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건축과 궁궐건축 어우러진 '양주회암사지'

정진해 문화재전문 위원 | 기사입력 2016/02/09 [04:25]

사찰건축과 궁궐건축 어우러진 '양주회암사지'

정진해 문화재전문 위원 | 입력 : 2016/02/09 [04:25]

 문화재 :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 회암사지 부도(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 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회암사지 멧돌(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
소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양주시와 포천시의 경계가 되는 산줄기 중앙에 우뚝 서 있는 해발 337m인 ‘하늘밑 보배로운 산을 뜻하는 천보산이 있다. 천보산 남쪽 기슭에 조선 시대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던 회암사지가 자리잡고 있다.

▲ 회암사지     © 정진해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올 정도의 산이라면 예사치 않는 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천보산은 ’선종에 속한 사찰이 있던 산‘으로 기록되어 있고,『조선왕조실록』에 “태종 2년에 천보산의 돌이 무너졌고, 태종과 세조가 천보산에서 사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천보산의 산수 형세가 천축국(天竺國) 아란타(阿蘭陀) 절과 같다."고 묘사되었고, 『대동여지도』에는 "천보산이 회천읍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회암사지는 옛 명성을 자랑할 정도로 대규모 사찰을 증명이라도 하듯 높고 낮은 건물터와 반듯반듯한 기단석의 모습은 사찰이라기보다 궁궐을 옮겨 놓은 듯 하다. 박물관에서 시작된 회암사지는 천보산에 이르기까지 회암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려 말 충숙왕 15년(1328)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화상은 당시 인도 최고의 불교 대학이었던 나란타 절을 본떠 266칸의 대규모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 ‘불우’조에 “1174년 금나라 사신이 왔는데 춘천 길을 따라 인도하여 회암사로 맞아들였다”라는 기록과 함께 고려 때의 스님인 보우의 비문에 “13세의 나이로 회암사 광지선사로 출가하였다”라는 내력이 실려 있어 지공화상 이전부터 사찰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선각왕사비     © 정진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중건 불사를 하게 되면서 전국 사찰의 본산이 되었고, 많은 승려들과 대중이 머물게 되었다. 나옹은 회암사에서 수행자와 일반대중에게 불법을 펴 고려 말 불교를 새롭게 부흥시키는 원동력이 되지만, 그는 4년에 걸친 중창불사를 마치고 회향법회를 하는 날 회암사를 떠나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 신륵사로 말머리를 돌려 입적하게 되는데, 그때가 우왕 2년(1376년) 5월 15일이다.

한 때 절의 승려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목은 이색은 「회암사 주조기」에 “집과 그 모양새가 굉장하고 미려하여 동방에서 첫째”라고 기록하였다. 나옹선사의 법맥을 이어받기 위해 원나라에 2년 있는 동안 나옹은 무학에게 “서로 안다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다 해도 마음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와 나는 이제 한집안이다.”하였다. 1371년 나옹이 왕사가 되어 송광사에 머물 때는 의발을 내림으로써 거듭 당신의 살림살이 모두를 무학에게 전한다. 무학은 전국의 명산으로 숨어들어 행각하면서 자취를 보이지 않았다.


▲ 회암사지 부도(보물 제388호)     © 정진해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은둔했다. 이 무렵,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설봉산 토굴에 머물던 무학대사를 찾아와 꿈 해봄을 부탁했다. “꿈에 무너진 집에 들어가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왔습니다. 또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지는 꿈을 꾸었는데 무슨 징조인가요?”라고 하니 무학대사는 “장차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되는 꿈이니 발설을 삼가야 합니다.”라고 일러주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새 도읍의 터전을 잡기 위해 무학대사와 늘 동행하며 다스림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의지처로 삼았다. 태조는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왕사로 책봉해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긴 호를 내렸고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게 하였다. 어느 날 태조가 무학대사를 초정하여 농을 걸었는데 “대사는 꽃 돼지와 같구려”라고 하자 개사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지요”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성계는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과 함께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조 이성계 이후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를 시켜 삼창되었으나 억불숭유정책이 심화되면서부터 유생의 상소와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200여년 번성했던 회암사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이었으나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년 동안 회암사의 규모는 전각이 총 262칸, 암자 17개, 15척이나 되는 불상이 7구, 10척이나 되는 관음상이 있었다고 전해지고만 있을 뿐이다.


