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뉴스] 추광규 기자 = 이성순, 김태촌, 김용남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건달(?) 세계를 걷다 신앙생활을 접했다는 점이다. 시라소니 이성순의 말년은 돈독한 신앙생활로 유명하다. 범서방파의 김태촌 또한 그의 영정 앞에 놓인 위패에는 ‘고 김태촌 집사’라고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의 용팔이 ‘김용남’씨가 목회자로서 그 첫발을 내딛었다. 2014년 12월 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상가 건물 2층에 ‘강남사랑의교회’ 입당 예배를 드리고 교회 개척에 나섰기 때문.
‘용팔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김용남. 그는 어떤 계기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후 강남구에 교회를 개척하고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까지 걷게 된 걸까? 목회자로의 변신은 몇몇 사람들 처럼 이 직분을 신분세탁용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인터뷰는 지난 11일(일) 그가 개척한후 담임목사를 맡고 있는 ‘강남사랑의교회’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목사님께서는 지난해 목사안수를 받자마자 사랑의교회 당회실 방화미수사건과 관련 사흘 만에 법정구속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 말해 달라. “방화미수 사건은 서초동 사랑의교회 분규와 관련해 2013년 6월 30일 주일 오전 발생했다. 이날 제가 경유를 사들고 분신을 꾀하면서 사람들을 위협했다는 혐의였다. 이 사건과 관련 2014년 3월 27일 법정 구속된 후 70여일만에 나왔다.
-방화미수사건은 어떻게 발생한 것인가? “제가 2012년 12월경 교회를 가던 중 언덕길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진 적 있다. 병원 근처에서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 예배를 보고 있는 중인데 모교회인 서초동 사랑의교회에 가고 싶어졌다.
2013년 2월쯤 되었을 것 같은데 사랑의교회로 가서 아침 8시에 예배를 보고 있는데 밖이 굉장히 시끄러웠다. 사랑의교회 같은 경우 특별새벽 기도 때에는 메달을 주는데 그 사람들이 이 메달을 마당에 던지면서 ‘오정현 목사는 나가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저는 목사님은 섬겨야 한다고 배웠는데 그 분들이 그렇게 소란을 피우길래 이단들이 와 가지고 난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저라도 교회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으로 돌아간 후 치료를 더 받아야만 하지만 서둘러 깁스를 풀었다. 그 후 ‘용서’라는 프로그램을 갔다 왔는데도 여전히 마당에서 그 분들이 집회를 하고 있었다.
제가 그 분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니 교회 부목사님들은 관심을 갖지 말라고 애써 말렸다. 오래 못갈 것 이라면서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 성격상 관심을 완전히 끊을 수 는 없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제가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데 그 분들은 계속 나쁜 소리만 하더라. 이상한 유인물을 만들어 어린 학생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뿌리는 행위를 했다.
제가 그 분들에게 그러시지 말고 기도로 해결하자고 말했음에도 저를 계속해서 자극했다. 심지어 그 분들은 제가 오정현 목사님의 사주를 받아서 자신들을 방해한다는 말을 지어내서 유인물을 돌리더라.
계속해서 약을 올리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장로님들을 찾아갔다. '장로님들이 이런 문제를 만들었으니 책임지고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것'아니냐고 항의했다. 우리 성도들은 기도 하면서 마음고생 하고 있는데 장로님들이 나서서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였다.
그쪽에도 장로님들이 계시고 은퇴한 장로님들도 계셨다. 이분들에게도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장로님들은 나서지를 않았다. 말로 해서는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욱 하는 성미가 치솟았다. 그렇다고 주먹을 휘두를 수 는 없고 해서 생각나는 것이 석유를 가지고 가서 겁을 주자, 이렇게라도 겁을 주면 일을 빨리 처리할 것 아니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날 저는 위협만 주고자 하는 목적이었기에 ‘라이터’는 가지고 가지를 않았었다. 만약 제가 라이터를 가지고 갔었다면 지난해 3월 법정 구속된 후 70일 만에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계기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가? “제가 1998년 대전의 한 호텔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던 중 아끼던 후배한테 배신을 당했었다. 이로 인해 호텔 나이트클럽 운영권도 뺏기고 여기에 더해 폭력을 행사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교도소를 갔다 온 후 얼마 안되었을 때 이었다.
당시 저는 20억 가까운 재산을 빼앗아간 그 후배를 복수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칼을 갈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해서 범죄를 실행하려고 하는데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었다. 제게는 가정 문제도 있으니 편하게 살게는 만들어 놓고 가야할 것 아닌가 해서 돈을 구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제 뜻대로 안되고 큰돈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루하루 쪼들리면서 경제적으로 곤궁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옥경이’를 작사하신 조운파 선생님이 저희 사무실 옆에 계셨는데 그 분이 돈이 조금 있는 것 같아서 접촉을 했었다. 제가 이분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을 했었다. 물론 갚을 생각은 없었다. 당시 제 기억으로 1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이분께서 자신에게 그런 돈은 없고 100만원은 어떻게 만들어 보시겠다면서 대신해서 제게 교회를 한번 가자고 하셨다.
제 나와바리가 강남이라서 그 근방을 숱하게 다니곤 했어도 사랑의교회가 그 곳에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렇게 해서 100만원 때문에 2002년 10월경 교회 문턱을 넘었다.
