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삼청교육대'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신문고 발언대] 인권유린도 이슈가 되는 날이오길 바라며...

한일영 | 기사입력 2015/08/12 [10:57]

당신은 '삼청교육대'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신문고 발언대] 인권유린도 이슈가 되는 날이오길 바라며...

한일영 | 입력 : 2015/08/12 [10:57]

[신문고뉴스]제 나이 22살 때인(1958년생) 1980년 8월 1일 서울 성북구 삼선동 집에서 동네 국민학생들 7명을 데리고 보호자로서 서울 성동구 소재 뚝섬유원지로 놀러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아이들과 그곳에서 수영하며 신나게 놀던 중 갑자기 경찰관이 저에게 오더니 불심검문을 당한 후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성동경찰서로 연행되었습니다. 그 후 그곳에서 하루 있다가 B급으로 분류하면서 육군 5사단으로 끌려갔습니다.

 

 

▲  1980년 8월 12일자 매일경제신문 기사 이미지 캡쳐   

 

 

영문도 모른채 끌려간 곳은 '지옥'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에서는 기관총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빨간 모자를 뒤집어쓴 조교들 여럿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젊은 층 노인을 가리지 않고 발로 차고 밟으면서 '좌로 굴러' '우로 굴러'를 외치는 공포스런 상황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곧 이어 저 또한 그 사람들과 함께 1시간여 동안을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구타를 당하던 중 저는 일어나서 민주국가에서 국민을 보호해야할 군인이 죄 없는 민간인을 이리 무지막지하게 때려도 되느냐고 따졌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저의 항변은 오히려 더 무자비한 폭력을 불렀습니다. 그 같은 말을 했다고 그날 이후 남들이 쉴 때도 한쪽에서 저 혼자만 구타와 모진 얼차레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또 여기에 더해 저는 ‘지옥탕’이라 불리는 곳에서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지옥탕은 연병장 한쪽에 둥글게 판 후 그 안에 진흙과 물이 섞여 있고 대원들이 단체로 소변을 보면서 무릎정도 되는 곳입니다.

 

조교들은 저를 그 곳으로 들어가게 한 후 잠수를 시키고 숨이 막혀 나오려고 하면 조교 3명이 달려들어 머리를 눌러서 오물이 결국 입으로 넘어 가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남들 다 먹는 식사시간에는 조교들이 먹다버린 음식 쓰레기 같은 것을 먹으라고 내밀곤 했습니다.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이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4주간의 삼청교육을 마치고 다시 군용도로 닦는 곳으로 근로봉사라는 명칭으로 차출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중 어차피 여기서 이러다가 죽을 바엔 붙잡혀서 죽든지 아니면 그들이 늘 강조하던 산속 발목지뢰를 밟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탈출하겠다며 생각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오전에 산속으로 탈출을 시도하여 저녁때 쯤 신탄리역에 도착한 후 차표도 없이 몰래 기차에 오르면서 안도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납치당해 이곳에 잡혀 왔으니 탈출하여 집에 가면 이걸로 끝이라는 순진한 마음도 잠시였습니다.

 

저는 다음역인 대광리역에서 헌병들한테 붙잡혔습니다. 끌려가면서 이제는 이걸로 모든 게 끝이구나! 체념하면서 자살하기 위해 힘차게 혀를 깨물었지만 피만 조금 난후 실패 했습니다.

 

5사단 헌병대로 끌려간 후 다음날 헌병대장이 불러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헌병대장은 여러 가지 물어보더니 참으로 안타깝다며 저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 했습니다.

 

1번은 다시 근로봉사로 살던지 2번은 A급으로 다시 분류받은 후 재판을 받던지 양자택일하라는 거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는데 살길이 보였던 것입니다. 우선 재판을 받으면 저의 억울함을 재판관한테 말해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희망으로 저는 후자인 재판을 선택했습니다.

