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사진예술 뿌리 정착시킨 고 채원석
카메라와 필름에서 최고 메커니즘 찾았던 아버지

조종안 | 기사입력 2015/02/04 [07:09]

군산에 사진예술 뿌리 정착시킨 고 채원석
카메라와 필름에서 최고 메커니즘 찾았던 아버지

조종안 | 입력 : 2015/02/04 [07:09]

사진기(카메라)는 1839년 프랑스인 다게르가 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기능을 보완한 각종 카메라가 개발된다. 1888년 조지 이스트먼(코닥 설립자)이 아마추어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소형카메라를 내놓으면서 대중화된다. 한국의 사진 역사는 신미양요(1871) 당시 미 해병 종군사진사가 조선 병사를 찍은 사진이 최초라고 기록은 전한다.
 
군산 사람들은 카메라를 언제 처음 봤을까. 궁금증은 1894년 봄 군산을 처음 답사했던 서양선교사들 자료에서 실마리가 풀린다. 그들이 지금의 구암동산에 군산스테이션을 개설하고, 보고서에 사진(필름)을 첨부해 본부(미국)로 보내기 시작한 것. 지금 우리가 보는 구한말 구암동 거리 모습, 초기 구암병원 건물 등이 당시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으로 알려진다.
 
<군산시사>(2000)는 '군산의 사진 역사는 홍건직(1920~1968)으로 비롯되었다'고 적고 있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 군산지부 50년사>(2012)도 '군산에서 처음 예술사진을 시작한 사람은 1951년 1·4후퇴 때 군산에 피난 차 정착한 화가 홍건직 선생님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이전에는 군산에 사진가가 없었다는 얘긴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군산 출신으로 평생을 사진 예술에 몸담았던 채원석(1918~2007)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 기자말 

 

 

▲ 은파호수공원으로 출사 나갔다가 한가로움을 즐기는 채원석.(1985년)     ©조종안

 

 


한국 리얼리즘사진 1세대를 대표하는 채원석(蔡元錫). 그는 1918년(호적 1922) 군산시 성산면 도암리에서 장남(1남 2녀)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군산 선양동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다. 집안이 부유해 어렵잖게 서울로 유학,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했다. 이웃집 아저씨가 메고 다니는 카메라를 보며 일찍이 사진에 관심을 둔다. 그는 1932년 일본 동경 아트사진공업사 실버 카메라회가 주최하는 공모전에 입상(가작)한다. 나이 열다섯에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
 
채원석은 조선 왕족 출신으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사진 예술 초창기 텃밭을 일군 이해선(1905~1983) 선생에게 사진 수업을 받았다. 소년 시절부터 불타올랐던 그의 창작 열기는 1947년 대한사진예술연구회가 주최하는 제2회 사진공모전 입선으로 빛을 발한다. 그는 해방정국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3회(1948)와 4회(1949) 연거푸 입선한다. 당시 입선은 회원 추천이어서 의미를 더했다.
 
1949년 서울인상사진연구회가 주최한 제1회 전국 어린이사진콘테스트에서 입선한다. 이듬해(1950) 4월에는 제2회 콘테스트에서 입상(가작)하는 기염을 토한다.

 

 

▲ 남도극장(국도극장) 부근 영화카메라 앞에서 지인들과(1960년대)     © 조종안

 

 


예술사진이 걸음마 단계 시절이었고, 전쟁 후유증으로 가난까지 겹쳐 대중에게 '작품사진'이라는 말이 생경하게 느껴지던 1950년대 초. 그는 전국규모 사진공모전과 콘테스트 수상 경력을 바탕으로 1953년 봄 군산시 선양동(구 신호약국 자리)에 자그만 셋집을 얻어 영화카메라(DP-E점)를 개업한다.


영화카메라는 필름도 팔고 현상·인화를 전문으로 하는 사진현상소였다. 그는 선양동에서 중앙로(구 조흥은행 옆), 개복동 남도극장(국도극장) 부근 등으로 이사 다니면서도 1952년 11월 출범한 군산아마사우회(초대회장 김종열) 연구부장으로 북에서 내려온 홍건직 홍보부장과 투톱을 이루며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56년 전국 백화(白花)사진콘테스트 특선을 비롯해 한국사진작가협회 공모전에 2년(1957~1958) 연속 입선한다.


"동네 아이들에게 큰소리치던 기억 새로워"


아래는 채원석의 장남으로 군산 화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양화가 채억(56)씨 추억담이다. 

