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력의 폭력성을 경계한다

대한민국 사회가 전적으로 표류하고 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 기사입력 2016/01/26 [04:44]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경계한다

대한민국 사회가 전적으로 표류하고 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 입력 : 2016/01/26 [04:44]

아버지가 아들을 수시로 때려 그 아들이 폭력적 트라우마에 휩싸였다. 그 아들이 커서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어린 아들을 아무 이유 없이 수시로 때려 어느 날 숨지자 토막을 내어 냉동고에 넣었다가 곳곳에 흩어버렸다.

 

19-34세에 이르는 청년들 중 43%가 이른바 ‘알바’ 전선(戰線)을 힘겹게 전전하면서 하루살이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전 국민의 하위 50%가 소유한 재산이 대한민국 전체 재산의 겨우 1.8%에 불과하다. 은행의 정상 연 이율이 3% 내외에 불과한데, 연 이율 40%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사람이 400만 명, 그 가족을 3인으로 계산하면 1,200만 명이 고리대금의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엄마와 아빠가 자정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오니,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밤늦도록 도심을 배회하는 초등학생들이 200만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이 사회적으로 가시적 또는 비가시적인 거대한 사회적인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른바 노동의 유연성을 높여 기업의 대외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목 하에 기간제법이니 파견법이니 해서 노동자들을 계속 불안정한 생계에 묶어 놓고자 하는 노동 악법을, 대통령이라는 자가 그런 악법을 국회가 통과시켜 주지 않는다고 수시로 기염을 토하면서 국회를 마치 전체 국민을 배신하는 양 몰아붙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그런 노동악법을 마치 대다수 노동자들을 위한 것인 양 국민의 세금으로 텔레비전과 신문 등의 매체를 통해 호도하는 광고를 연일 내보내고 있다. 현실적으로 건 원칙적으로 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여 입법의 정당성을 제대로 설득하고자 하는 노력을 전혀 볼 수 없고, 이처럼 막무가내의 강압적인 이미지 정치로 일관하고 있다. 전적으로 폭력이다.

 

결국에는 섬뜩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두 가지 황당한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둘 다 국회를 무시한 또는 국회를 그야말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기 위한 대통령의 독선에 의거한 사기극이다. 

 

하나는 대한상공회의소 등 38개의 경제 단체들이 나서서 또는 그런 경제 단체들을 내세워 ‘경제활성화 입법촉구 1천만 서명운동’을 벌이자마자 대통령이 ‘맨 먼저’ 서명을 함으로써 정권과 자본가들의 결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국회, 특히 야당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이 주도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하듯이, 대통령 역시 그런 서명운동을 주도 내지는 적극적 참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사회적인 폭력성을 증가시키는 자본의 일방적인 독주가 문제인데, 이를 견제하고 바로 잡아야 할 대통령이란 자가 오히려 이에 편승하여 그 폭력성을 더욱 강화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욱 심각한 다른 하나는 국회선진화법에 발목이 잡혀 국회가 대통령이 지휘하는 여당의 뜻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당을 내세워 아예 이 법을 폐기 수준으로 개정하기 위해 ‘국회법 제87조’를 악용한 것이다.

 

‘국회법 제87조’는 “위원회에서 본회의에 부의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된 의안은 본회의에 부의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위원회의 결정이 본회의에 보고된 날로부터 폐회 또는 휴회 중의 기간을 제외한 7일 이내에 의원 30인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그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여야 한다.”이다.

 

여기에서 위원회는 국회운영위원회를 지칭하는데, 이 운영위는 과반수 찬성으로 의안을 결정하게 되어 있고, 총 28명의 위원 중 여당이 15명이다. 여기에서 여당은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선진화법 개정안을 짐짓 부결시킨다. 그런 뒤 다른 여당 위원들 30명을 동원해 해당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당이 스스로 부결한 것을 곧바로 찬성 결의해야 한다고 뒤집는 꼴이다. 다수당의 독주를 막기 위한 법안을 다수당 내부에서 마치 이견이 크게 충돌한 것인 양 짐짓 양편으로 가르는 위장 사기극인 것이다. 법을 이용한 법치의 무용화를 획책하는 정치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8일 경기도 판교역 광장의 '경제활성화 입법 촉구를 위한 1천만인 서명 운동'현장을 방문해 직접 서명하고 있다.사진 출처 - 청와대    

 


이 정도쯤 되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양도받아 임시로 형성한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실현을 방지하기 위한 3권 분립의 민주주의 정신을 정면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위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그 어떤 악법이라도 대통령 1인이 원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통과시켜야 한다는 파시즘적인 발상이다. 역사를 거쳐 간 파시스트들은 모두 다 자신의 의견을 따르기만 한다면 모든 국민들이 현재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화려한 수식을 내세웠다.

 

대한민국 사회가 각종 폭력으로써 한없이 표류하고 있는데, 그 바탕은 오랜 역사의 정치권력의 폭력성이다. 40년에 걸친 외세의 폭력성,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의 폭력성, 그 이후 30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폭력성, 이러한 정치권력의 폭력성의 역사를 차단하고 새로운 평화로운 사회적 삶을 추구하고자 지난한 정치 및 사회 민주화 투쟁을 지속해 왔건만, 폭력성에 의거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실행에는 변함이 없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정치권력의 폭력성에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분단 이데올로기와 지역 이데올로기가 중첩된 가운데 이를 이용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각종 이데올로기는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뒷받침하는 정신적인 자양분이 되고 있다. 사회 곳곳에 이데올로기적인 폭력성을 강화시키고 이를 악용하여 정치적인 폭력성을 강화시키는 나라가 어찌 “민주공화국”일 수 있겠는가.

 

시민들, 국민들에게 유일하게 할당된 정치활동의 기회인 총선 투표가 다가오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권력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그러한 정치적인 폭력성이 어떻게 사회적인 각종 폭력성을 알게 모르게 부추기는가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와 같이 폭력성에 의거한 정치권력의 집단을 하루속히 대한민국의 정치권에서 내몰아 사회적인 차원에서 폭력 대신에 평화와 공존공영이 조금이라도 더 자리를 잡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인권연대] 수요산책에 실린 글 입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