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창업주 최종건, 부인 별세로 새롭게 조명

창업주 故 최종건 회장은 현 최태원 회장 부친인 故 최종현 회장의 형

한신 | 기사입력 2016/01/31 [16:50]

SK그룹 창업주 최종건, 부인 별세로 새롭게 조명

창업주 故 최종건 회장은 현 최태원 회장 부친인 故 최종현 회장의 형

한신 | 입력 : 2016/01/31 [16:50]

[신문고 뉴스] 한신 기자 =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지난 28일부터 이어진 SK그룹 창업주 고(故)최종건 회장의 부인 노순애 여사의 장례식이 31일 마무리 됐다.

 

발인제가 끝난 뒤 유족들은 고인을 봉담 선영과 수원 평동의 옛 선경직물 터로 모셨다. 고인의 영령은 고인이 남편과 함께 피와 땀으로 설립, SK그룹의 모태가 된 옛 선경직물의 공장과 SKC 수원공장을 둘러보고 수원시 연화장에 도착했다. 이후 평소 고인의 뜻인 “장례는 조용하고 검소하게 치뤄 달라”는 유지와 함께 화장(火葬)을 유지로 남긴 때문에 승화원(화장장)으로 모셔졌다.

 

 

▲ 10년전인 지난 2006년 1월 12일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강신호 전경련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10명이 참석한 가운데 "1월 월례 회장단회의"를 개최하였다. 사진 왼쪽부터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최태원 SK 회장, 강신호 전경련 회장, 김준기 동부 회장,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현재현 동양 회장, 허영섭 녹십자 회장, 김윤 삼양사 회장, 조건호 전경련 상근부회장     © 전경련   

 

 

최태원 회장 취임 후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지적 받기도...

 

유족들은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고인이 남긴 유지를 되새기며 고인과 눈물로 이별했다. 화장을 마친 고인은 봉안함에 옮겨져 서울 서대문구 광림선원에 안치됐다.

 

그런데 이번 노순애 여사의 별세를 계기로 최종건 SK 창업주가 새삼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몸소 SK그룹을 일으켰지만 정작 SK그룹 내에서 잊혀져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재계 3위 SK그룹은 최종건 창업주가 세운 직물공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최종건은 1926년 수원의 지주인 최학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수원의 신풍소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2년간 경성직업학교를 다닌 후 수원에 있던 선경직물회사에 견습기사로 취직하였다. 이 회사는 해방 직후 적산으로 한국인에게 불하되게 되었는데 최종건이 부친의 돈과 수원 지주 차철순의 자금을 동원하여 인수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이 공장은 완전 잿더미가 되었으나 최종건은 공장을 재건하고 기업을 키웠다. 선경의 전환점은 나일론 직물생산에 손을 대면서부터였다. 나일론은 우리 기술로는 생산이 불가능하여 나일론 원사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직물을 짰다. 질기고 가벼운 나일론은 불티나게 팔렸다. 곧 폴리에스테르 원사도 일본 업체로부터 수입하여 ‘데도론’이라는 직물을 생산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발 더 나아가 최종건은 일본에 의존하는 원사를 직접 생산하고 싶었지만 돈이 문제였다. 때마침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 한일협정을 체결한 후 일본의 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는데 선경도 일본 자금을 이용하여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생산하는 공장을 울산에다 지을 수 있었다. 

 

선경발전사에서 또 다른 단계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바로 이 화섬(化纖) 단계였다. 아세테이트나 폴리에스테르는 모두 화학로부터 뽑아내는 화학섬유이다. 그래서 최종건은 석유사업 즉 정유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한국은 정유공장을 독자적으로 세우기에는 기술과 자본 모두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최종건은 일본 데이진(帝人)과 이토추(伊藤忠)와 합작으로 정유공장을 세우기로 하였다. 일본측과 50대 50 으로 사업에 착수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정부로부터는 온산 땅 1백만 평을 공장부지로 내인가 받았으며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는 하루 15만 배럴의 원유 공급도 약속받았다. 정유사업을 할 회사인 선경석유도 1973년 7월 설립됐다. ‘석유로부터 섬유까지’라는 그의 꿈이 영글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불행이 닥쳤다.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제1차 석유위기가 닥친 것이다.  원유가격이 졸지에 몇 배로 뛰는 바람에 사업계획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불행에 더해 최종건은 곧 폐암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48살에 불과한 아까운 나이였다. 이 때 당시 선경그룹을 물려 받은 사람이 최종건의 동생 고(故) 최종현 회장이다. 그는  최태원 현 SK 그룹 회장의 아버지다.

