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사랑의 불꽃, '로자 룩셈부르크'

연인에게만 여자였던, 돌덩이처럼 단단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고종석 | 기사입력 2009/01/17 [05:59]

혁명과 사랑의 불꽃, '로자 룩셈부르크'

연인에게만 여자였던, 돌덩이처럼 단단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고종석 | 입력 : 2009/01/17 [05:59]
혁명의 희망이 가뭇없이 사라진 시대에 새된 목소리로 혁명을 구가하는 것만큼 허영심을 채워주는 일도 찾기 어렵다.
 
그 허영 놀이에는 아무런 위험도 뒤따르지 않는다. 비밀경찰의 감시도, 구사대의 폭력도, 고문의 공포도, 생명의 위협도.

그 혁명은 현실 바깥의(차라리 중심부의) 패션이고 놀이다. 체 게바라의 초상을 아로새긴 티셔츠가 한 시절 세상을 휩쓴 것도 그런 '안전한' 허영 놀이였을 테다.
 
그 옷을 입은 누구도 실제로 체 게바라처럼 되고자 하지는 않았을 게다. 되고 싶어도 될 길이 (거의) 없었다. 혁명은 과거사다.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가상의 서사다. 그래서 아무리 과격한 혁명의 언어를 발설해도 잡아갈 '에이전트'가 없다. 외려 유행에 민감한 '에이전트'라면, 제 아이에게 게바라 티셔츠를 입힐 것이다.

티셔츠에 아로새겨진 게바라는 체제의 안녕을 전혀 위협하지 않으면서, 진보, 혁명적 낭만주의, 세련된 지성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것은 지적 도덕적 데커레이션이었고, 이상주의자의 거짓 신분증이었다.

그래서 체제는 게바라 바람을 내버려두었다. 대학 강단의 '좌익' 교수가 우익 신문에 게바라를 기리는 글을 써도, 젊은이들이 그 '과격한' 혁명가의 '티셔츠 동지'가 되어도, 체제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자본에 빨려 들어간 게바라라는 이름은 임박한 혁명의 표징이 아니라 사라진 혁명의 전설이었으므로. 그것도 벌써 한 세대 전 얘기다.

게바라 티셔츠를 팔아 돈을 번 의류업자에게 나는 또 하나의 세련된 아이콘을 소개하고 싶다. 게바라 못지않은, 아니 게바라를 넘어서는 소비사회의 매력적 혁명 아이콘을. 이번엔 여자다.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라는 이름의 여자. 명민한 자본가들이 아직까지 이 여자를 그대로 놓아둔 것이 신기하다.

우선 나부터도 허영심이 '체'보다 '로자' 쪽에 훨씬 더 쏠리는데 말이다. 그녀는 파리코뮌의 해, 그 코뮌의 달에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단 봉기(고대 로마의 노예봉기 지도자 이름에서 따온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다) 때 죽었다. 그 죽음도 게바라보다 더 극적이다.

'체'는 미국 비밀경찰이 지휘하는 볼리비아 군인에게 총살당했지만, '로자'는 한 때의 동지가 집권한 '제2의 조국'에서 군인의 개머리판에 이마를 맞고 확인사살을 당한 뒤, 베를린의 운하에 내던져졌다.

그 죽음을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했다.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그녀의 몸이 쉬는 곳마저 알 수 없으니/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그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이 그녀를 처형했다네." 몇 달 후 로자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올랐을 때 그녀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했다. 그 '붉은 로자'는 '피투성이 로자'였다.

로자의 삶도 게바라 못지않게 극적이었다. 그녀는 러시아 국적을 지닌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태어났고, 바르샤바의 중학생 시절 '프롤레타리아당'의 세포에 가입했고, 대학에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조국을 떠나 스위스의 취리히로 건너갔고, 위장 결혼을 통해 독일 국적을 얻었고, 러시아와 폴란드와 독일 세 나라의 혁명 운동에 발을 담갔다.

그녀는 친구보다 적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다. 그 적은 부자들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도 있었다.

▶  1918년 가을 독일공산당(kpd)창립일 준비를 위해서 모인 스파르쿠스당. 카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로자 룩셈부르크외    


사회민주주의운동을 폴란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수행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함으로써, 그녀는 폴란드 동료들에게서 미움을 받았다. 로자가 선택한 '진짜' 조국은 폴란드도, 독일도, 러시아도, 가상의 시오니스트 국가도 아니었다. 로자의 조국은 프롤레타리아였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철저한 국제주의자로 일관했다.

자신의 당, 독일사회민주당이 국방예산 증액을 거들자 그녀는 이를 격렬히 비판함으로써 당 동료들로부터 소외되었다. 애국주의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 세계전쟁 시기에 반전주의자로 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국제주의를 버리고 애국주의에 투항했다.

