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허리에 묻힌 ‘김형근’ 망월동 걸상 세운다!

추광규 기자 | 기사입력 2016/05/18 [08:03]

5월 허리에 묻힌 ‘김형근’ 망월동 걸상 세운다!

추광규 기자 | 입력 : 2016/05/18 [08:03]

 

[신문고뉴스] 추광규 기자 = 서른여섯 번째 5.18을 맞으면서 제 가슴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1980년 5.18 광주항쟁 당시 학내외 시위로 계엄사령부에 의해 수배자로 명단을 올리는 등 현대사의 격변기를 몸으로 헤쳐 나왔던 故김형근 선생입니다.

 

▲ 故 김형근 선생 자료사진

1959년 전북김제 출신인 故김형근 선생은 지난해 9월 28일 지병이 악화되어 쉰여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신 후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 구묘역에 안장되어 계신 분입니다.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전두환 독재가 물러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5.18 및 민주화 보상 신청 접수를 받을 때였습니다.

 

그는 5.18유공자로 당시 논을 열 필지 살 수 있는 8500만원을 신청할 수 있었지만 주변의 강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신청자체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김 선생은 “민주화 과정의 고통스런 세월을 돈과 바꿀 수 없다”면서, “믿음과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故 김형근 선생과의 인연은 지난 2007년 1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 선생은 이날 전북 임실 관촌중학교 출신의 ‘통일산악회’ 모임의 제자들과 함께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김 선생의 제자들은 이날 자신들이 쓴 편지와 통일배지, 1일 2성 스티커를 담은 예쁜 복주머니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들 학생들의 인솔교사로 따라왔던 김 선생을 처음 마주한 얼굴은 참으로 해 맑았습니다. 세상사의 때가 묻지 않은 교육자로서의 인상이 제 가슴속으로 들어왔었습니다.

 

 

▲ 2007년 1월 1일 김형근 선생의 제자들이 반전배지, 스티커, 편지 등이 담긴 복주머니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 후 찍은 기념사진.    © 추광규


 

“고통스런 세월 돈과 바꾸지는 않겠다”

 

故김형근 선생은 1978년 전북대 교육학과에 입학 한 이후 질곡의 현대사를 몸으로 겪어야만 했습니다. 김 선생은 세 번의 제적과 복교 끝에 11년 만에야 겨우 졸업했습니다.

 

그는 1980년 5.18광주항쟁 당시 광주 전남지역 외부에서는 처음으로 전북대에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면서 시위를 펼쳤습니다. 또 이로 인해 계엄사령부의 329명 수배자 명단에 장기표(서울대 법대 2), 김부겸(서울대 정치4)등과 함께 올려야만 했습니다.

 

계엄사의 체포를 면하기 위해 군산 인근의 섬으로 도피한 후 염전 노동자로 일하던 중 2달여 만인 7월말 체포된 후 헌병대 영창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3개월간 헌병대 영창에서 불법 구금 상태로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또 이어 강제징집으로 녹화사업 대상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수난은 이어졌습니다. 1987년 민주 항쟁에 앞장서다가 또다시 감옥에 가야만 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하여 서점을 운영하였으나 금지서적을 판매하였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서점도 망해버렸습니다.

 

김대중 정부 들어 사면 복권으로 입학한지 22년 만에 교사로 임명된 후 전북 임실 관촌중학교에 부임했습니다. 자신의 표현대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냈지만 그 시간은 짧았습니다.

 

2005년 4월경 전북 회문산에서 거행된바 있는 한 행사에 중학생 제자들을 데리고 참석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런 문제가 불거진 것은 1년 6개월여만인 2006년 12월경 이었습니다.  

 

▲  1980년 6월 17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계엄사 발표 '5.18광주사태 수배자 명단'. 당시 계엄사는 김부겸 전의원(당시 서울대 정치4)등 20명을 시위주모및 배후조정등의 혐의로 현상금 100만원에, 장을병(당시 성대교수)등 309명을 같은 혐의 등으로 공개수배한 후 그 명단을 발표한바 있다. 김형근(당시 전북대 교육3) 교사도 지명수배 된바 있다.    © 추광규


 

<조선일보> 보도를 시작으로  마녀사냥에 시달렸던 ‘김형근’

 

