데, 글 읽는 소리가 당나라 천자에게까지 들렸다고 한다.


최치원이 단을 쌓고 글을 읽으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신시도 대각산 월영대(월영봉) 전설도 내려온다. 이처럼 군산 지역에는 최치원 관련 전설과 고문헌이 다수 전해진다. 특히 동화로도 만들어진 '금돈시굴 전설'에 따라 군산에서는 예로부터 '경주 최씨'를 '돼지 최씨'로 부른다. 최치원 아버지가 사냥을 나갔다가 황금돼지에게 끌려가 토굴에 함께 살면서 낳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자료출처: <군산답사 여행의 길잡이>(김중규 지음), <군산시사>(2000년) 上권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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