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고 터프한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박수를"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 기사입력 2016/01/09 [15:10]

"복잡하고 터프한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박수를"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 입력 : 2016/01/09 [15:10]

가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너는 할 말 다하고 살아서 좋겠다. 이 말을 들으면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할 말 다하고 산다니.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내게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야말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한'게 아닌가요 라고 되묻고 싶어진다.

 

얼마 전에 사노 요코라는 작가가 육십 대에 쓴 <사는 게 뭐라고>라는 책을 읽었다. "사는 게 뭐라고"라니. 제목을 소리 내 읽어 보니, 왠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될 대로 되라 하며 긴장의 끈을 놓고 싶은 마음에 살짝 위안이 되기도 한다. "시크한 독거작가의 일기"로, 글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자신을 과대포장하거나 과도한 자기연민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기 연민과 자기 과시가 없는 글을 보면 감탄하는 것 같다. 대학 때 읽은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를 읽었을 때는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그 뒤 십년 정도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부모님이 아니라 김성칠이었다. 그런 글과 안목과 학식을 갖추고 싶었다. 물론 아직도 그것은 희망사항이다. 

 

한 해 동안 나는 어떤 사람과 생각을 접하고 어떤 것을 고민하였나 돌이켜본다. 여러 가지 중에서 세 가지만 꼽는다면, 부모는 절대 자기자식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응원과 지지를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개인이든 조직이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갈등과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노화에 대한 것이다. 마흔이 넘어 새로이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매해 늘어난다. 아마 그것들을 여기에 죽 나열하면 십중팔구 사람들 반응은 이럴 것 같다. "그렇게 단순한 사실을...?" 앞서 말한 세 가지도 마찬가지다. 다만 개인적으로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얻게 된 경험이라는 것뿐이다.

 

스무 살부터 부모와 떨어져 지냈던 나는 가끔 궁금했다. 나의 생활을 거의 알지 못하는 부모가 과연 사람들 사이에서의 내 모습이 어떤지 아실까? 일찍 집을 떠난 막내딸이 밖에선 어떤 페르소나를 가진 인간인지 이해하실까? 지인의 아들이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묵은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내 질문이 틀린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식에 대해 많이 알고 적게 알고도 아니고, 정확히 알고 틀리게 알고도 아닐지 모른다. 자식을 가장 잘 안다고 믿고 있는 부모 말고, 자식이 어떠한 종류의 억압 없이 자유롭게 감정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어른이 주변에 있는지가 중요한 건 아닐까.

 

올해 나는 아이를 공동육아에 보내면서 조합의 새로운 일원이 되었다. 지금껏 스스로 오픈 마인드라고 생각해 왔으나 그 일을 겪으면서 객관적으로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가을에 내년 입소를 희망하는 부모를 대상으로 설명회와 면접을 하는데, 현재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의 선생이 자신의 아이를 이 어린이집에 내년부터 다니게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의 내 반응과 생각을 시간차를 두고 바라보니, 새삼 나라는 인간도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우선은 방어적으로 생각하거나 보수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지금껏 자신을 얼마나 과대평가했는지 그리고 과신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후년이면 아흔을 바라보는 시어머니. 결혼 10년 동안 그분의 팔십대를 같이 보낸 셈이다. 팔십대의 노인이 어떤 노화의 과정을 겪는지를 의도하진 않았으나 곁에서 지켜보면서 인간이 늙는다는 것, 흔히 말하는 노화라는 것이 어떤 순서로 찾아오고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게 되었다. 50대 지인들을 만나 내가 눈으로 겪은 그 '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들은 말로만 듣던 그 노화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인지에 몸서리치며 놀란다.

 

언젠가 "보청기와 틀니"라는 칼럼으로 쓴 적도 있다. 시각, 미각, 청각, 후각이 다 퇴화되고 관절이 나빠지면 운동량이 줄고 그래서 몸의 근육이 없어지고 그러면 움직이기가 더 힘들어지고... 이런 식으로 감각과 근육과 신경세포와 뇌세포들이 서서히 죽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어느 단계쯤에서 흔히 말하는 논리적인 사고와 판단이 불가능해지는 것일까? 만약 그 단계를 지나서 그것들이 불가능해지더라도, 몸의 통증과 고독은 죽기 직전까지 느끼게 되는 것일까? 병으로 죽는 것이 나은 걸까, 서서히 모든 기능이 정지해서 죽는 것이 나은 걸까? 누군가의 말마따나 '죽는 게 문제다'. 어떻게 살 것인가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기 어렵고, 내 생각을 타인과 나누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점점 더 칼럼을 쓰기가 힘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소득과 나이만이 아니라 가치와 취향과 세계관이 다른 다양한 집합체가 공존하는 복잡하고 터프한 대한민국에서 한 해 열심히 보낸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글은 인권연대 <수요산책>섹션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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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독립단 2016/01/10 [13:40]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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