<조선일보>는 2006년 12월경 '전교조 교사가 제자들을 빨치산 추모제에 참석시켰다'고 이를 집중적으로 부각 시켰습니다. 사회면 주요 기사면에 배치했던 것은 물론이고 사설에서도 다뤘습니다. 김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2006년 12월부터 1월경 까지만 헤아려도 언론에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다룬 기사가 천여 건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그 정점은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프레스센터 강연회에서의 발언입니다. 2007년 1월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자유시민연대 창립 6주년 기념 초청 강연회에 참석한 박 전 대표는 노무현 정권이 '자기들 코드에 맞게 나라를 뒤엎는 데에만 집중한 것이 혼란과 퇴보의 핵심'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 사례로 몇 가지를 꼽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학교 교사가 학생들을 데리고 빨치산 추모제를 연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시련의 시작은 2007년 4월14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전북지방경찰청 보안과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와 관련 김 선생의 집과 학교에 대해 기습적으로 압수수색을 했습니니다. 그리고 그해 6월 28일까지 총 11차례에 걸쳐 강도높은 소환 조사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토록 수사에 열을 올리던 전북경찰청 보안과는 조사를 마쳤음에도 6개월여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직후인 2008년 1월 29일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야당이 집권했다면 무죄였을 거라는 지적이 나왔던 이유였습니다.

 

김형근 선생은 그해 6월23일 석방되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기나긴 형사재판이었습니다. 2008년 2월 22일 내려진 1심 선고와 2010년 2월 26일 내려진 2심 선고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대법원도 무죄 판결를 내려 시련은 끝나는 듯 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대법원은 선고를 계속해서 미뤘습니다.

 

그러던 대법원은 상고된지 2년 6개월여만인 2013년 3월 28일 선고를 내렸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시작된 지 1달여 만이었습니다.  

 

대법원은 원심 판단을 뒤짚고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습니다. 대법원은 "이 사건 전야제(통일애국열사추모제)는 순수하게 사망자들을 추모하고 위령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북한 공산집단에 동조하고 빨치산의 활동을 미화·찬양하는 성격이 담긴 행사라고 봐야한다"라는 취지였습니다.

 

이 같은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故 김형근 선생의 인생은 크게 뒤틀려야만 했습니다. 이후  돌아가시기전 2년여 동안 두 차례 더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구속되어야만 했습니다.

 

구속과 석방이 되풀이 되던 당시 김 선생은 김제 부친의 집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는 2015년 초순경 부터는 서울로 올라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고 계시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불규칙한 생활을 이어오던 중 지난해 봄 갑자기 쓰러진 후 병원 진단 결과 말기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또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고향인 전주에서 요양을 계속했지만 여기까지 였습니다.

 

김형근 선생은 투병생활 4개월여 만인 지난해 9월 28일 새벽 3시 25분 지병으로 투병중 56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2015년 9월 29일 전주효자장례타운에서 '통일열사 김형근선생 민주통일장 장례위원회’주관으로 추모객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한 가운데 치러졌습니다. 선생의 유해는 다음날 화장된 후 9월30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 구묘역에 안장 되었습니다.

 

 

▲ 2015년 9월 29일 통일열사 김형근선생 민주통일장에서 한상렬 목사가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 추광규


 

광주 5.18 구 묘역 돌탑 부근에 ‘김형근 추모의자’ 세운다

 

5.18국립묘지에 故 김형근 선생을 추모하는 의자가 세워질 예정입니다.

 

인권연대는 이와 관련 17일 “시민 참여로 제작할 예정인 김형근 선생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 의자는 5.18 민주묘지 구 묘역에 설치한다”면서,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망월동에 처음 들어서는 의자”라고 설명했습니다.

 

인권연대는 추모의자 제작과 관련 “죽은 자들이 묻힌 공간, 김형근 선생도 거기 묻혔다”면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쟁했고, 민주화운동에도 열심이었다”면서 김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었습니다.

 

이어 “하지만, 조선일보의 ‘빨치산 교사’ 모략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면서, “국가보안법의 노리개가 되어, 구속 수감을 반복했다”고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인권연대는 계속해서 “그래도 김형근 선생은 교사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면서, “살아 있으려고 애썼지만, 지난해 9월 온 몸으로 전이된 암을 이기지 못하고 숨졌다”고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인권연대는 이 같이 발자취를 더듬은 후 “안타까운 죽음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면서, “ 5월 광주가 불러내, 광주처럼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기에, 망월동에 묻혔고, 그 망월동에 김형근 선생을 추모하는 걸상을 하나 놓으려고 한다”고 의미를 새겼습니다.

 

인권연대는 “‘김형근 추모의자.’ 교사 시절 그랬던 것처럼, 누구나 그 걸상에 앉아 쉴 수 있다. 걸상은 망월동 구 묘역 돌탑 부근에 설치하겠다”고 설명을 덧 붙였습니다.

 

인권연대는 이와 관련 “5월 18일(수)부터 6월 10일(금)까지 추모의자 제작과 설치를 위한 모금을 진행한다”면서,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김형근 추모의자는 작가 김정헌 선생이 진행합니다. 기획은 서해성 작가가 맡았습니다. 추모의자는 6월경 세워질 예정입니다.

