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당에 대한 소고(小考)… 2편 노무현

[정치해설] 무차별적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과 진영도 죽인다

임두만 | 기사입력 2015/03/26 [16:47]

탈당에 대한 소고(小考)… 2편 노무현

[정치해설] 무차별적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과 진영도 죽인다

임두만 | 입력 : 2015/03/26 [16:47]

2편은 누구나 짐작했겠지만 노무현이다. 노무현도 현역 정치인으로 총 4회의 탈당 경력이 있다. 하지만 마지막 탈당 경력인 열린우리당 탈당은 분석에 의미가 없다. 그 외 나머지 3회의 탈당은 노무현으로서도 그의 지지자들로서도 매우 당당한 탈당이며,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보는 각도에 따라 이 탈당 행보를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노무현도 앞서 기록한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탈당과 입당을 통한 정치변혁을 꿈꿨으며 실제로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의 꿈을 이뤄냈다고 본다.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글도 읽는 사람 스스로의 판단이 필요하다. 나는 있었던 사실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 신문고 뉴스 자료사진...노무현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뒤  벌어진 서울 시청 앞 촛불집회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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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정치인생에서 첫 번째 탈당은 1990년 1월 22일 단행된 3당 합당 후 민자당 창당 때문이다. 당시 노무현이 소속된 통일민주당은 1월 22일 민자당과 합당하므로 소멸되었다. 앞서 김영삼 총재는 노태우의 민정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는데 합의했다고 발표하며, 의원총회의 추인을 부탁했으나 노무현 의원은 “이의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는 등 반대했었다.

 

하지만 그 같은 반대에도 이 합당안은 추인되었고 이 합당이 성사되어 민자당이 창당되므로 소멸했다. 이에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장석화 이철 등 합당 반대파 의원 5명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잔류, 무소속 홍사덕, 신정당 박찬종 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나섰다. 그리고 이들은 이부영 홍성우 등 재야세력 명망가들을 영입, 정당의 모양새를 갖췄다. 이어서 끝내 김대중이 이끄는 정당인 신민주연합당과 합당, 통합민주당으로 거듭났다.

 

2

김대중이 1995년에 정계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노무현은 '전근대적 정치 행태'라고 극렬 비난했다. 그러면서 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을 당시 재야인사들이 추진하던 개혁신당과 합당시켜 1996년 총선에서 총 진군하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민주당은 전국에서 15석을 얻는데 그쳐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했다.

 

당시 노무현은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노무현은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5대 대선 가도에서 통합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순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했다.

 

이때 노무현은 통합민주당을 탈당한다. 당시 노무현은 김원기, 김정길 등과 함께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을 심판하여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해야 한다"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선택했다. 1997년 11월의 일이었다. 반면 이부영 등은 “3김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며 신한국당을 선택했고, 노무현은 자신의 정치인생에서 두 번째 탈당 및 입당 기록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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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29일, 노무현의 세 번째 탈당이 이뤄진다. 이때는 대통령이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것이다. 이에 새천년민주당은 극렬 비난했으나 노무현 지지자들은 극구 환영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탈당은 예견된 사안이었다. 그에 앞서 37명의 의원들이 여당인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당 창당에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노 대통령의 탈당에 대해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노 대통령의 탈당 결정은 주요 국정과제인 경제 민생문제에 전념하기 위한 것으로 내년 4월 총선거를 앞두고 당적 문제가 소모적 정치공세가 되는 상황에서 정치쟁점화 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며 “노 대통령이 신당인 국민참여 통합신당(가칭)에 참여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결과부터 말하면 노 대통령은 2004년 5월 20일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그 또한 노무현 다운 전격적이었다.

 

앞서 3월 12일, 국회는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의 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이로서 노무현의 대통령 직무는 즉각 중지되었다. 하지만 이 탄핵안 가결은 표결 당일인 3월 12일부터 3월 27일까지 전국을 촛불의 바다로 만들었다. 이 여세는 4월 15일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노무현 지지신당인 열린우리당을 단숨에 152석을 차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대통령도 여당도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첫 회동을 가졌다. 당적도 없는 무소속 대통령이 선거에서 이긴 원내 1당의 당 지도부와 가진 회동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입당원서를 써달라는 신기남 당 중앙의장의 요청에 자필로 입당원서를 쓰고 서명했다.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에게 수석당원 자격을 부여했다. 이로써 노 대통령은 2003년 9월 29일 민주당을 탈당한지 8달 만에 다시 당적을 갖게 되었다.

 

이 후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 막판 다시 열린우리당을 탈당하지만 이때는 이미 당의 주류세력에게 밀려난 형국이므로 그의 탈당 경력에 삽입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노무현의 정치 역정을 논하면서 탈당을 말할 때는 이상 3회로 주지하는 것이 맞다.