 

경영권이 동생에게로 간 이유는 장남 최윤원이 20대 중반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종현은 이미 사장직을 맡는 등 선경그룹의 경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형의 사망 후 경영권을 무려 받은 최종현은 198O년 유공(현 SK㈜)을 사들이고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하는 등 선경그룹을 정유, 통신 중심으로 탈바꿈시켰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정유, 통신업종이  정부의 인허가와 특혜가 필수적인 산업이라는 것이다. 진입 장벽이 높아서 수익성이 좋다는 얘기다.  

 

실제 선경그룹은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매출액 기준으로 재계 순위 10위권 밖에 있었으나, 유공 및 한국이동통신 인수 이후 재계 5위권으로 뛰어 올랐다. 이러한 성장을 배경으로 이어 최종현은 1998년 1월 선경그룹을 SK그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SK그룹사에서 창업주 최종건의 흔적이 사라지는 단초가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선경 이름을 유지하자는  내부 의견이 있었지만 묵살되었다고 전해 진다.

 

하지만  지난 2003년 청업주 최종건 30 주기를 맞아 설립된 장학재단인 ‘선경최종건재단’은  ‘선경’이라는 이름을 되살렸고 옛 마름모 꼴의 옛 선경 로고를 사용한다. 직계 가족들이 뜻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1998년 8월 최종현 회장의 타계로 SK그룹  회장 자리는 최태원이 차지한다. 최태원 SK 회장 취임 이후 SK그룹에서 최종건 창업주  흔적 지우기는 더욱 노골화 된다. 최종건이 사업을 시작한 곳이자 SK그룹 발상지인 수원의 흔적을 지우는 움직임이  그 중 하나로 꼽힌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최신원 SKC 회장과 최태원 회장과의 적지 않은 내홍이 있었기에 이른 바 정통성에 약점을 가진 최태원 회장이 SK그룹 초기의 흔적을 지우려는 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최종건 창업주를 애써 무시하려는 해프닝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지난 2011년 12년 만에 SK네트웍스 주주총회에 참석한 최신원 회장은 “12년 만에 SK네트웍스 주총에 참석했는데, 창업주에 대한 묵념도 없고 성의 없이 진행되는 등 창업정신이 흐려졌다”며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기 도 했다.  SK네트웍스의 전신은 최종건 창업주가 처음 사업을 시작한 선경직물이다.

 

“가족사진 속에 미소 띈 젊은 우리엄마 꽃피던 시절은 나에게 다시 돌아와서” 

 

노순애 여사의 발인제에서 고인의 살아 생전 모습을 편집해 만든 영상을 다같이 감상하던 도중 가족과 친지들이 훌쩍였다. 노순애 여사는 고(故)최종현  회장을 비롯해 최종관, 최종욱 고문 등 시동생들이 결혼하기 전까지 함께 살며 보살피고 결혼 등도 손수 챙기기도 했다.

 

특히 노 여사는 항상 형제간 우애와 집안의 화목을 강조해 왔다고 한다. 최근 재벌가(家) 형제간의 경영권 분쟁이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 가운데 더욱 SK그룹이 주목 받고 있는 모양새다. 이 때문에 최종건 창업주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필요하다는게 재계 일각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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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사임당 2016/02/14 [21:50] 수정 | 삭제
  • 아... 큰아버님이 만드셨던 건데.. 참 경제역사가 우리나라 발전과 맞물리는 어려운 시기에 정말 힘들게 일구신건데.. 최회장님이 빨리 정신차렸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