 

단 하루 열린 군사재판 오전에 구형하고 오후에는 선고하고  

 

다음날 헌병들이 의정부 교도소로 저를 이송했습니다. 며칠 뒤 다시 헌병들이 저를 데리고 의정부지검으로 갔으나 검사님 말씀이 어찌 할 수 있는 법 조항이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민간인을 군대가 데리고 가서 일어난 일이니 군대에서 알아서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헌병들은 이곳저곳 전화하더니 다시 귀대한 후 저를 6군단 헌병대 영창에서 한참을 머물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민간인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군사재판이 경악스러웠습니다.

 

하루는 영창에서 나오게 하더니 끌고간 후 군 재판대에 세웠습니다. 재판관은 형식적인 말을 몇 마디 묻고는 곧 바로 변론을 종결했습니다. 군 검찰은 주저도 않고 2년형을 구형하더군요.

 

웃긴게 이렇게 오전에 변론을 종결하더니 오후에는 곧 바로 선고가 있다며 끌고 나가더니 재판관은 저에게 실형1년을 선고했습니다. 보도 듣도 못한 재판을 진행했던 것입니다. 억울하여 항소 했으나 기각. 또 다시 대법원에 상고 하였으나 기각 당했습니다.

 

당시 저의 국선변호사께서는 계엄포고령 제13호가 계엄령 제15조 제13조 소정의 요건을 갖추었는지의 여부를 심리하지 아니하여 당연 무효인 계엄포고령을 피고인의 소위에 적용한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대법 판사들은 변호인의 소론 논지는 독자적 견해라는 이유를 들면서 상고를 기각했습니다.

 

당시 대법원 판사님들 중에는 대쪽 판사라던 이회창. 그리고 이일규 이성렬 전상억 등이었습니다.

 

 

 

 

저는 상고기각으로 공주교도소에서 1년을 꼬박 복역해야만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있는데도 삼청교육대의 악몽은 계속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 또는 두 번은 꼭 파출소에서 나와서 계속해서 감시하였습니다. 힘들게 취직을 하여도 직장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직장을 쫓겨 나오곤 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저는 자살기도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한 뒤 자포자기 상태로 사는 동안 전과 15범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23년 전 지금의 처를 만났던 것 입니다. 지금의 처를 만난 후 저는 정신을 차리고 생활하면서 지금까지 아이들을 낳고 살고 있습니다.

 

비록 기초수급권자이지만 열심히 살던 중에 뉴스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어느 분이 삼청교육대에서 2주를 교육받고 나왔는데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해서 승소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저와 같이 조교한테 따지다가 모진 구타에 장애등급을 받았는데 재판부는 민주화운동으로 본다고 판결 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접한 뒤 저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싶어서 여러 곳을 알아보았지만 법 개정이 되어야만 된다는 소리였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 할 수 도 있지만 많은 소송비가 드니 변호사 구하는 것은 꿈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생각다 못해 각종 매스컴마다 저의 억울한 사연을 알려야 갰다는 생각에 이 같이 저의 사연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삼청교육대라면 나이 먹은 사람들은 전두환이가 그건 잘했다는 무지몽매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까지는 보수언론에서 전두환의 편에 서서 일방적으로 삼청교육대 교육생들에 대해 깡패라고 매도한 이유가 아니었는가 합니다. 

 

북한 인권 거론하기 앞서 우리의 인권 침해 문제부터 해결해야

 

언론에서는 요즘 일본에 대해 정신대 할머니들께 사과하고 배상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리고 유엔에서는 북한인권법을 통과하고 언론에서는 북한 인권에 대해서 많은 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한민국의 인권은 어떤가요?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는 70년도 넘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에 의한 7만여명에 달한다는 삼청교육대생의 인권침해는 불과 35년전 문제입니다. 그 가해자들은 지금도 잘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들의 덫에 걸려 생애를 암흑처럼 살아온 사람에게 어떤 방법이라도 위로해야 하지 않을까요?

 

희망이 있다면 저의 이야기가 온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 알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들이 결코 깡패나 불한당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들의 이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전두환 일당이 518 광주의거를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한 짓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삼청교육대 7만여 명을 희생양 삼아 전두환은 대통령까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제라도 전 국민이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국가에서는 우선해 7만여명을 헤아린다는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에게 배상한 후 북한의 인권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을 운운하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희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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