하지만 그날 교회로 가서 옥한흠 목사님을 처음 뵙게 되었는데 제게 진한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저 같은 사람도 옥 목사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옥 목사님을 닮고 싶다는 강한 욕심이 생겼다. 그런 감동을 느낀 후 그 다음 주에도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교회를 한번 두 번 다니는 횟수가 쌓일수록 가슴속의 복수심도 차차 엷어져 갔다.
저는 사랑의교회를 12년간을 다녔다. 성도로 시작한 후 집사 직분을 받았다. 옥한흠 목사님은 저에게 안수도 해주셨고 제가 답답하거나 문제가 생기곤 하면 말씀으로 은혜 받게 하는 등 큰 도움을 주셨다. 옥 목사님은 제가 교통봉사를 하고 있으면 차를 세워서 고생한다며 수고가 많다고 말씀을 해주시니 저는 너무나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저는 더욱 더 열심히 교회를 다닐 수 있었다.”
-신앙심이 깊어진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성경을 필사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저는 체육특기생으로 전문대학까지 다녔지만 맞춤법조차 제대로 몰랐다. 교도소 수감 중일 때도 귀찮아서 편지한통 쓰지를 않았었다.
하지만 건달세계를 끊으려면 성경을 손으로 써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 시작해 2년간을 거의 집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세속과 인연을 끊기 위해 먼저 전화부터 끊었다. 성경필사를 시작한 후 손가락의 피부가 벗겨지면서 진물이 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제게는 조그만 기적들이 일어났다. 제 코는 40년 이상 막혀 있었고 귀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와 365일 멈추지를 않았는데 그 같은 증상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육신의 아픔이 치유된 것 뿐 아니라 마음속의 근심 걱정은 물론이고 담배와 술도 한꺼번에 끊게 만들어 주셨다.
또한 어느 날인가 눈을 감고 있는데 마치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제 선배들의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환상을 겪었다. 그런데 이분들이 제 환상속 영상에서 다 죽고 나 혼자만 살려줬다. 저는 이 일을 저 혼자만 예수님 믿지 말고 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목회자 과정은 어떻게 해서 밟게 되었는가? “사랑의 교회 집사를 하면서 간증집회를 많이 다녔다. 그 과정에서 여러 목사님들이 저에게 목회자 과정을 권유했다. 목회자가 되면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어떻게 목회를 하겠느냐고 손사래를 쳤었다.
하지만 목사님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다. 결정적인 계기는 제 후배가 '형님 하십시오‘라고 권유를 해 용기를 내서 목회자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서울 사당동 총회신학대학원을 1학년으로 입학해 졸업하고 지난해 3월 목사고시를 본 후 5월24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서대문) 성도순복음교회(박성배 목사)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번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서초동 사랑의교회나 오정현 목사님으로 부터는 인적 물적 지원을 전혀 받은바 없다. 다만 교회 이름만 ‘강남사랑의교회’로 사용할 수 있었다.
현재 등록교인은 4~50명인데 대부분 믿지 않는 성도들이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은 없고 교회 나가다가 중도에 그만둔 분들이 다시 한 번 교회를 다녀야 겠다고 해서 나오시는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물적으로는 어릴 적 친구인 양주에서 하늘안 추모공원을 운영하고 있는 노덕봉 협동장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
-특이한 과거를 가지시고 목회자의 길을 걷고 계시는데 영적으로 다른 목사님들과 비교하시면 어떻게 본인 스스로를 평가 하시겠는지. “저의 영적인 장점은 학교폭력 조직폭력 등으로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을 잘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사람들 가운데 교회를 나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분들은 실족들을 많이 당한다. 그러한 마음을 저는 잘 안다. 함께 잠도 자고 밥도 먹으면서 사랑을 심어줄 수 있다.
저는 그런 마음으로 특수 사역을 했는데 요즘에도 전화가 많이 온다. 그러면 저는 오라고 말을 하고 또 그 사람들은 온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교회에 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저는 그런 분들을 좀 더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고문경찰관 이근안이나 양은이파 조양은 등 과거의 어두운 과거를 가지셨던 분들이 소위 신분세탁을 위해 목회자의 길을 걸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목사님께서는 이런 부분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지를 말씀해 달라. “이해를 한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면 비난하는 사람들의 잘못도 있다. 제 자신이 교회를 다니고 있고 목회까지 시작했지만 답답한 경우가 그 사람들이 겉으로는 '잘 오셨다'고 말하고는 뒤로 돌아서면 '깡패가 믿으면 얼마나 믿겠어!'라고 이중적 태도를 보여 큰 상처를 받곤했다.
하지만 저 같이 옥한흠 목사님 같으신 분을 만나서 제대로 교육을 받았더라면 가라고 해도 안 갔을 것이다. 그분들이 신앙세계에 빠져든 것은 분명 순수한 마음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들의 순수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고, 결국 좌절하는 가운데 세상 유혹에 빠져들면서 그런 비판을 받게되는 것 같다.
기실 저 같은 경우에도 유혹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이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승리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다. 세상이 저를 향해 손가락질 하더라도 세상 유혹과 싸움을 해서 이기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저작권자 ⓒ 신문고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