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이과생들의 미술관 구경

김양수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6/05/18 [02:01]

[사는 이야기] 이과생들의 미술관 구경

김양수 칼럼니스트 | 입력 : 2016/05/18 [02:01]

 

[신문고 뉴스] 김양수 칼럼니스트 = 같은 대학 같은 서클에서 동기로 만나 7년 연애하고 20년 세월 함께 사는 아내와 나는 직업 특성상 뼛속까지 이과생들이다.

 

아내의 ‘이과적 포스’는 나보다 몇 배 더 강한데, 내가 열마디 립 서비스 끝 실천이 고작 하나라면, 과묵한 아내는 한마디 말도 없이 열 가지 영양가 있는 일을 해치우는 타입이다. 나는 아내의 이런 장점과 매력을 ‘극단적 현실주의’ 혹은 ‘하이퍼울트라 리얼리즘’으로 찬미(?)하곤 한다.

 

아내와 나는 귀차니즘을 극복하고 오랜만에 휴일 외출을 나섰다. 시내 미술관을 목적지로 삼았는데, 선정 이유 또한 지하철역에서 가깝고, 근처에 맛집 프로그램에서 자주 방영된 음식점이 있다는, 귀차니즘과 현실주의의 오묘한 조화의 결과였다. 

 

▲  사진직가 임진채의 '미술관에서'라는 작품(사진은 기사의 본문 내용과 관계없음)   

    

 

입장권 구입부터 우리는 미술관측의 마케팅과 현실주의의 갈등을 경험한다. 전시관 세 곳 중 두 곳만 관람하는 기본관람이 만원, 전부 볼 수 있는 일일 이용권이 12,000원이란다. 아내와 나는 주저 없이 기본관람을 선택한다. 친절한 직원은 전시물을 자동으로 설명해주는 큐레이터 기계 대여를 권유하지만 당연히 무료가 아닌지라 정중하게 거절하고 현대 미술품이 주인공인 첫 번째 전시관으로 향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전시관의 제일 위층을 둘러본 아내와 나는 ‘무식한 사람들’의 좌절을  맛보게 된다. 유홍준 교수께서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인다’라고 했다지만 전혀 모를지언정 이미지와 분위기만이라도 느끼고 즐기려 추상 미술품을 보고 또 보아도 골치만 아파올 뿐, 아무런 느낌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를 다시금 절망으로 몰아넣은 것은 작품에 붙은 제목들이었다. ‘작품86, M.K’, ‘묘법 No.41-78’, ‘추상회화 No.34’...... . 전시품을 보고 엄습하는 두통은 제목 덕분에 더 심해지곤 했는데, 보다 큰 문제는 전시품 상당수가 동명이인도 아니면서 같은 제목을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무제(無題)”라는 제목.

    

‘무식한 게 죄가 아니라 무식을 인정하지 않고 전혀 개선하려 하지 않는 것이 죄악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곤 했다. 아비로서 솔선수범은 필수이다.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직원에게 양해를 구한 후 매표소로 다시 가서 큐레이터 기계를 빌렸다. 심기일전. 배우는 학생의 자세로 현대 추상미술을 감상하기로 했다.

    

스마트폰과 똑같이 생긴 모양으로 작품 앞에 서면 자동으로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화면이 뜨고, 이어폰으로 ‘꿀성대’ 나레이션을 통해 작품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큐레이터 기계.......

    

하지만 약 30분간 현장 학습 수업을 들은 아내와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과생의 결기’를 발휘하게 된다. 예컨대 온통 검은색으로만 칠해진 캔퍼스가 우아한 조명을 받으며 전시품 대접을 받고 있었는데 그 ‘작품’에 대한 ‘설명’은 이런 식이다.

    

“검은색 화면으로 된 이 작품은 서술적 주제를 포기하고 미술의 순수성을 고수하였던 라인하르트 작품의 정점을 보여준다. 전적으로 수작업에만 의존하여 만든 균일한 화면은 관람자에게 미세한 차이만을 지닌 검은색 화면을 관조하게 함으로써 명상의 과정을 통해 초월적 정신성을 경험하게 한다.” 

              

“완전 말장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내가 캔버스에 새빨갛게 칠만 하고 ‘열정’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저런 해설을 하겠네?”

“이런 걸 그리고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정말 이해가 안된다니까.”

    

그래도 아내와 나는 전시품 중에서 특이한 소 그림을 보고 이중섭 작품이라고 맞춰냈으며,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기분만으로 천경자의 작품을 알아보기도 했다. 무식한 우리가 그나마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받은 순간이었다.

