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넌 대체 다섯 번째로 잘한 일이 뭐냐?”

[인권연대 발자국통신] 다섯 번째로 잘한 일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 기사입력 2016/01/01 [20:40]

"근데 넌 대체 다섯 번째로 잘한 일이 뭐냐?”

[인권연대 발자국통신] 다섯 번째로 잘한 일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 입력 : 2016/01/01 [20:40]

초등학생인 둘째가 묻는다. “엄마, 태어나서 지금까지 다섯 번째로 잘한 일이 뭐예요?” 음?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니고 다섯 번째? 되물어 봤으나 다섯 번째가 맞단다. 보자… 그럼 처음부터 차례로 헤아려야 할 텐데. 지금까지 젤 잘한 일은 너희를 낳은 거고. “그럼 두 번째로 잘한 일은 아빠랑 결혼한 거?” 에— 에취. 그건 아직 잘 모르겠구나, 얘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애를 낳지만, 새로울 것 없는 그 과정은 낱낱이 경이롭다. 여러 해 전 아이들과 함께 출석한 강연회에서 연사가 불쑥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저기 뒤에 엄마들,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으세요?” 아유, 그럼요, 기꺼이, 몇 번이라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는데 절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주변에서도 다 비슷한 표정으로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내 한계를 초월한 것이라 비교 불가능하다. 목숨을 넘어선 가치를 어떻게 서로 견주겠는가. 아무리 자식을 여럿 두어도 그 열 손가락은 저마다의 무한일 거다. 그러나 한편 그런 개인적 무한은 얼마나 초라한지. 내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 해도, 애들이 어렸을 적 날 사랑하듯 무조건한, 절대적인, 열렬한 사랑을 바칠 수는 없다. 희미하게나마 계산속도 있고 기대 심리도 있다.

 

아이들은 강아지 같다. 무조건한 애착으로 양육자에게 매달린다. 그러나 강아지와 달리 인간이 될 존재라, 갓난아이의 애정은 인간의 애정인 양 느껴진다. 부모로부터도 받아본 적 없는 절대적 사랑을 그 작은 존재로부터 받는다고 절감케 된다. 상처가 아물고 마음이 흡족해진다. “고달프고 바빴던 건 맞는데, 그래도 참 좋았단다.”

 

그럼 두 번째로 잘한 일은 뭐예요? 두 번째는 단연, 공부하기로 맘먹은 거지. 운이 좋아서 교수 자리를 얻은 덕이 크겠지만, 공부하고 가르치는 삶은 갈수록 감사하다. 매일 조금씩이나마 문제를 생각하고, 나노밀리미터나마 낑낑거리고 기어가 본다. 보수화되고 심지어 퇴보하는 구석이 있겠으나 나날이 과제를 붙잡고 있는 기쁨이 더 크다.

 

의대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고 방송국 쪽을 기웃댔던 적도 있다. 공부가 무슨 짝에 소용 있으랴 싶은 건 지금도 가끔 부딪히는 난제다. 다만 이젠 사회적 용법을 따지기 전에 공부가 나를 조금씩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수긍하게 됐달까. 미혹과 비겁과 부조리, 그 원인을 더듬어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조금은 바뀔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세 번째는?” 세 번째, 세 번째, 세 번째라…. 아, 생각났다! 20년 전쯤이었을 텐데, 노량진역인지 영등포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어. 아마 방송국에서 밤샘 작업을 한 후 집에 가던 중이었나 봐. 낮인데도 걷잡을 수 없이 피곤하고 우울했던 기억이 나니까. 인천행 전철이 도착해 문이 열렸는데, 두어 살 먹었으려나, 아장거리는 아이가 전철에서 내리다 객차와 플랫폼 사이로 발을 헛디딘 거야.

 

아이가 틈으로 쑥 빠져드는데, 내 생애 최고의 순발력이랄까, 모르는 새 손이 나가 아이 겨드랑이를 잡았다. 망설임 없이 당겨 올려 플랫폼에 올려놓았다. 너무들 놀라선지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곤 전철을 타고, 마침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 인천 집을 향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투명하게 차오르는 만족감에 잠겨서. 부끄럽지만 그게 내 생애에서 생명을 구하는 데 가장 가까운 행위였나 보다.

 

그렇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를 꼽고 나니 더 생각나는 일이 없다. 다섯 번째는커녕 네 번째도 없다. 일도 어지간히 벌여 봤고 관계도 남부럽잖게 많건만, 지금까지 해온 건 다 뭐라지? 아이 낳고 공부하고, 그렇듯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만족 외에 자랑 삼을 수 있는 게 딱 하나, 전철역에서 우연히 아이 겨드랑이를 잡아 올린 거라니. 그러나 그 밖의 일은 아무래도 헛갈린다. 가치에 대한 확신도, 지속되리란 믿음도 없다.

 

새해엔 몰라도 종생할 때쯤엔 다섯 번째로 잘한 일까진 채워야 하지 않을까. 고작 다섯인데. 둘째가 던진 질문을 미뤄놓고 생각해 본다. “엄마가 나중에 얘기해 줄게. 나중에. 근데 넌 대체 다섯 번째로 잘한 일이 뭐냐?”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인권연대 [발자국통신]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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