 

‘망월동 걸상’ 고 김형근 선생 추모의자 설치

 

‘망월동 걸상’ 모금 계좌 : 국민은행 491001-01-183310(인권연대)

 

문의 : 인권연대  (02) 749-9004

 

 

  망월동 걸상                                                                  

 

                  - 서해성 작가

 

죽음은 늘 죽음으로써 죽음을 배신한다. 

죽지 못한 죽음은 죽지 못한 채 허공을 배회한다. 

죽음이 죽지 못하는 시대가 바로 악의 시대다. 

 

한 사내가 죽었다. 

국가보안법 노리개로 사용되다가. 

그의 빗돌을 세우되 앞면은 비우기로 했다. 

 

살아서, 식구들조차 차마 그 이름을 온전히 불러본 적이 없기에. 

그리하여 무덤 뒤에 백비를 세우고 한다. 

어찌 무덤 앞 돌로 그를 조문할 수 있겠는가. 

 

그는 5월 광주를 만나면서 세상으로 나왔고  그 5월의 허리에 묻혔다. 

그도 이름 석 자가 있어 김형근.  교사 김형근. 

 

그를 불러내 한낱 한 개 걸상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것은 그의 뼈에 걸터앉은 우리 시대를 말하고자 함이고, 죽은 자들의 이름 위에 우리가 몸과 시대와 양심을 의탁하고 있음을 비역살에라도 이르고자 함이다.

 

하필 그 공간이 망월동인 것은 그해 5월 짐짝 같이 내버린 죽음이 삶과 시대를 구한 처소가 거기인 까닭이다. 

그곳은 저항과 시대의 고향이다. 

그곳을 걸상의 고향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뜻을 숨기고 싶지 않다. 

 

앞으로 할 수 있다면 인간양심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 이름으로 걸상을 만드는 일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으면 한다.  우리 시대가 어떤 이들의 영혼과 뼈 위에 가까스로 서 있는가. 

 

1. 공간은 망월동 묘지 양지 바른 터이거나 나무 그늘 밑이면 무방하다. 

2. 이는 죽은 자의 이름으로 망월동에 처음 들어서는 걸상이다. 

3. 늘 역사와 시대정신에 천착해왔고 또 함께 살아왔기에 이 일에 가장 부합하는 작가 김정헌의 손길에 걸상을 맡기고자 한다. 

 

스스로 죄지은 자라고 믿는 자의 손길은 언제든 깊다. 

 

인권연대/ 기획 서해성/ 제작 김정헌


 

 


故 김형근 선생 걸어온 길

 

성명: 김형근(金亨根)

 

1959년 11월 5일생, 김제출신

1975년 1월 만경 중학교 졸업

1978년 1월 전주 신흥고등학교 졸업

1978년 3월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입학

1979년 12월 계엄철폐 학내 시위 주도 수배

1980년 3월 전북대학교 학원자치위원회 활동

1980년 4, 5월 전북대학교 학내외 시위 주동

1980년 5월 5.18 민주화 운동관련 수배. 학교 제적.

1980년 7월 말 체포되어 헌병대 영창에 투옥

1980년 9월 초 군보안대에 강제징집.

1982년 10월 경 군보안대에 의해 수감. 피의자 조사 녹화교육 받음

1984년 복교 조치로 전북대학교 3학년 복교

1985년 3월 전두환 퇴진 학내시위 관련 전북대학교 제적

1985년 9월 복학조치로 다시 복교, 학내외 민주화운동 주도

1986년 1월 전북 민주화운동협의회 사회부장

1986년 4월 전두환 타도 민주쟁취 시위주도, 수배.

1986년 겨울 집시법 위반 혐의로 체포 후 전주교도소에 투옥,

1987년 6월 초 석방후 6월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

1987년 9월 익산에 인문사회과학 서점 ‘황토서점’을 개점

1988년 8월 전북대학교 졸업

1992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이리익산지부 사무국장

1993년 서적 판매 관계로 국가보안법 등으로 기소

1995년 1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전북 집행위원장

  1995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

1996년 4월 전주교도소에서 출감

1997년 10월 전주에서 김형근 아카데미 논술교실 개설

1999년 11월 관촌중학교 교사 로 발령

2003년 4월 (사단법인)해오름 예술창작원 상임이사

2006년 1월 전교조 전북지부 통일위원장

2006년 3월 군산동고등학교 교사

2006년 10월 전북통일교사모임 사무국장

200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동년 6월23일 석방.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세 번 압수수색 및 1번 투옥

2015년 9월 28일 사망

2015년 9월 30일 5.18국립묘지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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