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
선거로도 풀지 못하는 이야기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 기사입력 2016/04/15 [05:44]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
선거로도 풀지 못하는 이야기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 입력 : 2016/04/15 [05:44]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괜찮은 이들도 제법 많은데, 왜 괜찮은 이들이 모인 사회가 폭력적일 정도로 문제투성이가 될까. 그게 종종 궁금했다.

 

 

▲ 4.13총선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박민식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신문고뉴스

 

 

개인이 개인을 대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개인이 개인에 대해 면전에서 폭력을 쓰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가족이나 친지, 지인들이 모이면 서로에게 비교적 도덕적으로 대한다. 그런데 집단이 되고 사회가 되면, 그 집단이나 사회 전체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낯모르는 개인이나 집단을 가족이나 지인과 동일하게 대하기는 힘들다. 남의 불치병보다 제 손톱 밑의 가시가 더 다급한 문제이기 마련이다. 이것이 사회 전체가 암울해지게 되는 단순하고 근본적인 이유다.

 

국제정치학자인 라인홀드 니버가 1930년대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제목 그대로 개인 간에는 서로 도덕적으로 대하는 자세가 가능하지만, 개인들을 몇 단계 건너가면 도덕성의 강도가 약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다른 이의 이해관계를 고려하기도 하지만, 집단으로 가면 개인들 간의 친밀도가 떨어지고 개인의 도덕성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집단에서는 개인의 의도와 행위 사이의 차이가 직접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이 내적 의도와 외적 행위 사이에 거리가 있는 비도덕적 행위를 하더라도 집단 전체로서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집단은 단순히 개인들의 총합이 아니다. 집단은 개인의 의도와 행위 사이의 차이가 중층적으로 얽혀 있으면서도, 그 차이들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복잡한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집단의 주체는 모호해서 전체를 인도하거나 통제 및 억제하기 힘들다.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도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에 비해 훨씬 결여된다. 그래서 개인과 같은 도덕성을 획득하기 어려워진다. 개인들의 이기적 충동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집단주의 때문에 타자가 긍정적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개인은 비도덕적 집단 안에 자신의 도덕성을 숨기고, 자신의 책임은 면하면서 집단의 비도덕성에 합류한다. 이것이 폭력이 구조화하는 이유와 과정이다.

 

이런 문제는 종교인이 많아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선량한 종교인들도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회의원을 잘 뽑아 놓았다고 해결될 리 만무하다. 이번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변화와 진보 쪽이 힘을 얻은 듯 하여 그나마 다행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세상의 평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국회가 국민보다는 권력에 더 관심이 많은 곳이라는 식상한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아무리 유능한 정치인이 모여도 복잡다단하게 얽힌 전 국민적 인간관계를 풀어나가기는 힘든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 체제로 옮겨가고, 개개인이 생활 정치의 주체가 되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정도다. 당분간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치판이 새로 짜이는 모습을 좀 즐기면서, 좀 더 구체적인 상상은 추후 기회 봐서 해보려 한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인권연대] 발자국통신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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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독립단 2016/04/16 [12:20] 수정 | 삭제
  • 지구의/축소판/한반도/한민족의/대춘향전(大春香傳)은---하늘이/한민족에게/주신/위대한/작은/성경으로써---하늘의/측량할수없는/높고/깊은/지혜와/대예언입니다---광복71년/2016년/병신년이/마침내/그/진실을/증명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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