로자는 감옥 안팎에서 그런 훼절을 통렬히 비판한 극소수의 사회주의자에 속했다. 그녀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한쪽 발을 저는 유대인이었는데, 이것마저도 (반동진영으로부터만이 아니라 소위 혁명진영으로부터) 야비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 죽음을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했다."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그녀의 몸이 쉬는 곳마저 알 수 없으니/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그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이 그녀를 처형했다네." 몇 달 후
로자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올랐을 때 그녀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했다. 그 '붉은 로자'는 '피투성이 로자'였다.


그 시절 사회주의의 지도적 혁명가들이 흔히 그랬듯, 로자도 학자와 기자를 겸했다. 그는 < 자본축적론 > 과 <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 를 쓴 경제학자였고, < 노이에 차이트 > < 라이프치히 폴크스차이퉁 > < 로테 파네 > 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 쉴 새 없이 글을 써댄 기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펜은 혁명을 선동하는 글보다 사랑을 갈구하고 고백하는 글에 훨씬 더 많은 잉크를 소비했다. 그 연애편지들의 수취인 가운데 로자가 제 가슴 가장 깊이 담은 사람은 그의 스승이자 동지이자 애인이자 사실상의 남편이었던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레오 요기헤스였다.

로자의 친구였던 루이제 카우츠키(카를 카우츠키의 아내)의 레토릭에 따르면 "로자의 불같은 성격은 레오라는 기름을 만나 타오를 수 있었다."  계급의 적에게 돌덩이처럼 단단했던 로자는 레오 앞에서 수줍은 아가씨가 되었다. 로자가 품었던 여러 모순 가운데 첫 번째가 레오와의 관계였다.

사민당의 가까운 동료들에게까지 가차없었던 그의 필봉은 레오에게 쓴 연애편지에선 한없이 말랑말랑한 응석으로 무뎌졌다. 그녀가 '디오디오'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레오는 운동의 선배였지만 주로 지하활동에 종사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로자만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독립 여성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로자가 레오 앞에서만은 순한 양이 되었다. 외면적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 로자의 공적(公的) 짝은 한 날 거의 같은 시각에 살해된 카를 리히프크네히트였지만, 로자의 로맨스 속에서 그 자리는 그들보다 두 달 쯤 뒤에 처형된 레오의 것이었다.


그 시절엔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을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쓰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베른슈타인 같은 수정주의자들도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 일컬었지만, 대체로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를 뜻했다.

독일 사민당의 전쟁 지지에 환멸을 느껴 탈당한 동료들과 함께 독일 공산당을 창건한 로자는 내심 공산주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타협적, 혁명적, 국제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로자는 일생동안 공산주의자였다.

나는 로자의 만년에 러시아에서 실현되기 시작한 공산주의를 혐오한다. 그 점에서 나는 로자주의자가 아니다. 그런데 로자의 사회적 전망에는 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는 레닌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지만, 10월혁명을 전후한 레닌의 독선적 행태에 부정적이었다.

이를테면 레닌이 독일군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로 잠입한 것이나, 제국주의 독일과 굴욕적 정전협정을 맺은 것 따위는 로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녀의 반전주의는 흐릿해졌다. 주로 선전선동의 일을 맡았으면서도, 로자는 레닌의 전위당 이론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하자면 로자에게는 민중주의 편향이 있었다.

그러나 레닌이 로자를 가장 크게 실망시킨 일은 10월혁명 이후에 일어났다. 실질적 소수파였던 볼셰비키(다수파)를 이끌고 혁명에 성공한 뒤 실시한 총선에서 패배하자 레닌은 이를 힘으로 무효화했고, 로자는 서유럽의 부르주아 정치인들 이상으로 신랄하게 레닌을 비판했다.

그녀는 그 때 "일당의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그 당원들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자유가 아니다"라고 일갈하며 소비에트 체제의 경직화를 우려했다.

로자에게 자유란,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 점에서 그녀는 '위대한 반대자'라 불렸던 미국 법률가 올리버 홈스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는 자신이 죽은 뒤 70년간 존속했던 사회주의 사회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를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녀를 죽인 것은 군부와 결탁해 정권을 장악한 사민당 우파였다. 전쟁에 찬성하고 군부와 결탁한 사민당 우파는 여전히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1919년 상황에선 독일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도 사회민주주의자였고, 그가 살해한 로자 룩셈부르크도 사회민주주의자였고, 그녀가 비판한 레닌도 사회민주주의자였다. 그 세 사회민주주의의 내실은 전혀 달랐는데도 말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자유'의 한계라면, 나는 잠재적 로자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충실한 로자주의자는 못될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이상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로 남고 싶다고 되뇌었지만, 나는 현실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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