 

▲ 채 억 작가가 주차장으로 변한 군산 선양동 산동네를 가리키고 있다.     © 조종안

 


"제가 어렸을 때는 선양동 산동네에서 살았죠. 집이 가난했거든요. 늘 생활 속에서 주제를 찾으셨던 아버지는 외출할 때마다 수동식 소형카메라 '롤라이 35'를 챙기셨죠. 출사와 공모전 심사 등으로 출장도 잦았고요. 현상, 인화, 트리밍 등을 하는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느껴지면서 뇌리에 저장된 사진 관련 숫자들 5,6/60, 8/250···. 동네 아이들과 싸울 때 셔터스피드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런 것도 모르는 것들이 까분다고 큰소리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웃음)
 
아버지는 현상소를 차려놓고도 수입보다 작품에 열정을 더 쏟았어요. 거리의 빛, 피사체와 피사체 사이 공간이용 그리고 휴머니즘. 당시 사진전문가와 작가 선생님들은 아버지를 '2호 인화지의 우리나라 최고 사진가'라고 평하셨죠.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보기에도 아버지는 빛 조절 테크닉이 감각적이었어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작품을 만드셨는데, 열 번 실패해도 포기를 모르는 분이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아졌고, 암실에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어요. 부자였던 할아버지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 이유도 사진가가 '환쟁이'로 멸시받던 시절 사진에 빠졌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셋집을 전전해야 했고, 어머니와 자주 싸우셨죠. 손님이 사진을 찾아가야 쌀을 살 수 있는데, 아버지는 작품사진에만 몰두하시니···. 어머니가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결국 어머니가 사진을 배워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죠.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 학교나 유치원 입학식, 졸업식장 등을 찾아다녔는데 누나는 어깨에 자그만 수금가방을 둘러메고 영수증을 끊어주고, 어머니는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죠. 저는 옆에서 보초병처럼 지키고요. (웃음)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오면 방바닥에 10원짜리 100원짜리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일 년 내내 졸업식만 있으면 좋겠다며 돈을 셌는데, 라면 하나에 10원이던 그때는 세상 부러울 게 없었죠."
 
학창시절 아버지 작품 디스플레이도 하고, 액자 만드는 작업을 도와드렸다는 채억씨는 "어두컴컴한 암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과 역겨운 약냄새, 전시회를 앞두고 작품을 준비하는 아버지 모습 등을 지켜보며 사진과도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면서 "결코 포기를 몰랐던 아버지는 수동카메라와 흑백필름에서 최고의 메커니즘을 찾았던 것 같다"라며 추억을 더듬는다.
 
작품에만 몰두했던 아버지, 예술가의 습성인 듯
 
채원석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 끊임없는 연구와 창작으로 1966년 호남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을 거쳐 1967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개최된 한일사진교류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는다. 1968년 동아국제사진살롱 입선, 1969년 제18회 국전 등에 입선한 그는 전주(1969)와 군산(1970)을 오가며 개인전을 여는 등 1970년대 이전에 지도자급 사진가로서 위상을 다진다.
 

▲ 1969년 제18회 국전 입선작 제목: <사투>     © 조종안


그중 1969년 국전 입선작 <사투>(死鬪)는 동물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현장으로 개미들과 애벌레의 전투 장면을 담았다. 당시 작가들도 호평한 수준작으로 1980년대 중앙지 신문들이 기사를 작성할 때 자료사진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채억씨는 "지금도 사람들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으로 알고 놀라면서 순간을 어떻게 포착했는지 궁금하다고 하는데, 사실은 사진이 나오는 과정을 역순으로 얻어낸 창작"이라고 귀띔한다.
 
1971년에는 현상소를 군산시 중앙로 1가(군산우체국 건너편 건물)로 이전한다. 이전과 함께 영화카메라 간판을 내리고 '채원석 사진 스튜디오'를 내건다.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채원석 사진연구소'도 그때 개설한다. 아래는 채억씨가 전하는 당시 스튜디오 분위기다.
 
"스튜디오는 살림집이 딸린 2층이었죠. 비좁진 않았지만, 항상 사람들로 북적댔습니다. 술 담배를 전혀 안 하셨던 아버지는 손님들과 커피 마시며 대화하는 시간을 낙으로 삼았거든요. 누구에게나 커피를 권했고, 필름을 현상하러 오는 손님보다 사진을 배우러 오는 제자가 더 많았습니다. 주말에는 제자들이 스튜디오에 모여 아버지와 커피를 마시고 출사를 나갔죠. 오로지 작품에만 몰두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예술가 본연의 습성인 듯싶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전시장에 갔던 추억들도 시나브로 떠오릅니다. 1960~1970년대는 전시장이라고 해봐야 기껏 다방이었죠. 개복동 예술의 거리에 있던 비둘기다방, 상공회의소 지하에 있던 김다방, 장미동에 돌다방, 제일다방, 군산우체국 옆 아담다방, 구 시청 옆 신세계다방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다방 마담들은 큐레이터 역할도 했어요. 마담들이 차만 파는 게 아니라 작품 관리도 하고, 소개도 하고, 평가도 했거든요. (웃음)" 
 
