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회주의를 향한 묵시록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기사입력 2016/05/09 [05:50]

새로운 사회주의를 향한 묵시록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입력 : 2016/05/09 [05:50]

 

 

1. 내면에서부터 사회주의로 가자  

 

여러모로 마음이 뒤숭숭하다 못해 예사로 불안하다. 환갑을 넘기도록 나이를 먹게 되면 도를 닦은 듯 품새를 취하면서 내면에서부터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세상사 위험천만한 급격한 변화의 힘으로 무의식을 꿰뚫고서 등 뒤에서부터 치고 들어온다는 것을 실감하고 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젊은 때에는 내면의 성찰을 하면서 개인주의자가 될지언정, 늙을수록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뭇 사람들의 삶에 안타깝다 못해 괜스레 눈시울을 적시게 되면, 결코 오만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겸손해졌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늙을수록 죽음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니, 그래서 자연적인 개별적 생명에 더욱 집착하기 마련이니, 집착이건 해탈이건 바탕에서부터 개인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싶지만 그게 아닌 것이다. 늙을수록 요구되는 그 해탈의 방향은 사회주의적인 방향이어야 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시인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통해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데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읊었는데, 그때 그 ‘세상’을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면 그저 기생과의 사랑을 허용치 않는 편견의 세상으로 읽히지만, 사회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제국주의적인 강압의 자본주의로 점철된 나머지 근본적인 인간성을 파괴하는 세상으로 읽히는 것이다.

 

요즘 텔레비전에까지 소개되면서 유행하고 있는, 기본적인 효용만을 남기고 모두 버리자는 이른바 미니멀리즘적인 생활방식도 마찬가지다. 그 효용의 척도가 그저 개인적인 안심입명에 있다면, 그 생활방식은 탈속적인 개인주의에 불과하니 그것도 일정하게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 효용의 척도를 모두가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함께 평등하게 소통하고 즐기는 것으로 설정한 것이라면, 거기에서 사회주의적인 함의를 찾아 읽어낼 수 있다면 미니멀리즘적인 생활방식을 권장해야 할 일이다.  

 

2. 사회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다들 알다시피 얼마 전에 세계적인 바둑기사 이세돌이 <알파고>라는 인공지능과의 바둑에서 거의 완패하고 말았다. 세계인들 모두가 경악했다. 빠르고 정밀한 계산을 요구하는 영역을 기계에게 빼앗긴 지 오래되었지만, 원리상 결코 넘겨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자율적인 상상과 직관 및 반성의 영역마저 기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는 신뿐이었다. 그러나 신은 단 한 번도 객관적으로 실증된 적이 없는 말 그대로 마음이 만들어낸 유령에 불과했다. 그래서 더 섬뜩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알파고>라는 기계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실증된 것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의 지위가 순식간에 내려앉은 세계사적인 사건이 벌어진 탓에, 세계인 모두가 공포에 질린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이매뉴엘 월러스틴 외 지음, 성백용 옮김, 창비, 원전 2013 / 국역본 2014)라는 책에 실린 랜들 콜린스의 글 「중간계급 노동의 종말: 더 이상 탈출구는 없다」는 자본주의 400여 년의 역사는 기술에 의해 노동이 대체되어 온 역사였고 그것이 자본주의에 가하는 악순환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한 역사였지만 결국 더 이상 방어책이 없고, 따라서 약 2040년 쯤 되면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postcapital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잠정적으로 쓰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그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새로운 체제를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생산을 위한 기계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 그만큼 인간은 덜 노동하게 되고 더 많은 여유 시간을 확보하면서 함께 향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 원칙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이 원칙을 현실로 바꾸고자 하는 데서 새로운 사회주의, 그 이념이 설립된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한, 기계 기술의 비용이 점점 커지면서 그에 따라 그 기계 기술 소유자의 수가 줄어들게 되고 따라서 생산수단의 독점의 폭이 커지면서 생산물에 대한 독점적 소유의 폭 또한 당연히 늘어나게 된다. 생산력이 발전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부는 계속 늘어나지만, 그 부의 소유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직장을 잃거나 할 일을 잃어 대다수의 구매력이 줄어들고 생산에서 경색이 일어나면서 더욱 더 많은 실업자들이 생겨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자본주의적인 재분배 시스템으로는 이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복지국가 정책이었으나 복지국가가 사회전반적인 체제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을 메우기 위한 부수적인 일환으로 작동하는 한 경우에 따라 언제든지 약화되거나 심지어 폐기될 수도 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접어들어 이를 확연히 목도하게 된다. 

 

사회 구성에 있어서 근본 문제는 재분배 시스템이다. 생산을 위한 고도의 기계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재분배 시스템을 둘러싼 사회적인 갈등과 대립의 폭과 깊이는 더욱 커지게 된다. <알파고>가 세계인들에게 준 충격의 숨겨진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생산을 위한 효율성은 기계의 몫이 될 것이다. 심지어 생산의 효율성을 위한 관리 조정마저도 인공지능이라는 기계의 몫이 될 것이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를 내세워 말하자면, 이제 인간들은 그저 놀고먹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놀고먹을 것인가가 문제다.