▲ 무학대사비(경기유형문화쟂 제51호)     © 정진해


회암사지 북쪽 천보산 아래에는 지공, 나옹, 무학개사의 승탑과 승탑비가 있는데, 이 유물은 광주의 토호 이응준은 풍수사 조대진의 이야기 “세 화상의 부도와 부도비를 없애버린 후 그곳에 묘역으로 삼고 법당 터에다 묘지를 세우면 크게 길한다.”라는 말에 그대로 실행한 후 7년 뒤(순조 28년)인 1828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응준과 조대진은 외딴 섬으로 유배를 보냈고, 경기지방 승려들의 의견을 모야 회암사 터에서 북쪽으로 800여m 떨어진 천보산 중턱에 절을 짓고 세 분의 승탑과 승탑비를 원래대로 세웠다는 무학대사의 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복원하는 과정에서 흩어진 유물을 모두 수습하지 못하고 지공선사와 무학대사의 몸돌을 복원하지 못하였다.  

회암사 터의 발굴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 전각의 기단은 북쪽에서 한 단계식 낮아지기 시작하면서 회랑과 전각의 모습은 서로 연결되어 펼쳐져 있다. 터 북쪽의 좌측에는 마르지 않는 연못이 있으며, 연못 바로 앞에는 주인공을 알 수 없는 승탑이 있다. 상중하로 이루어진 기단 아래받침돌에 구름에 휩싸인 말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였고, 윗받침돌은 팔부신장과 넝쿨무늬로 장식한 후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꼭대기에는 여러 머리장식돌이 포개져 있다. 승탑 아래부터 전각 터가 자리 잡고 있는데 전체적인 배치가 사찰의 형태를 띠지 않고 궁궐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 유형문화재 제49호)     © 정진해




전체 건물터에는 석탑의 흔적과 석등의 은적이 없으며, 금당지로 보이는 터에는 불상을 올려놓은 대불좌가 없다. 또한 월대에 오르는 계단은 중간에 하나만 두었다. 그러나 터의 남쪽 끝 우측에는 당간지주가 있으며, 첫 번째 계단에 올라서면 괴불대가 있는 것으로 보면 사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아직 발굴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뚜렷한 형태가 나타나지 않지만 곧 발굴과정이 끝나면 전체의 모습이 드러날 것 같다. 다향의 큰 수조와 엄청난 크기의 맷돌이 있어 많은 사람이 거쳐했음을 집작케 한다. 


▲ 용무늬암막새     © 정진해


박물관에는 대형 청동 풍탁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풍탁에는 15자의 글이 새겨졌는데 모두 호칭이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 ‘조선국왕(朝鮮國王)’, ‘왕현비(王顯妃)’, ‘세자(世子)’라는 15자(字)가 새겨져 있어서 역사의 근거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발굴과정에서 드러난 다양한 문양의 암막새와 수막새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사찰에서 사용된 범자문 수막새와 명자수막새, 암막새가 있으며, 궁궐에서 사용된 봉황문 수막새, 용문 암막새, 용두, 토수, 궁궐에서 볼 수 있는 잡상 등으로 보아 회암사 터는 국찰이면서, 태조 이성계가 아들인 정종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이곳에 기거하면서부터 사찰은 궁궐의 모습으로 변화를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이 회암사 터 우측에 또 다른 건물터가 있다. 그러나 이 건물터 발굴이 진행되었으나, 이곳과 버금가는 건물터가 확인되면서 어떤 이유로 발굴을 중단하고 묻어버렸는지 알 수 없다. 언제 다시 발굴되면 회암사 터의 규모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원형 그대로 발굴이 완료되어 문화와 역사적 가치창출로 지역의 전통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는 교육의 현장이 되어야할 것이다.

이 기사는 [한국NGO신문]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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