 

4

여기서 중요한 팩트 하나. 2007년 3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브리핑‘에 의미심장한 글을 올렸다. 글의 제목이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오해했는가"였다. 내용은 손학규의 한나라당 탈당을 비난했던 것에 대해 "대통령 선거에서의 개인적 이해관계와 관계없이 탈당한 것이라면 용기있는 결단"이라며 "먄약 그렇다면 나의 비판은 손 전 지사를 오해한 것"이라고 썼다.

 

앞서 노 대통령은 "탈당을 하든 입당을 하든 평상시의 소신을 갖고 해야지 선거에서 불리하다고 탈당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비판했었다. 그러나 이날 글에서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기 위해 불쏘시개나 치어리더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손 전 지사의 탈당의 변"이라며 "만약 그렇다면 '원칙을 파괴하고 반칙하는 사람은 진보든 보수든 관계없이 정치인 자격이 없다'는 나의 비판은 손 전 지사를 오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즉 정치인이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기 위해 불쏘시개나 치어리더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2007년 인정한 것이다. 이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인의 탈당과 입당 등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는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선거를 앞두고 자신이 몸담았던 정당을 탈당했던 예가 적지 않다"며 탈당의 명분이 옳으면서 성공했던 사례로 1,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창당한  신민당, 2. 87년 '이민우 내각제 구상'에 반발해 탈당한 신민당 의원 78명의 통일민주당, 3.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등을 들었다. 또 "명분은 적었지만 성공한 사례"로는 95년 새정치국민회의의 창당을 꼽았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 자신과 김정길 의원 등이 90년 3당 합당에 반대해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것은 "명분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한 사례"였으며, "명분도 없고, 성공하지도 못한 유형"으로 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패하고 결과에 불복해 탈당한 이인제 의원의 국민신당 창당과 2002년 대선에서 김민석 전 의원의 민주당 탈당 등을 거론하며 "이른바 보따리 정치인들의 몰락"이라고 질타했다.

 

결론

여기서 나는 현재 친노 세력으로 부르는 새정연의 주류와 그 지지자들을 비판한다. 이들은 언제나 내가하면 로멘스 남이하면 불륜의 잣대로 진영 내 대항마들을 죽인다. 작은 차이를 침소봉대해서 아군을 죽이는 행위, 그게 민주세력 와해의 화근이다. 자르고, 부수고, 무너뜨리고 편을 갈라가면서 친노 이너서클은 강해졌는지 모르나 세력 전체는 점점 왜소해졌다. 이는 필연적으로 강고한 이너서클만 고립되어 갈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반면 보수진영은 10년을 와신상담, 손가락질 받는 이미지 탈피를 위해, 뉴라이트라는 이름까지 작명, 야금야금 세력을 키웠다. 범민주세력은 아까운 인재들이 소문도 없이 정계에서 밀려나면서 세간에 개차반으로 각인되어 가는데, 보수진영은 자체 내에서 영웅을 만들어 내는 반대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 낸 이명박과 박근혜는 연이어 대통령이 되고, 지금은 김무성이란 사실 말도 안 되는 정치인을 대안으로 키우고 있다. 홍준표 오세훈 김문수 등과 같은 이는 물론 심지어 변희재 같은 이들도 세력의 한 귀퉁이에서 야금야금 크고 있다.

 

하지만 범개혁진영은 노무현 대통령부터 강력한 대안으로 국민들에게 남아 있던 고건, 김근태, 손학규 등을 비토했다. 이에 친노 홍위병들은 노무현이란 성역(?)을 침범하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죽여버렸다. 정동영 천정배의 탈당을 두고 지금 전개되는 저들의 작전과 행태다.

 

자신들 보스 밑에 있으면 좋은 정치인이고 개혁과 변화를 말하면 죽임의 대상이다. 노무현 스스로, 문재인도 이해찬도 유시민도...그 외  입을 자처한 김창호, 양정철, 천호선, 윤태영, 조기숙,  문성근, 명계남, 심지어 한겨레 성한용, 노무현 후원회장 이기명이나 자칭 인터넷 경호실장 서영석, 그 외 수많은 장삼이사들...글줄이나 쓰고 말주변만 있으면 앞장서서 죽였다.

 

이리되면서 결국 김대중의 픽업으로 인재가 넘쳐나던 범민주 개혁진영은 지금 인재 빈곤 속에 허덕이게 되었다. 대안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할 인재가 드물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그 치졸한 저격은 멈춰야 한다.

 

위 2번에서 언급했지만 노무현도 자신이 총을 쏘았던 김대중 진영에 귀순했다. 거기서 종로라는 지역을 받아 국회의원도 했으며 장관도 하고 끝내 대통령도 되었다. 엄격히 말하면 자신이 극도로 비난하던 진영에 귀순하여 정치적 성공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다. 지금 정동영과 천정배에게 증오와 악의에 찬 비난을 하는 친노세력은 노무현의 부메랑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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