 

모두가 평등하게 평화롭게 즐겁게 다양하게 새롭게 놀고먹을 수 있을 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갖춘 인간들”(마르크스)이 예사로 평범한 인간으로서 서로 함께 즐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생산의 대부분은 기계에게 맡기고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누리면서 놀고먹을 수 있는 길을 일컬어 새로운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재분배 시스템으로는 이렇게 놀고먹을 수 있는 길은 아예 불가능하다. 일체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것들을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명령권을 행사하는 화폐, 이 화폐를 더 크게 하기 위한 자본, 모든 인간적인 다양성을 궁극적으로 바로 이 명령권 증식의 자본이라는 단일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조직 관리하는 사회 및 국가의 구성, 이로써는 객관적으로 실증되고 있는 탈인간적인 기계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자본 파괴의 악순환의 길을 막아낼 수도 역용(逆用)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세계적인 학자들이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 라고 물음을 던진 뒤, “미래가 없다. 불과 2,30년 안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라는 분석적인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3. 그런데 지금 우리는?  

 

4·13 총선 결과가 야권분열에 의한 섬뜩한 예상과는 반대로 나타남으로써 그나마 안도의 호흡으로 몸을 추스르나 했더니,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회경제적인 삶이 이미 체험하고 있는 극도의 불안정성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치닫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노동의 유연화’를 내세운 미국 헤게모니 하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및 사회경제적인 확산이 2008년 대 금융위기의 철퇴를 맞은 이후 잠시 고개를 숙이면서 몸을 감추는가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다. ‘혁신’, ‘창조’, ‘유연화’, 심지어 ‘인공지능에의 대대적인 투자’ 등의 낱말들이 범람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끝끝내 유지하고자 여러모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낱말들이 암암리에 또는 명시적으로 지시하는 파편적이고 단기적인 실제의 구현이야말로 마치 오늘날의 불안정의 기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이고 최고의 가치를 지닌 양 예사로 통용된다. 하지만 그런 추세에 스며들어 있는 시간의 단편화를 넘어선 시간의 파편화에 대한 성찰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간이 파편화된다는 것은 각자뿐만 아니라 사회 및 국가마저도 존재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파편화된다는 것은 다소 구체적으로 말하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존의 활동들이 파편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누구든 무엇이든 지금 여기에서의 현존이 축적되어 그 나름의 존재를 형성한다.

 

존재가 역사성을 띨 수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현존이 번갈아 이어지긴 하되 파편적으로 이어지면 그 어떤 역사적이거나 서사적인 내용도 형성하지 못한다. 공시적으로도 그렇고 통시적으로 그럴 것인데, 모든 대상들과 모든 사건들이 뿔뿔이 흩어져 연기가 공중에 날리다가 곧 사라지고 마는 것처럼 되고 만다. 그 속에서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종신 고용’은 이미 옛말이 되고 말았다. 해당 기업의 주식 값을 올리기 위해서는 그 기업이 혁신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면서 단기간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 모든 기업의 가치를 주식 값의 등락으로 환산하고자 하는 주주자본주의적인 논리 앞에서, 정부 책임자건 기업의 경영 책임자건 기업의 노동자건 속수무책의 무책임으로 일관하게 되고 그저 주어진 단편적인 현존에 매몰되어 우선 위기만을 모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가? 이는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갖추고서 모두가 함께 삶을 즐길 수 있는 세상’과는 정반대의 길임에 틀림없다.

 

2008년 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그런 위기를 가져온 지역화 및 세계화와 전반적인 자유무역의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 여파로 여전히 세계 전체의 경제가 불황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한국경제 역시 마찬가지로 장기 불황의 조짐을 씻어낼 수 없다는 염려가 공인되다시피 하는데도, 이를 근본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을 어느 누구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도 또다시 그 위기의 원인들을 단편적인 방식으로 반복할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양 하면서 장기적인 근본 대책을 전혀 강구하지 못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묵시록적인 의미를 던지는 것인가?

 

분명 사회적 생산력은 계속 신장되고 있는데도 그 과실에 대한 재분배의 관계가 날로 정체조차 불분명한 소수 독점적인 방향으로 악화되면서 이른바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적대적인 모순이 더욱 격화되는 과정이 더욱 날카롭게 전개된다는 것은 오래지 않은 미래에 대 체제적인 격변이 일어나리라는 묵시록적인 계시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격변의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일지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왜 하필이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군사적 대립과 갈등은 이토록 섬뜩하게 전개되는 것인가? 난세를 태평세로 바꾸고자 한 ‘춘추공양학’으로 본 공자의 뜻이라도 다시 살려내어 깊이 새겨야 한다. 

 

존재와 그에 따른 역사는 골동품처럼 취미 내지는 통치수단이 되어 거리에 나돌고, 문화는 거대한 풍선처럼 상품 내지는 순간적인 마취제가 되어 하늘을 난다. 시간의 파편화를 요구하는 사회경제적인 삶의 방식이 낳은 결과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조차 없는 존재의 섬뜩함’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게다가 허약하기 짝이 없는 통치 그룹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사회국가적 불행이란 말인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통치 그룹인가.  

 

이 글은 [인권연대] 수요산책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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