전북에서 유일하게 문예진흥기금 받는 사진가 되다
 
1970년대 들어 국내 사진계는 변화의 바람이 일어난다. 10년 동안 대립각을 세우며 활동하던 한국창작사진협회(창협)와 한국사진작가협회(사협)가 1971년 7월 하나로 통합된다. 군산에서도 '창협'에 소속됐던 채원석, 신철균, 문길수, 원제창 등 11명이 '사협' 군산지부로 복귀하고 그 해 12월 전시회를 개최한다.
 

▲ 채원석 회갑기념전 팸플릿 표지     © 조종안


1974년 채원석은 한국사진작가협회 군산지부장(중앙 운영위원)에 피선된다. 1975년 각종 공모전 및 교류전 심사위원과 심사위원장을 맡으면서 대학에도 출강을 나간다. 1976년 한국 사진문화상(공로상)을 수상하고, 1980년에는 선후배와 제자들의 축하를 받으며 군산 빅토리호텔 전시실에서 회갑기념전(11월 29일~12월 1일)을 연다.


채원석은 그 해 송년 모임에서 "1980년은 감당하기 힘든 혼란과 격변, 그리고 고난을 헤치고 새 시대를 이루어 나가려는 의지와 노력으로 가득 찼던, 우리 국민에게는 실로 벅찬 한해였다"며 "이러한 역사의 전환점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에 더욱 정진하고 그 무한한 창조력을 사회의 거울로 제시하는 것이 창작인들의 의무일 것"이라고 말한다.
 
채원석은 한국창작사진협회 중앙운영위원(1964)과 대표위원(1969), 전북지부장(1969) 등을 지냈다. 전라북도 도전 사진부문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1969~1980),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1979, 1986),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운영자문위원과 국전(사진 부문)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 리얼리즘 사진 발전에 한 획을 긋는다.
 

▲ 복숭아 과수원에서 촬영 기법을 지도하는 채원석(왼쪽)     © 조종안


1968년 가을, 전북 최초 아마추어 사진클럽인 '군산일요사진동호회' 창립을 시작으로 1970년 창작사진동인 '영 70', '포커스', 1982년에는 '군산 펜탁스 Family' 등을 만들어 고향의 사진 예술 발전과 후진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전북 군산·전주, 충남 서천군 지역에서 직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사진인은 수백을 헤아린다.
 
1992년에는 공적을 인정받아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정부로부터 문예진흥기금(사진연구비)을 지원받는 사진가가 된다. 초기에는 매월 40만 원씩 지급되다가 국민의 정부 출범(1998) 후 50% 인상되어 60만 원씩 받았다. 팔순을 넘겨서도 외출할 때마다 카메라를 손에 쥐고 다니며 창작에 몰두하던 그는 2007년 89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다.
 
채원석의 작품은 한 시대를 반영하는 리얼리즘 사진이 주를 이룬다. 또한, 과거 기억을 되살려내고 반추하는, 그래서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이 없고 친근하고 따뜻하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대부분 작품이 생활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게 특징이다.
 
원로 사진작가 문길수(86)씨는 "군산 사진인으로 아마추어 사진의 길목을 열어준 홍건직 선생과 인물을 주인공으로 거리 사진을 즐기시던 채원석 선생님을 존경한다"며 "특히 채 선생님은 사진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제자도 많이 배출하셨고, 복잡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통해 우리의 삶을 서정적이고 리얼하게 보여준 작가였다"고 평가했다.
 

▲ 채원석 유작. 제목: 街(거리)     © 조종안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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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ain bow 2015/02/09 [22:25] 수정 | 삭제
  • 흑백사진 참 멋지죠 저는 칼라사진도 흑백으로 바꾸어 사진을 빼는데 예전의 흑백사진들이 더 좋은거 같습니다. 채원석 선생님께서 흑백사진의 선두셨다니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어서 영광입니다.
  • 아나로그 2015/02/06 [23:29] 수정 | 삭제
  • 채원석 선생님은 참 멋진분이셨군요
    오로지 예술만을 추구하신...
    이런분들이 계시었기에 오늘의 예술사진이 있군요..
    개척자 프론티어...채원석 선생님 존경합니다
  • 이사도라 2015/02/04 [23:05] 수정 | 삭제
  • 해방후 및 우리나라의 사진역사가 그대로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드리고 이런 진실된 역사적 자료들이 잘 보존되어 우리나라의 사진 문화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