    

투덜거리며 찾아간 두 번째 전시관은 고려청자, 조선 분청사기, 고대 금속공예품 등이 주인공이었다. 현대 미술과 달리 학창시절 국사 교과서 화보에서 약간 ‘안면을 튼’ 대상들이라(시험문제에도 나왔었다.) 이과생 부부는 경계심을 조금 풀었다. 하지만 첫 번째 전시품을 본 아내는 역시 ‘골치 아픔’을 호소한다.

    

“도대체 도자기 이름은 왜 이리 길고 어려운 거야? 당신은 이게 무슨 뜻인 줄 알겠어?”

    

‘청자반양각 연화문 장경병’....... .

    

아내와 나는 복잡한 의학용어로 소통이 가능한 같은 업계 직업인이기도 하다. 언뜻 들으면 짜증나게 길고 어려운 의학용어도 몇 가지 병리용어와 명명법 규칙을 이해하면 상상보다 훨씬 단순한 언어체계이다. 아내와 나는 도자기 명명법 또한 의학용어 같은 간단한 규칙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했다.

    

추론을 검증하는 방법은? 분석하고 그 결과를 실제 적용하면 된다. 일단 ‘청자’... 하얀 백자는 아니니까 청자가 맞다. ‘반양각’ 한자를 보니 반쯤 도드라지게 무늬를 새겼다는 의미, ‘연화문’은 연꽃 무늬, ‘장경병’은 역시 한자를 보니 ‘목이 긴 병’이라는 의미 되겠다.

    

어라? 이거 쉽네? 암호를 푸는데 필요한 코드-전시품-들은 방안 가득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어깨가 있는 병은 ‘매병’, 엉덩이 쪽이 펑퍼짐한 병은 그냥 ‘병’, 주둥이가 큰 항아리는 ‘호’, 밥그릇처럼 생긴 친구는 ‘합’, 접시는 ‘완’, 거기에 뚜껑이 있으면 ‘개’자를 붙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뚜껑이 있는 밥그릇은 ‘개합’, 뚜껑이 있는 항아리는 ‘개호’가 되는 거다)

    

결론적으로 도자기의 명명법은

1) 자기의 종류(청자, 백자, 분청사기, 청자상감...)

2) 무늬를 새긴 방식(양각, 음각, 반양각...)

3) 무늬의 종류 (모란문, 연화문, 어문..)

4) 자기의 모양(매병, 병, 호, 합)으로 구성된다는 규칙을 발견했다.

 

규칙을 발견했으면 응용문제로 검증을 거치는 게 순서이다.

아내와 나는 곧바로 전시품 이름 맞추기 놀이를 시작했다.

    

“ 자, 이 도자기의 이름은? ”

“어디 보자.... 청자..양각... 물고기를 새겼으니 어문.. 그리고 어깨가 있네? 그럼 매병... 에.... 이 도자기는 ‘청자양각 어문 매병’이네요”

“ 땡! 안타깝게 틀렸네요... 자세히 보시면 물고기와 파도가 같이 있죠? 그래서 청자양각 파어문(波漁文)매병이 정답입니다”

    

도자기의 색상이나 문양의 정교함, 형태의 수려함 등 미적 요소는 이미 이과생 부부의 주요 관심사에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우리는 우리가 짐작한 명명법이 맞아 떨어지면 즐거워했고, 간혹 우리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명명법이 발견되면 ‘뭐 이런 쪼잔한 규칙이 다 있어?’라며 이과생의 시각에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한 고미술학자의 명명법을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 추상미술의 고차원적 형이상학 세계를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아내와 나 이과생 부부는 역시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지지 못한 도자기 세상을 구경하면서 결국 우리만의 방식으로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내곤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했다.

    

박물관을 나서며 아내와 나는 확실한 의견 일치를 본다. 1교시 현대미술은 고난과 짜증의 연속이었지만 2교시 고미술 시간은 우리의 상식과 지식을 풍성하게 해준 무척이나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귀차니즘이 일상을 지배할지라도 가끔은 바보상자 TV에서 해방되어 이렇게 박물관을 찾아 교양을 쌓아야 우리는 무식함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미술 작가들, 이름하여 화백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현대추상미술은 ‘사기극’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이 느낌을 가진 상태에서 접한 "조영남 그림 8년 그려줬다"는 무명화가의 폭로로 시작된 가수 조영남의 '화투그림' 대작 논란은 이 '사기극'의심을 에스컬레이트 시킨다. 그래서 기왕 시작된 검찰의 수사라면 제대로 진위를 밝혀 이런 '의심'을 조금이라도 벗겨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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